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시후의 결혼 못 하겠다는 선언에 충격받은 이사장이 쓰러지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그 난리가 난 일이라 도희라면 길길이 뛰며 악감정을 들어낼 줄 알았다. 그런데 도희는 그보다 한층 더 살벌한 목소리로 시후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도희야.”
어른으로서 도희를 부추긴 것이 미안해진 정민선은 도희를 달래려 들었다. 그러나 그 말도 듣기 싫은지 도희는 얼른 정민선의 말을 끊어 버렸다.
- 저 시후 오빠 포기 안 해요. 내가 결정했던 일에 포기한 일은 없어요.
그 말이 화이팅을 외쳐줄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기보다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이 결국에 어디로 가는 걸까. 정민선은 무척이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욕심이 과한 부모라 해도 아들이 불행한 삶은 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게 아니더라도 비참하게 사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희의 목소리만으로도 목을 졸라오는 집착이 느껴졌다.
“도희야. 미안해. 우리 시후가 너무했어. 진짜 미안하게 생각해.”
- 아줌마. 전 아직 안 끝났다고요. 시후 오빠 얼마나 다친 거예요?
전화 통화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들어 정민선은 소름이 끼쳤다. 고개를 흔들어 겨우 소름을 떨쳐내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다치긴 했어. 시후도 어제 그렇게 하고 마음이 안 좋았을 거야.”
- 그렇군요.
“도희야. 이사장님 잘 보살펴 드려. 나도 병원 들러볼게.”
지금 이 시간에도 현진권은 이사장의 병실에 보초인 양 벌을 서고 있을 것 같았다. 시후의 말처럼 욕심이 과했던 걸까. 정민선은 그런 남편이 딱하기도 했고, 제 인생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아들 시후가 이해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복잡한 심정으로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오전 진료가 끝나기가 무섭게 담당 간호사가 쌍심지를 켠 눈으로 수인에게 다가왔다.
“과장님, 정말 현 과장님하고 사귀시는 거예요?”
“예? 예.”
그렇게 되었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지만, 아니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 간호사가 꽤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에이. 이왕 그러실 거면 진작 사귀시지 그랬어요?”
“네? 아. 그게.”
이게 뭐라고 왜 변명을 하고 있는지, 수인은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그런 수인을 향해 담당 간호사가 또 한마디 했다.
“현 과장님 노리는 여자들 다 울고 난리 났겠어요. 어떡해요. 김 과장님 공공의 적이 되셨네요.”
이런 상황에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해야 할지 난처한 가운데 수인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재빨리 식당에 가서 허기를 채우면 약 40분 정도 시간이 남으니 그 시간에 시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당 간호사의 꼬챙이 같은 말을 귀 등으로 흘리며 수인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시후가 인기 많은 게 수인 탓도 아닐뿐더러, 좀 반칙을 쓰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시후 옆에 버틴 세월만 12년째였다. 그러니 시후를 차지했다고 미움을 받더라도 상관없었다. 이제는 더한 파도도 힘차게 뛰어넘어야 할 처지라고 생각하니 식욕이 막 돌았다.
씩씩한 발걸음으로 직원식당에 들러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오고 가는 눈치들이 수인을 날카롭게 찌르고 갔지만 뭐 어때, 머리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간질거리기만 했다.
수인은 얼른 양치를 하고 화장을 고쳤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다시 한 번 단정하게 묶고 옷맵시도 다시 돌아보았다.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으나 시후의 표현대로 2일 차 남자친구를 보러 가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똑똑!
“네!”
우렁차고 굵은 시후의 목소리, 모친 정민선이 가셨다는 문자는 받아 놓은 지가 옛날이라 수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부인과 병동 1인실에 들어섰다. 뜨끈한 구들장에 몸을 지지고 있던 시후가 방긋 웃으며 두 팔을 들어 까딱거렸다.
“하루 종일 한 번을 안 들러?”
“여기 내 환자가 있어야 오죠.”
쪼르르 달려가 시후의 손을 잡았다. 갈비뼈에 금이 간 주제에 힘은 넘쳐서 수인을 확 잡아당겼다. 풀썩 쓰러지는 것도 예술인 수인이었다. 정확하게 팔뚝 위에 머리를 안착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난 아침 내내 수술실에 있느라 바빴어요.”
“아. 섭섭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그렇다고 어떻게 넙죽 보고 싶었다고 하기에는 수인은 아직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만큼이면 수인도 그만큼이었다. 유치하지만 죽음 앞에서도 보고 싶었던 서로라고 생각하니 이 둘을 갈라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리 와.”
“누가 오면 어떡하려고요.”
“아. 빨리 퇴원해야지 안 되겠어. 자꾸 산모들이 기웃거리는 통에 안정이 안 돼.”
그도 그럴 것이 떡하니 산부인과 병동 입원실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 환자인데다가 의사라고 소문이 나니 기웃거릴 수밖에, 그 고초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수인은 신나게 웃었다.
