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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4)화 (54/88)

54화

조금 이른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정민선도 잘 알고 있는 수인이기에 어서 빨리 소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수인이 이제 곧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후의 붕붕 떠가는 마음에 제동을 거는 정민선이었다. 

“시후야. 너 잠깐만.”

정민선은 아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도희와의 결혼에 뜻이 없었다고는 하나 이사장을 쓰러트린 건 바로 어제였다. 그 시간이 만 하루를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 사이 시후가 사고를 당하기는 하였으나 이쯤 되면 아들과 한통속인 사람 같아서 그건 싫었다. 그래서 정민선은 인상을 있는대로 구겨대며 말을 이었다.

“시후야. 이사장님 어제 쓰러졌다.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신 데, 이건 아니지 않니?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여자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그리고 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제 아버지까지 어떤 수모를 겪고 있는데, 천하태평처럼 아들이 제 맘대로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를 소개받을 수는 없었다. 정민선은 대놓고 화가 난 티를 내어 버렸다. 시후도 이해는 되었고, 부모님 입장에선 단단히 화가 났겠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 그렇게 이사장님 눈치가 보이세요?”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해.”

화가 난 정민선은 말 그대로 최소한으로 시후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시후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더 심하게 잘못을 따져 물었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 아들은 큰 사고에서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만큼 부상을 입고 치료 중에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억지로 참는 중이었고, 제아무리 시후가 어떤 여자에 미쳐 있는 상대라 하여도 지금은 그 여자를 좋은 얼굴로 만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네. 알겠어요.”

감정이 서로 상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모친과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은 시후가 이쯤에서 물러섰다. 

“그럼 어머니 마음 편해지실 때 인사드릴게요.”

아파 누워있는 아들이지만 이 상황은 밉기 그지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정민선이 노크 소리에 대답을 했다.

“네!”

노크를 하고 문고리를 잡았던 수인의 손이 달달 떨려왔다. 정민선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는 수인이었고, 출근 시간도 훨씬 전에 시후의 입원실을 들러보는 중인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마주칠 거라 생각을 못 하였다. 

그렇지만 수인은 이를 꽉 깨물고 안으로 들어섰다. 수인임을 확인한 정민선은 불끈 화를 내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수인이구나. 아우, 그래 너라도 시후 옆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정말 다행인 걸까. 수인은 죄인이 된 거 같은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오니?”

시후의 사택에 들러 갈아입을 속옷하며 이런저런 입원에 필요한 것들을 마음대로 챙겨 오던 중이었다. 무언가 잘못해서 딱 걸린 사람처럼 수인은 어찌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내가 부탁했어요.”

머뭇거리는 수인을 대신해 시후가 얼른 둘러댔다. 

“그래. 착한 후배가 있으니 너무 든든하구나.”

정민선은 수인에게서 받아든 쇼핑백에서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생활에 가까운 것들이기에 멀찍이 서 있는 수인도, 누워있는 시후도, 또 물건을 꺼내 정리하는 정민선도 이상했다.

“이를 어쩌니. 시후야. 이런 건 엄마보고 말을 했어야지. 아무리 허물없는 후배라 해도 속옷까지 챙겨 오라고 했어? 미안해서 어쩌니 수인아.”

질문처럼 하고 있었지만 시후도, 수인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수인도 시후가 목록을 보내오기에 챙기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시후의 집에 드나들었던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그의 속옷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속옷을 집어 드는 일이 단번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친오빠 수열과 아버지의 속옷을 빨래하고 개어 놓았던 일이야 다반사였지만 시후는 수인에게 좀 다른 존재였으니 부끄러움이 먼저 몰려왔다. 

어색해진 분위기가 그랬던지 정민선이 얼른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참, 엑스레이 사진 하나 아버지한테 보내. 시후야.”

“아니에요. 크게 다치지 않았고, 입원도 오늘까지만 할 생각이에요.”

시후의 말에 수인도 정민선도 놀라서 쳐다보았다. 갈비뼈에 금이 갔고, 몸통에 깁스를 할 수 없기에 겉에서 보면 멀쩡해 보였지만 뼈가 붙으려면 꽤 오래 조심하며 지내야 함을 다 알고 있었다.

“얘! 이참에 좀 쉬어.”

“슬슬 움직일만해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구요.”

시후는 겨우 보호대를 하나 하고 있을 뿐이라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다 어제보다 자고 나니 또 괜찮아진 것 같아 시후가 가슴 아래 딱딱한 보호장구를 손으로 톡톡 쳤다.

“지금 진통제 때문에 괜찮은 거죠.”

수인은 참을 수 없어서 겨우 고르고 골라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정민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참에 못마땅했던 이야기는 다 하려는지 정민선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잘됐어. 이참에 서울로 가자. 가서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입원하고 몸 좀 관리하자. 내가 속상해서 죽겠어. 시후야.”

속상하긴 할 터였다. 애지중지 아끼고 아끼는 아들이 이리 일에만 눈이 멀어 몸 축나는 것도 아랑곳없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속이 탈 일이었다. 그 속에 비할 건 아니지만 수인의 마음도 비슷했다. 

