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걷는 것도 매우 불편할 텐데 티 내지 않고 있는 시후가 걱정이 되었다.
“차에 있어요. 김밥 재료만 금방 사 올게요.”
“괜찮아. 진짜 괜찮아. 예전엔 3일 밤새고도 거뜬하게 근무했는데 뭐.”
시후는 계속 괜찮다고 웃어 보였지만 보고 있는 사람은 또 그게 아니었다. 남들처럼 요양은 못 할망정 왜 이리 몸을 아낄 줄 모르는지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땐 어렸지. 지금 나이가 몇인 줄 알아요?”
“불과 1년 전 일이다. 그사이 내가 팍 늙었겠어?”
괜히 괜찮다는 말을 그리 뻐기며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인은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행동을 빠르게 해버리자 싶어서 수인은 보이는 대로 재료를 쓸어 담듯 바구니에 담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계산을 하고 마트를 나섰다.
살림살이가 마땅히 없기는 수인도 시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시후보다는 형편이 좀 나은 수인의 사택으로 두 사람은 들어섰다. 처음 와본 것도 아닌데 시후는 꽤 긴장한 얼굴로 수인의 집안을 둘러보더니 얌전한 자태라도 뽐내듯 소파에 앉았다. 장 봐온 재료를 터프하게 싱크대 위에 쏟아부은 수인이 말했다.
“해놓은 밥이 있어서 재료 손질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 김밥에 라면 좋죠?”
“아. 최고의 조합이지.”
이렇게 꿍짝이 원래도 잘 맞았던 두 사람, 앞으로가 더 기대되긴 했지만 시후는 벌써 수인과 정답게 살아갈 꿈에 젖어 행복했다.
“내가 뭐 할까?”
얌전한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던 시후가 행동 개시라도 한 듯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환자잖아. 그냥 앉아 있어요. 좋아하는 골프 채널을 보던지요.”
그렇지만 가만히 소파에 앉아 기다릴 수는 없어 보호장구를 몸통에 두른 채 시후는 부엌을 서성거렸다.
“앉아 있어요.”
“싫어. 지금 골프가 내 눈에 들어오겠어?”
느끼한 말과 느끼한 저 눈빛 어쩔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손을 빨리 움직여 김밥을 싸야 했다. 서둘러 재료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밥솥에 밥을 꺼냈다. 가만히 있기 싫다던 시후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냄비를 찾아 들고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수인은 김밥 준비를 하면서 시후의 모습을 쓱 쳐다보았다. 저 남자와 같이 병원에서 일하고 같이 퇴근하고, 이렇게 사는 모습이 연상되어 저도 모르게 볼이 빨개졌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너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함께 저녁을 해 먹고, 함께 뒹굴거리며 하루를 마감하고, 함께 과자를 먹으며 티브이로 영화를 보는 일, 너무 하고 싶어졌다.
“선배.”
“오빠!”
은근 기 싸움하듯 시후는 그렇게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수인은 피식 웃으며 봐준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
“그렇지. 그렇게 오빠 하다가 여보하는 거야. 알겠지? 아빠라고 해도 좋고.”
능글맞은 현시후, 정말 멀쩡해진 것 같긴 했다. 어쨌거나 수인은 할 말이 있어 불러 놓고 시후 때문에 그냥 웃어 버렸다.
“근데 왜?”
“우리, 진짜 이렇게 살아요?”
라면을 휘젓던 손길이 멈추었다. 스르륵 제자리 돌기를 한 시후가 김밥을 말고 있는 수인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이렇게 살아 줄 거야?”
“선배가. 아니 오빠가 원하면요.”
이미 시후의 입술이 수인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소리 내어 뽀뽀를 막 해대던 시후가 이번엔 다른 쪽 어깨에 턱을 올렸다.
“내가 원하면 지금부터 살아 줄 거야?”
“지금은 안 돼요. 오빠 립 플랙쳐 다 나았다는 OS 쌤 진단서 받을 때까지는요.”
수인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쪽쪽 소리를 내던 시후가 멈췄다. 그리곤 몸을 떼어내었다. 수인은 살짝 돌아보며 시후의 얼굴을 확인했다. 삐진 것 같은 표정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왜요? 그럼 갈비뼈 골절인 남자랑 뭘 해야 하는데요?”
“아니. 뭐 내가 뭐 하자는 건 아니고. 그래도 갈비뼈 골절이 뭐 전염병도 아니고.”
무척 기대를 하고 이 집에 들어섰을 게 분명한 시후는 아쉬움을 마음껏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인은 아무리 사귀기로 작정은 하였으나 환자를 상대로 과격한 행동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의사의 양심은 지키고 싶었다.
“내가 의사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됐어요. 나는 OS 쌤 진단서만 볼 테니까.”
자꾸 뭔가를 어필하려 드는 시후를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요. 오빠! 바로 입원실에 다시 넣어 드려요?”
“알겠습니다. 네. 똑바로 해야죠.”
“네. 라면 끓어 넘치는데요.”
마치 시후를 놀리기라도 하듯 가스 불 위에 라면 국물이 신나게 넘실거렸다. 시후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인에게 접근을 허락받으려면 적어도 2달은 걸릴 듯 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은 참인데 이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니, 억울한 마음에 시후는 라면을 거칠게 휘저어댔다.
“잘 끓여요. 맛있게.”
“네. 잘 끓여야죠. 네. 그럼요. 맛있게.”
