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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7)화 (57/88)

57화

수인은 도희에게 다가가는 시후를 붙잡았다. 화를 심하게 내거나 몸으로 화를 표현하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겪게 될까 봐 수인은 걱정인 얼굴이었다. 

“선배. 그만요. 나 괜찮아요.”

도희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 시후를 말렸다. 시후는 화가 나서 움찔거리는 손을 간신히 내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주 둘이 재미있네?”

“이도희. 그만 가줄래? 선배 환자야.”

수인은 씩씩거리는 시후를 올려다보며 자꾸만 고개를 저어댔다. 신경 쓰지 마라, 화내지 마라는 표현이었다. 시후는 화가 나서 번뜩이던 눈을 수인에 맞추고 보니 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와. 정말 김수인 역겨워. 저 가증스러운 얼굴 정말 토 나온다. 하!”

수인과 시후가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도희는 눈이 돌았다. 

“네 걱정이나 해. 이도희. 이런 데 와서 무식한 힘자랑 그만하고.”

시후는 수인에게 쏟아지는 도희의 막말에 더한 말로 받아쳐 주고 싶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도희가 소리를 질러 댔으나 시후와 수인은 서로를 의지한 채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삽시간에 의료원 안은 시후와 수인이 사귄다는 소문보다 더 빠르게 이도희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수인은 정말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도희가 이제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니 안정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수인은 어두운 얼굴인 채로 오후 진료까지 마쳤다. 퇴근을 해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희윤아. 통화 가능?”

- 말해. 나 퇴근 중이야.

“아. 짜증나. 신경질 나. 미치겠다.”

속에 가득 담긴 부정적인 말을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어 절친 희윤에게 전화를 걸었던 수인이었다. 

- 왜? 행복해 죽겠다며?

어제 시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해 버린 그 일까지 희윤에게 보고를 하였으니 희윤은 당연히 수인이 지금 행복에 푹 절인 딸기잼 같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수인의 목소리는 지하를 팔 만큼 한없이 가라앉았고,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도희. 이도희가 내 진료실까지 쳐들어왔어.”

- 꺅! 오, 소름. 이도희 걔, 완전 또라이 아니니?

수인을 대신해 험한 말로 표현해 주니 속이 다 시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 야. 김수인. 의기소침하지 마.

안 보고도 수인이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희윤이 말했다. 하긴 의대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페이닥 2년까지 도합 13년을 단짝인 희윤이니까 수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희윤아. 나 너무 짜증 나.”

- 아. 진짜 내가 이도희 요년 요절을 내줘? 한주먹감도 안 되는 것이. 왜 이리 설치냐? 막말로 시후 선배가 지하고 약혼을 했냐. 결혼식을 했냐. 그냥 집안에서 말 오고 간 것뿐이 더 있어? 근데 지가 무슨 자격으로 널 찾아왔대? 걔 심각한 싸이코 아니니?

그래, 그렇다고 같이 욕이라도 하면 시원할까. 의료원에 나도는 소문이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었지만,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아. 미치겠다.”

희윤이 그녀의 속상한 마음 대신해서 욕을 시원하게 해주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주곤 있지만 수인은 울컥했다.

- 수인아. 김수인. 주눅 들것 없어. 네가 뭐 잘못한 게 없잖아. 그렇다고 시후 선배가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둘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니냐? 너 그럴 수 있다고 분명 그랬잖아. 시후 선배 크게 다친 줄 알고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며? 그 마음 그것만 생각해.

그랬다. 어제 시후가 사고를 겪고 응급 수술실에 누워있는 모습에서 이미 수인은 솔직해질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향하던 마음을 더 감출 수 없었고, 어떤 어려움도 어떤 고난도 함께라면 버틸 수 있겠다고 확인하던 어제였다. 

누군가의 장난처럼 그 생각이 마치 시험대에 오른 듯 오늘 이도희가 찾아와 속을 다 뒤집어 버렸다. 이 한 번에 무너진다면 참으로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마음밖에는 안될 것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 야. 김수인. 약해 지지마. 넌 원래 강한 여자야. 그리고 집념 빼면 시체 아니냐. 남자를 12년이나 기다리는 게 어디 쉬워? 넌 해낸 거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그래, 희윤이 말이 다 맞았다. 긴 줄도 모르고 이어왔던 세월이 12년이었다. 강산이 변하고 사람도 변할 시간. 그런데 그 시간을 억지로 끝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인은 내렸던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주눅 들어선 안 되지. 고마워.”

- 그래. 그래. 이래야 진짜 김수인이지. 다음 주 주말에 우리 내려갈게. 그때까지 깨 볶고 있어. 시후 선배한테 안부 전해주고.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친구였다. 수인은 희윤이 전해주는 용기에 바닥났던 용기 주머니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수인이 퇴근 준비를 하며 책상 정리를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담당 간호사가 들어왔다.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해야죠. 먼저 퇴근하세요.”

혹시 저 때문에 퇴근을 못 하나 싶어서 수인이 말했다. 그랬더니 담당 간호사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로 한 발 더 다가왔다. 그리곤 슬며시 말을 꺼냈다. 

