59화
토요일, 화장한 가을 날씨는 산과 들에 풍요를 가져왔다. 겨우 의료원의 나무들로 단풍놀이를 대신하며 살고 있지만,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서울에서 절친 커플 재건과 희윤이 교통사고를 당한 시후를 병문안 온다고 한 날이었다.
그렇게 말리는데도 간단한 외래 환자는 실컷 볼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는 시후는 보호장구를 다시 착용하며 진료실에서 일어났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그렇게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라 즐거운 발걸음으로 시후는 복도를 나섰다.
“퇴근하세요. 즐거운 주말입니다.”
담당 간호사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시후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수인의 진료실로 직진했다.
“김 과장님 안에 있죠?”
“네. 들어가 보세요.”
수인의 담당 간호사가 피식 웃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해도 들어갈 거면서 항상 왜 묻는지. 두 사람의 연애를 지켜보는 많은 눈들이 이젠 적응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둘의 모습의 꽤 잘 어울린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되어 갔다.
“수인아.”
“잠깐, 잠깐요.”
“우리 수인이 옷 갈아 입는구나~”
“아이참.”
하도 엉큼하게 굴어서 수인은 피해 다니느라 그게 요샌 곤욕스러웠다. 이제 시후의 교통사고가 난 날로부터 겨우 2주쯤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 사이 혹시라도 금이 간 갈비뼈가 악화될까 노심초사하는 건 온전히 수인의 몫이었다.
앞뒤 분간 없이 자꾸 덤벼드는 시후를 방어하기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재건과 희윤 커플이 내려오는 날이니 공식적으로 시후를 방어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나가요. 손님 오기 전에 집도 좀 치워야 하고요.”
“집? 누구 집?”
수인은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메다가 시후를 노려보았다. 시후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는 태연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당연히 각자 집을 치워야죠.”
“난 어지른 게 없는데?”
“그렇겠죠. 2주 내내 우리 집에서 버텼으니까.”
티격태격하는 것마저 행복하기는 했다. 의료원에 공식적으로 연애를 공포하고 나니 생활도 점점 편해졌다. 전에 수인이 면접을 본 서울 병원 원장님께는 미안하긴 해도 아직 의료원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해버리고 나니 더더욱 편해졌다.
여전히 하루에 한 번 이상 시후는 모친 정민선에게 독촉을 받고있는 중이었고, 머지않아 양가 어른들께 인사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둘은 그저 연애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만 집중하자며 일부러 모든 걸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시후와 수인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이해해주는 절친 커플을 만날 시간이라 마냥 좋기만 했다.
수인은 시후를 대신해 시후의 집까지 청소기로 청소를 했다. 부랴부랴 청소를 해놓고 제집으로 올라온 수인은 세탁기 앞에서 씨름을 하고있는 시후를 보았다.
“수인아. 이거 다 넣고 돌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뭐요?”
가까이 가보니, 수인의 속옷을 손에 들고 있는 시후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재빠른 동작으로 속옷을 낚아채고 품속에 감추었다.
“왜 속옷은 들고 그래요?”
“세탁기라도 돌려주려고 그랬지. 근데 이건 같이 돌려도 되나 몰라서.”
도와주려 했다는 게 너무 예쁘기는 했으나 벗어놓은 속옷을 보이기에는 아직 부끄러웠다. 수인은 세탁기에 속옷을 막 집어 던지고 얼른 세탁 버튼을 눌렀다.
“이리 줘봐. 내가 손빨래 해줄게.”
“됐어요! 무슨 남자가 여자 속옷을 손빨래 해준다고 그래요?”
밀어내는 수인에게 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살림에 큰 관심을 둔 적은 없지만 집안일 해주는 메이드가 모친의 속옷을 손빨래 하는 걸 본 기억이 나서였다.
“여자 속옷은 손빨래 하는 거 아닌가?”
“어머? 별걸 다 알아? 이 남자 좀 의심스럽네?”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이상하게 몰리니 억울해서 시후가 펄펄 뛰었다.
“그 정도는 다 알지 않나?”
“글쎄요. 다른 남자 경험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네요.”
은근히 약 올리는 얼굴로 수인이 웃어 보이자 몸통에 보호장구를 낀 시후가 더 펄쩍 뛰었다.
“뭐야. 그럼 난 여자 경험이 많다, 뭐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야? 와! 속옷 손빨래 한번 해주려다가 된통 당한다. 내가.”
열을 내는데 이게 또 사람 환장하게 매력 넘치는 거라 수인은 시후를 껴안았다. 그래봤자 보호장구가 떡하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포근한 맛은 없지만 약이 단단히 올라 있는 시후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왜 이리 열을 잘 받으실까? 우리 현시후 선생님?”
“아쭈! 막 가지고 논다?”
빤히 쳐다보는 통에 시후는 화르륵 올렸던 열도 급히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술이 꼼질꼼질 움직였다.
“수인아. 나 다 나은 거 같은데.”
“진단서.”
“아니. 엑스레이 자주 찍는 거 안 좋은거 몰라?”
“음. 의료용 엑스레이는 안전한데.”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수인 때문에 또다시 열이 화르륵 올랐다. 시후가 심술 난 얼굴을 하자 수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다 낫기만 해요. 내가 오빠 안 재울 테니까.”
“진짜지? 어? 약속해.”
유치하다 해도 좋았다. 원래 연애는 겉에서 보면 유치해서 눈 뜨고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안에 폭 파묻힌 두 사람은 그게 유치한 줄도 모르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약속.”
