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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6)화 (56/88)

56화

이도희의 싸늘한 시선이 수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도희는 진격을 하듯 수인에게 걸어왔다. 수인은 발이 땅에 붙은 사람처럼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이내 수인의 코앞까지 다가온 도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내 경고가 우스웠나 보지?”

이미 이도희를 보는 순간 머리와 몸은 비상사태가 되어 버렸고 모든 기능이 정지한 듯 멍했다. 

“내가 묻잖아!”

“목소리 낮춰.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근무 중이라 끝나고 이야기해.”

겨우 침착하게 수인이 대응을 하였다. 하지만 이도희는 제 것을 빼앗기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수인의 침착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이 미친년이!”

다짜고짜 수인의 뺨을 향해 손이 날아들었다. 수인은 도희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연약해 보이는 수인이었지만 수술실에서 몇 시간이고 중노동에 가까운 수술을 거뜬하게 해내는 깡이 있었다. 

“넌 여전히 앞뒤 분간 못 하는구나? 나한테서 뭔가를 듣고 싶다면 네가 기다려.”

수인은 도희의 손목을 내동댕이치듯 밀치고는 비상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숨 한번 쉬지 못하고 6층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도희는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야 느꼈다. 오고 가는 산모들, 보호자들하며, 간호사들까지 도희를 신기한 사람 보듯 하고 있었다. 도희는 긴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등 뒤로 넘기고는 시후의 입원실로 걸어갔다. 

노크도 생략하고 입원실 문을 벌컥 열었다. 수인이 얌전히 누워있으라고 했기에 가만히 누워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시후는 갑작스런 도희의 등장에 놀라버렸다.

“시후 오빠.”

“넌 또 여긴 왜 왔어?”

한결같이 쌀쌀맞기가 그지없는 시후를 도희가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너 설마 김수인이랑 사귀니?”

“그래 사귄다. 왜?”

통증 있는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시후가 도희를 사나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시후는 마음에 없는 여자에겐 늘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웠다. 도희를 상대할 때 시후는 다른 여자들에게 차가웠던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차가웠고, 지금은 그보다 또 수백 배는 더 차가웠다.

“하! 이게 말이 돼? 결혼 못 한다고 내뺀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귄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고?”

“너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꺼.”

“야!”

입원실 안에 앙칼진 여자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시후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고는 가슴 통증 때문에 큰 소리 내지 못한 게 억울하여 손짓을 마구 해댔다.

“나가~”

“현시후! 너 가만 안 둬!”

“그래. 맘대로 하는데, 지금은 그냥 가라. 아. 시끄러워.”

“너! 내가 놔줄 것 같아? 죽여서라도 넌 내 꺼야. 알아?”

소름이 일순간 온몸에 돋아 올랐다. 도희가 어릴 때부터 강한 집착증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 살기 어린 마음이 자신을 향한다고 생각하니 시후는 섬뜩했다. 

“이도희. 너 미쳤구나?”

“그래. 나 미쳤어. 난 내가 결정한 건 절대로 포기 안 해. 안 한다고.”

더 길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시후는 간호사 호출을 눌렀다. 

“네 발로 나가줄래?”

“뭐라고?”

“아님, 끌어내라고 할까?”

그때, 입원실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간호사가 고개를 내밀었고, 입원실 안에 차가운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시후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저. 이 여자 끌어내 주세요. 경찰 불러도 좋고요.”

그 말을 하는데 도희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를 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이 수모 단단히 갚아 줄 테니까.”

그리곤 찬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서서 입원실을 나갔다. 도희가 나가고 간호사는 멀뚱하게 시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저분이 아까부터 계속 묻더라고요. 현 과장님하고 김 과장님 친구라면서요.”

“그래요?”

“저흰 다른 말은 안 했어요. 그냥 두 분이 사귀는 거 맞냐고 묻길래 잘 모르겠다고 했어요.”

괜히 간호사는 시후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기에 시후는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신성한 직장에 이리 사적인 생활 때문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무척 민망해졌다.

“네. 알겠어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과장님.”

간호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원실을 나가고 시후는 보호장구를 낑낑거리며 착용했다. 아무래도 수인이가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후의 입원실을 쫓겨나다시피 나온 도희는 병원 로비에서 안내데스크를 찾았다.

“김수인 일반외과 진료실이 어디죠?”

선생님이라거나 의사라거나 그런 호칭도 싹 빼버리고 말하는 도희를 안내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진료받으실 거면 접수를 먼저 하세요.”

“그러니까. 진료실이 어디냐고?”

생김새는 천장 우아한 여자인데 하는 행동하며 말이 참으로 거슬리기만 했다. 안내직원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물어보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복도 끝 쪽으로 가시면 일반외과 진료실입니다.”