수인은 약 올라 하는 시후가 재미있어서 오늘 받았던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듯했다. 이렇게 살아보자, 정답게 그리고 재미있게. 수인은 약 올라 퉁퉁거리는 시후가 너무 귀여워서 지금이라도 당장 덮치고 싶었지만 그냥 웃었다.
그렇게 정답고 재미있게 저녁을 먹고, 차를 놓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오늘 이도희로 인해 충격과 공포감을 느꼈을 수인을 위해 일부러 퇴원을 당겨 하고 나온 시후였다. 그리고 지금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어린 나이도 아닌 두 사람이었다. 3개월이란 시간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둘은 서로가 너무 절실했다. 앞으로 이보다 더 잘 맞고 더 좋아하게 될 사람은 만날 수 없다고 확신하였기에 둘은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누가 방해를 해도 잡은 두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수인아. 난 말이야. 올겨울엔 늦어도 결혼했으면 해.”
“너무 빨라요. 지금 9월인데 겨울은 금세 와요.”
서두르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을 해치우듯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빨라?”
“응. 우리 진짜 연애도 제대로 안 했잖아요.”
“살면서 연애하면 안 돼?”
그가 불안해하는 거 같아서 수인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도희 아버지가 쓰러지는 그런 일을 벌이고 그도 어딘지 모르게 압박을 느꼈을 것 같았다.
“불안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 당당해지고 싶어서.”
시후의 마음은 하루라도 빨리 수인의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수인을 감싸 안을 수 있고, 그래야 수인 혼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나눠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 집엔 뭐라고 할 거예요?”
“말해야지. 너랑 결혼한다고.”
“오빠 결혼 상대가 나라고 하면 아마 놀라시겠죠. 탐탁지 않아 하실 거고.”
“아니야. 그렇지 않아.”
말은 아니라며 안심을 시켜 주고 싶은데 수인은 너무 현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시후는 섣부른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시후의 부친 현진권이 현재 기선대학병원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에도 수 차례 등장해 김정수 원장을 비난했었다.
때로는 한국의 슈바이처를 자처하는 장사꾼에 비유하기도 했고, 자선이라는 이름을 잘못 해석한 안타까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물론 김정수 원장은 나서서 반격을 한다거나 항변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밀면 밀리고, 넘어트리면 넘어지는 쪽을 택했다.
그랬기에 시후는 의사가 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익명의 기부자로 김정수 원장을 도와주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저질러 놓은 상처를 시후는 그렇게라도 갚는다 생각하며 의료봉사를 했고, 거금을 기부해 오고 있었다.
“어려울 걸요. 오빠 아버님이 절 받아들이시지 않을 거예요.”
“수인아.”
아니라고 할 수 없어 시후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수인에게 얼마나 인색하게 굴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다른 생각하지 말자. 응? 우리 어떻게든 버티자. 응?”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제 부친을 꺾어 보겠다고 허세를 부릴 수도 없었고, 안 보고 살면 된다고 마초같이 굴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걸 수인이 원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현시후 씨가 맞는 것 같아요.”
뜬금없지만 수인은 제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밀어내고 그의 옆자리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각인을 제아무리 시켜도 현시후와 이번 생은 함께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 이번 생은 현시후 씨하고 사는 게 맞는 것 같아.”
“다음 생도 나하고 살자. 내 세상에는 김수인만 있으니까.”
미사여구로 잘 꾸며진 어느 프러포즈보다 수인의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
김정수 원장은 낡은 회전의자에 몸이 푹 기대앉았다. 어제 찾아왔던 은행 채권팀 직원에 이어 오늘은 건물주인이 찾아왔다. 보증금과 이사비용은 물론 위로금까지 얹어 줄 테니 자선의원 자리를 빼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행려인과 노숙인들이 주로 찾아오기에 건물에 악취가 진동을 하는 데다 다른 입점자들의 불만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게 건물주인의 말이었다. 몇 해 동안 보증금도 올리지 않고 월세도 동결해 주기에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지라 오늘은 꽤나 충격이 컸다.
똑똑.
“네.”
방사선사 양선생과 박 간호사가 김정수 원장을 위로하러 들어왔다.
“원장님.”
“어. 들어와요.”
이런 일이 어디 한 해 두 해였을까. 시국이 워낙 어려워지니 자선의원을 찾는 이의 발걸음은 많아지고, 들어가는 돈은 배로 늘어났다. 다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어도 이제 한계치에 다다른 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잘 알았다. 오죽하면 양선생은 쉬는 날이면 농사일을 돕는 알바를 한다고 했다.
“원장님. 약국에서도 저희 환자 약 조제 안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의원에서 진료를 봐주는 건 의사의 몫이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약의 처방은 약국에서 받을 수 있으니 문제였다.
“약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네. 이상하게 오늘 쌀쌀맞게 그러네요. 뭐 자기들이 손해볼 일은 없는 데도요.”
박 간호사는 입을 삐죽거렸다. 하도 인근의 약국들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자선의원 환자들을 받아주지 않으려 들어서 겨우 한 약국을 뚫어 놓았는데, 그마저도 이젠 안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럴까요? 어제 은행 직원들도 그래요. 우리가 이자를 미룬 적이 없잖아요.”
큰 수술이 있을 때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는 하였으나 원금을 갚아 나가지도 못하고 계속 빚은 늘어났다. 그렇지만 후원금이 들어오면 원금은 상환 못 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이자라도 꼬박꼬박 내자고 했던 일이었다.
“제일 문제는 건물주인이 왜 갑자기 변심을 했냐는 거죠.”
“이상하네요. 그렇게 변덕 지으실 분이 아닌데.”
김정수 원장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