“약속의 증표로 키스 딱 한 번만 해줘. 진하게.”
갈비뼈가 아픈 시후였기에 키를 맞추려면 다리를 최대한 쫙 벌려 수인과 위치를 맞춰야 했다. 남들이 보면 기이했을 모습이었지만 둘은 어느 순간보다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다.
아마 초인종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나도 날 뻔하였다. 시후의 갈비뼈 골절이 악화되어 어쩌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왔나 봐요.”
“오. 이런. 수인아. 너 머리.”
허둥거리며 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더 어색하기만 했다. 현관을 들어선 재건과 희윤은 그런 둘에게 빙그레 웃을 뿐 추궁하지는 않았다. 한참 좋을 때라는걸 그 둘은 이미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방문한 목적은 그저 사고를 당한 시후를 병문안 왔으니 그 도리를 다할 뿐이었다.
“빨리 왔네.”
“내가 최고 속도로 왔지. 오다가 희윤이한테 허벅지 엄청 꼬집혔다.”
“왜?”
“어후. 난 카레이서인 줄 알았잖아요. 오늘 멍 좀 많이 들었을 거야.”
희윤이 상황을 적당히 설명하며 괜히 안절부절못하는 수인을 쓱 노려보았다. 수인은 희윤과 눈을 맞추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좋을 때네요.”
“그치? 아, 이 가을이 아쉽게 막 떠나간다.”
역시 재건은 말귀를 빨리 못 알아듣는 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재건 때문에 다들 크게 웃었다. 그렇게 또 즐거운 넷이 모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을 지경이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는 남자와 긴 시간 곁을 지켜준 믿음직한 친구, 그리고 재미있는 선배까지. 이 시간 이 행복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끊이질 알았다. 맛있게 저녁을 먹으며 시작했던 반주, 시후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수인의 특명에 부응하느라 아주 벌을 제대로 서고 있었다.
“저, 여기 사이다 하나 주세요.”
술 하면 어디에서도 뺀 적 없는 시후를 잘 알기에 세 사람은 소리 내서 웃었다.
“아우.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
“그냥 한잔해도 될 거 같지?”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절대 안 돼!”
수인의 강경한 발언에 그 사자 같던 시후가 어느새 덩치 좋은 강아지같이 불쌍한 눈을 하며 삐죽거렸다.
“오~ 김수인 짱 멋짐! 세상에 현시후를 응? 천하에 현시후를 이렇게 잡았어?”
괜히 오버하며 희윤이 놀리듯 말했지만, 시후는 달리 변명할 수가 없었다. 잡으면 어떠냐. 잡아주기만 해 달라 애걸복걸하던 시후였다. 남들이 제아무리 시후를 놀린다 해도 시후는 끄떡 없었다. 수인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비굴함도 다 참을 수 있었다.
“우리 수인이 짱 멋지지?”
이건 필시 팔불출이거나 바보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모습이 보기 좋은 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술잔이 오가고 웃음이 끊이질 않던 중 희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도희 그 또라이는 연락 없고?”
“응? 응. 그 이후로는.”
수인이 얼른 대답하고 술잔을 한 잔 더 비웠다. 시후는 미안한 얼굴이 되어서 수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수인도 그런 시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결혼 허락받고 그럴 나이도 훨씬 지났잖아. 뭘 걱정해?”
미성년자도 아니고 제 밥벌이 실컷 잘할 수 있는 성인 남녀였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축하해 주는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허락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금세 허락 안 해주시면 어떡해?”
수인의 말에 초를 치듯 걱정하는 희윤의 말에 모두 일시 정지가 되었다. 사실 이 둘이 넘어야 할 거대한 파도를 곁에서 보는 친구들조차 아찔하긴 했다. 현시후의 아버지 현진권의 깐깐함을 기선대학병원 출신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기선대학병원 코앞에서 쓰러져 가는 자선의원을 하는 수인의 아버지 김정수 원장과 사이가 아주 좋지 않다는 것도 모두가 알았다.
이 두 파도를 거뜬하게 뛰어넘기를 친구들 모두 바라기에 안쓰러운 시선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술이 조금 취한 재건이 묘안이라며 테이블 중앙으로 모여들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여봐. 딱 이 방법밖엔 없다.”
“뭔데요?”
“모여보라니까. 현시후. 너한테 달렸어.”
재건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모이라기에 네 사람은 허리를 굽혀 작당 모의하는 자세로 모여들었다. 다 모이자 재건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를 먼저 만들자. 현시후 할 수 있지?”
“에라이!”
“아. 뭐야!”
“말도 안 돼!”
제각각의 반응을 보이며 반동으로 몸이 튕기듯 죄다 흩어졌다.
“말이 된다니까. 손자 안고 들이미는데 아무리 원장님이라도 못 버티지.”
“그럴까?”
모처럼 재건이 시후보다 더 똑똑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수인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시후는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말 되네.”
“그렇다니까. 이게 효과 직빵이라니까. 우리 누나도 그래서 결혼 일찍 했잖아.”
결국 제 누나 과거사까지 들먹거리곤 이 방법이 최고로 효과가 좋다며 재건은 열변을 토했다.
“그래?”
“그래 인마. 그리고 어차피 애 가질 거 아니야?”
“그렇지. 가져야지. 내 소원이다. 김수인 닮은 아이 가지는 거.”
부끄러운 건 수인 혼자인가. 시후는 물 만난 고기처럼 부끄러움이란 게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있는 대로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