도희는 듣자마자 휙 몸을 돌려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어가며 일반외과 외래 진료실 방향으로 걸었다. 복도 벽 쪽에 앉아 대기 중이던 환자들 사이를 도희는 요란하게 걸었고, 다들 힐끔거리며 도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도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수인의 진료실 앞, 담당 간호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상황인데 도희는 진료실 출입구를 벌컥 열고 들어갔다.

“어머. 저기요!”

담당 간호사가 유선 전화를 한 손으로 받고 다른 손으로 이도희를 막아보려 했지만 도희는 벌써 진료실 안에 들어서 버렸다. 모니터로 환자의 MRI 촬영화면을 보고 있던 수인은 불쑥 들이닥친 도희를 보았다. 

“도둑년 주제에 의사 가운 걸치고 의사 행세하고 있네?”

“뭐?”

수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아무리 시후와 수인, 이도희가 이상하게 엮여있기는 하지만 이리 인격 모독 같은 욕설을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도둑년 아닌가? 아, 불륜녀라고 불러야 하나? 남의 정혼자와 놀아났으니?”

“이도희!”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고 담당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곤 수인에게 미안해하며 이도희의 팔을 잡았다.

“죄송해요. 과장님. 아니. 이보세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넌 뭐야?”

도희는 앙칼지게 받아치며 잡혔던 팔을 빼내더니 담당 간호사를 밀쳤다. 휘청한 담당 간호사는 어이가 없어 하며 다시 붙잡으려 했다.

“저. 괜찮아요. 지금 환자 몇 명 남았어요?”

“두 명 남았어요.”

“죄송하지만 부장님한테 부탁드려주세요.”

담당 간호사는 분위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은 담당 간호사가 나가자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뒤에 걸어둔 재킷을 꺼내 입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왜? 부끄럽기는 한가 보지? 남의 정혼자 가로채서?”

“나와.”

수인이 앞서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갔다. 도희는 기가 막혀 하며 뒤따라 걸어 나갔다.

말없이 수인은 의료원 건물 뒤 한적한 곳으로 걸었다. 결국에 이 사달이 날 줄은 알았지만 이리 안하무인 격으로 근무시간에 이런 일을 겪을 줄은 몰랐다. 

“그래. 할 말 해봐.”

“당당하네? 도둑년 주제에?”

“이도희. 너하고 이렇게 엮이기는 나도 싫었어.”

수인은 도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14년 전 전교 회장 선거 때에도 딱 이 상황이었던 것 같았다.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이도희가 무리를 끌고 찾아와 수인에게 사퇴를 요구했었다. 

조용히 사퇴를 해준다면 수인의 공약을 자신이 대신 해주겠다는 알량한 제안을 하면서. 그때의 그 눈빛보다 지금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롭고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엮이기 싫으면 조심을 했어야지? 감히 내 정혼자를 어떻게 해보시겠다? 네 주제에?”

수인의 화를 극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자격이 필요했던가. 그 자격은 누가 만들어 놓았기에 이도희가 자신 앞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내 주제가 어떤데?”

“뻔뻔하다. 너 이런 모습 사람들이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서글서글 웃으면서 사람들 환심이나 사고, 착한 척 내숭은 다 떨고, 욕심 챙길 건 다 챙기고. 너 진짜 역겨워.”

역겹다는 표현을 온 얼굴로 하고 있기에 수인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런 수인을 희롱하듯 도희는 스르륵 웃어 보였다.

“할 말 다 했어?”

“왜? 쪼르륵 현시후 한테 달려가게?”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이도희는 수인을 매우 자극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수인을 자극해서 싸움을 걸고 싶었다. 

“이도희. 난 너한테 미안해하지 않아. 미안할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뭐? 미안하지 않아? 너 정말 뻔뻔함이 도를 넘는구나? 이게 어째서 미안하지 않을 일이야? 넌 내 정혼자를 꼬셨잖아. 길을 가는 사람들 잡고 물어볼까? 누구 말이 맞는지?”

“그리고. 이런 일로 남의 직장에 찾아와서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해.”

그때, 뒤에서 굵고 시원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한다. 김수인. 되게 멋지다!”

시후의 목소리에 도희의 눈매가 정말 누군가를 해칠 듯 사납게 치솟았다.

“수인아. 들어가. 근무 중이잖아.”

수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시후를 수인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믿어 보라 했고, 그러겠다고 했으니 믿는 수밖에.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인이 도희를 지나쳐 가는데 도희가 수인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놀고 있네? 어딜 도망가?”

도희가 순간 수인의 머리채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더니 내동댕이치듯 떠밀었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수인이 기가 막혀 도희를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대처하지 못해 안타까운 얼굴로 시후가 수인을 잡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어디 봐.”

“괜찮아요.”

“야! 이도희. 너 미쳤어?”

시후가 벌떡 일어나 도희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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