막 시작하는 연인이어서 그런지 대화가 없어도 두 손만 잡고 있어도 미칠 듯이 좋았다. 조물조물 손가락을 만지고 손톱을 긁어보고 이상한 짓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수인은 큼직하고 가지런한 시후의 손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았다. 굴곡진 마디 하나 없이 쭉쭉 뻗은 손가락마저 예뻤다.
“남자 손이 곱네요.”
“그치? 내가 피아노 손가락이라고. 물론 피아노도 끝내주게 연주하지.”
그럼요. 아무렴요. 뭘 해도 할 손이죠. 수술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하는데요, 이 손으로 성형외과를 전공했더라면 더 빛을 발했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손기술 하나는 끝내주는 손이었다.
손을 놓으면 당장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손을 이리 잡고 저리 잡아가며 폐에 바람 든 사람처럼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침엔 당황했지?”
“조금요.”
“우리 이겨 내야 해. 난 하나도 안 두려워.”
시후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싶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하루 만에 완벽하게 용감해 지기는 어렵지만 시후가 두렵지 않다면 수인도 그랬다.
“넌 나만 믿고 따라와.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다고 한 번에 대답해 줄 줄이야. 시후는 아픈 갈비뼈를 부여잡고서라도 이 기쁨을 승화시키고 싶었다.
“예뻐 죽겠네. 아. 진짜 미치겠다. 왜 하필 립이냐고. 껴안고 싶어 죽겠는데.”
그 죽을 것 같은 마음이야 석 달 전부터 계속되던 일이지만, 차라리 다리나 다른 곳이 다쳤더라면 지금 으스러지게 수인을 껴안고 행복에 겨워 비명을 질렀을 텐데 너무도 아쉬운 시후였다.
“이만하길 다행이죠.”
“다행이기는 한데 키스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문제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인이 시후의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개었다. 그 심정 수인도 다르지 않았다. 한번 넘었던 선은 자꾸 넘고 싶기 마련이었고, 한번 터진 두 사람의 몸은 자꾸만 서로를 원했다.
그건 수인이 아닌 척 억지로 참아내고 있어서 그렇지 그날 밤 둘이 역사를 새로 만들던 그 날부터 수인도 시후가 너무 좋았다. 그와 몸을 맞추는 일마저 좋을지 몰라서 더더욱 힘겹던 시간이었다.
그 3개월보다 지금이 더 몸이 달아오르는 두 사람이었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점심시간이 야속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데, 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도 아세요?”
“응?”
우리 사이를 아냐고 핵심을 빼버렸지만, 수인은 왠지 시후의 모친을 떠올리니 자신이 없었다. 시후 옆에 그저 후배라고 생각하며 수인에게 친절했던 정민선이 어떻게 변할지 걱정이었다.
“이제 어떡해요? 나 오늘 어머니 뵙는데 너무 내가 뻔뻔한 것 같았어요.”
“수인아. 사실 어제 내가 다 터트렸거든.”
한숨마저 나오지 못하고 시후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후가 겨우 손을 들어 수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빠 믿지?”
“믿어요.”
“오빠만 믿어.”
수인의 뺨에 올라갔던 손은 부드럽게 타고 내려 그녀의 입술에 가 멈췄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고장 나 버릴 것 같다.”
“나 근무하고 올게요. 한눈 팔지 마.”
그 말에 콕하고 웃다가 가슴 통증에 시후의 인상이 구겨졌다. 수인은 아쉬운 마음 가득 담아 입술에 키스를 남겼다.
“온통 산모들뿐이지만 한눈 팔지 말아요.”
“아! 김수인. 오빠 믿으랬지?”
“갑자기 웬 오빠 타령이에요?”
시후의 가슴에 손을 얹어 문질러 주며 입을 뾰족 내밀었다. 여태 12년을 선배, 선배 하며 불렀다. 오빠라는 호칭이 어색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시후는 그렇게 수인의 입으로 하는 오빠 소리가 듣고 싶었다.
“한 번만 해줘.”
“뭘요?”
무턱대고 한 번만 해달라는 소리에 수인은 화들짝 놀랐다. 또 능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시후가 놀려댈 준비를 했다.
“아. 김수인. 이렇게 엉큼했나? 조금만 참자. 나 퇴원하면 너 잠은 다 잤으니까 딱 기다려.”
“어머? 뭘 기다려요? 몸 회복이나 신경 써요! 아 참, 테타블린 맞았어요?”
어젯밤에 처방했던 파상풍 주사를 얌전히 맞았는지 궁금해서 수인이 물었다.
“맞았지. 누가 맞으라고 시킨 건데 안 맞겠어? 당연히 맞아야지.”
“그럼 지금부터는 얌전하게 누워있어요. 퇴근하고 올게요.”
시간은 벌써 오후 진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시후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순간이 전부 좋은데, 한번 맛본 금단의 열매였던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란 항상 쾌청하고 맑은 하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비바람도 치고, 갑작스러운 우박이 떨어지기도 하고 천둥 번개가 치기도 하듯, 지금 수인 앞에 천둥 번개가 치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수인은 마냥 행복했다.
시후에게 향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수인은 시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너무 행복했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버렸고,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은 욕심에 버티다 보니 외래 진료가 좀 늦을 것 같았다. 서둘러 비상 계단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이도희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