“과장님. 힘내세요. 원래 사랑은 험난한 고비를 맞아야 더 단단해진대요.”

시후와 사귀는지 확인을 하며 허탈해하던 담당 간호사가 수인을 위로했다. 수인은 그저 민망하고 부끄러워 아무 말 못 하고 앉아 있었다.

“근데요. 과장님. 전 예전부터 현 과장님이랑 과장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두 분 다 멋지시잖아요.”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수인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있자 담당 간호사는 위로를 더 해주고 싶은지 말을 이었다.  

“오전에 그 여자 그냥 무시하세요. 현 과장님이 워낙 인기가 많은 남자잖아요.”

“인기 많은 남자 만나기 정말 어렵네요.”

수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시후, 대학 때도 그 인기가 얼마나 높고 높았는지, 병원에서는 또 얼마나 그 인기가 대단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수인이었다. 

그런 남자를 덜컥 차지해버린 지금이었다. 게다가 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남자였으니, 감당해야 할 무게는 말해 무엇 할까. 의기소침해진 수인은 자신이 참으로 바보 같이 느껴졌다.

“힘내세요. 그리고 얼른 퇴근하세요. 아까부터 현 과장님 자꾸 저 눈치 주셨어요.”

“네?”

담당 간호사는 자기 등 뒤로 손가락질을 해 보였다. 언제 내려왔는지 시후가 복도에 서성이는 게 보였다. 수인은 의기소침하고 어둡던 표정을 애써 고쳤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직진이라고 마음먹지 않았던가. 이제 곧 이도희라는 폭탄이 사정없이 여기저기서 터지겠지만 지구가 멸망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철학자의 말처럼 수인은 지금 당장 현시후와 눈을 맞추고 싶었다. 

“퇴근할게요. 내일 봐요.”

“네. 과장님.”

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한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수인이 진료실에서 나오자 방긋 웃는 얼굴로 시후가 다가왔다.

“이렇게 대놓고 연애해도 되나?”

괜히 좋으면서도 수인은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 그러자 시후가 그녀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치면서 눈썹을 실룩였다.

“사내 연애는 다 그런 거야.”

“입원실에 얌전히 누워있으랬는데 왜 내려왔어요?”

지나가는 여직원이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인사를 했다. 수인은 이런 상황이 영 어색해서 얼굴이 붉어진 채 인사를 하고 좀 빠르게 걸었다.

“나 퇴원했어.”

“아. 진짜 말 드럽게 안 들어! 원장님도 입원하라는데 왜 이리 고집을 부려요?”

빠르게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참 저 웃는 얼굴에 화를 낼 수도 없고, 교통사고 난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철인인 줄 착각을 하는지, 수인은 속상했다.

“집에서 쉬려고. 그건 괜찮지?”

“뭐가 괜찮아요? 교통사고 난 사람이 왜 이렇게 겁이 없어요?”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는 그랬지만 수인은 상한 몸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다. 그런 수인의 걱정도 보이지 않는지 시후는 연신 웃으며 눈을 맞추려 했다.

“집에 가서 쉬면 돼. 진짜 많이 좋아졌어.”

“무슨 슈퍼맨인가? 외계인이냐고요. 어떻게 하루 만에 괜찮아져요?”

눈을 흘기기는 했으나 그런 눈빛조차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시후에게 안전벨트를 매어주는데 벌써 시선이 뜨거웠다. 

“가볍게 뽀뽀해주면 참 좋겠다.”

대놓고 애교를 떨어대는 시후에게 수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쓱 다가가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주었다.

“가볍게 키스도 해주면 참 좋겠다.”

기대하는 눈으로 활짝 웃으며 입술을 먼저 내밀고 있는 시후에게 수인은 또 무뚝뚝한 표정으로 쓱 다가가 입술을 앙, 하고 물었다. 당황한 시후가 입을 얼른 가렸다.

“왜 이렇게 과격해?”

“말도 지지리 안 들으면서 요구 사항은 왜 이리 많아요?”

노을이 새빨갛게 지는 하늘이 참으로 예뻤고, 그 하늘을 바라보며 수인의 차가 스르륵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런 날 이렇게 함께 했던 시간도 참 많았는데, 오늘은 아주 특별한 것 같이 느껴졌다. 서로의 마음을 인정해 버린 게 이리도 행복할 줄 알았던가. 수인은 시후의 손을 꼭 잡았다. 

“저녁 뭐 먹을까요?”

“피자에 맥주?”

“환자가!”

시후가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멋진 노을을 같이 바라보며 하늘과 조금 더 가까운 루프탑에서 칵테일 한 잔 하고 싶은데 상황이 지금은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런저런 메뉴를 이야기하는 시후의 말에도 크게 당기는 메뉴가 없어서 수인이 마트에 가자고 제안했다.

“김밥 어때요? 아주 스피디하게 쌀 수 있는데.”

“뭘 해도 좋지.”

“내가 싼 김밥 맛있다면서요?”

“응. 뭘 싸도 맛있지.”

시후는 지금 김밥이 아니라 낙엽에 돌을 싸줘도 수인이 싸주는 거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감동이 밀려왔다.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 해주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시후는 기분이 좋아서 둥둥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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