“아유.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에요. 병원을 어떻게 한 달씩 비워요.”

“너 아니면 병원 안 돌아가니? 여기 수인이도 있고. 다른 선생님도 충분히 커버하겠지.”

수인은 못 해도 며칠은 입원해서 상처 난 곳 실밥이라도 뽑고 그때까지는 입원을 했으면 했다. 이미 의료원 원장님도 그리 하라 지시를 했다 들었고, 왕 부장도 동의한 일이었다. 

“됐어요. 나 빠지면 다른 선생님들한테 피해잖아요. 싫어요. 피해 주기.”

“어떻게 딱 네 아버지랑 판박이니. 이러면서 둘은 왜 이리. 안 맞는건지.”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해 버린 정민선이 수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머리를 매만지고 블라우스 위 너풀거리는 스카프를 고쳐 매며 마뜩한 눈으로 수인을 다시 보았다. 

“수인아. 시후 챙겨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저도 도움 많이 받는데요.”

“그래도 이리 챙겨줘서 고맙지 뭐야. 그래. 어서 출근해. 여긴 내가 있을 테니.”

정민선의 말에 시후는 자리에서 펄쩍 뛸 것처럼 몸의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 걱정마시고 가세요.”

“어떻게 그래? 그리고 너 이대로 또 일한다고 나설 거잖아.”

펄쩍펄쩍 뛰고 싶은 마음 억누르며 시후가 고개를 저어댔다. 정민선은 다시 수인이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하는 척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어떡하시고요. 저 어린애 아니니까 걱정마시고 올라가세요. 네?”

“네 아버지 걱정할 게 뭐야. 메이드도 있는데. 걱정하려면 네가 더 걱정이지.”

시후는 수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아련하게 쳐다 보았지만 수인도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이었다. 수인은 그저 예의를 다해서 인사를 할 뿐이었다.

“그럼 전 외래 내려가 볼게요.”

“그래라. 늘 고마워 수인아.”

“아니에요. 그럼.”

입원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수인을 붙잡고 싶은 시후는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아. 어머니. 그만 가세요. 네? 저 불편해서 안 되겠어요.”

“뭐가 불편해? 하긴. 이게 뭐니?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바닥 생활을 네가 해본 적이 없잖아.”

머리가 띵~ 어지러운 건 바닥이 과하게 따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수인과 눈을 맞추고 입도 좀 맞춰보면 금세 나을 일인데, 모친이 버티고 있으니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문제였다. 

정형외과 쌤도 그랬다. 행복한 시간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시후의 행복한 시간을 마구 무자비하게 빼앗고 있는 모친을 어떻게든 빨리 보내야 했다.

“어머니. 저 다른 데는 다 멀쩡해서 잘 돌아다니니까 걱정마세요.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네?”

“넌 왜 나를 못 쫓아내서 난리라니? 뭐 내가 자꾸 결혼 얘기 꺼낼까 봐 그런 거니?”

그것이든 아니든 이곳, 이 비좁은 입원실에 모친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로도 혈기 왕성한 아들 시후는 혈압이 오를 뿐이었다. 

“아니에요. 아. 그리고 어머니가 아무리 결혼 얘기 다시 꺼내신다 해도 전 이제 안 들어요. 들을 수도 없고요. 저 결혼할 여자 있다고 분명 말씀드렸고, 그 결혼 올해 안으로 할 겁니다.”

사춘기 때도 모친 정민선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군적은 없었다. 

정민선은 도끼눈을 해서 시후를 노려보았다.

“현시후! 아무리 요새 애들 제 맘대로 산다지만, 너 너무하는 거 아니니? 아버지 체면은 안중에도 없니? 아무리 그래도 너 어제 깽판 치고 너무 하는 거 아니니?”

정민선도 쌓아 놓았던 감정이 너무 많아 막 터지는 것 같았다. 아픈 아들이다, 맘속으로 수십 번 외쳐도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자제가 되질 않았다.

“맞아요. 저 이제 깽판 막 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저 나이 어리지 않아요. 제 인생 제가 삽니다. 저 좋아하는 여자하고 진짜 행복하게 살 거라구요. 그게 잘못됐다고 어머니 말씀하실 수 있어요? 네?”

우리 아들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버린 것 같았다. 3중 추돌사고로 시후가 중간에 끼었다고 들었다. 그 충격이 심하게 남았던가.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지만 큰 소리 낼만큼 엄마에게 덤벼들던 아들이 아니었다. 필시 사고 후유증인 것 같아 정민선은 걱정이 되었다.

“시후야. 너 머리 다친 건 아니지?”

“머리도 다쳤습니다. 그러니 제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마세요. 오늘부터 간섭 거절입니다.”

“시후야!”

시후에게 아직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얄팍한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어제 이사장을 졸도 시키고 제 아버지 현진권이 얼마나 손이 발이 되게 빌었는지 알기나 할까. 

기회를 주신다면 아들을 꺾어서라도 데려올 테니 너그러이 봐 주시면 안 되겠느냐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는지 알기나 할까. 

정민선은 아들에게 바늘 구멍하나 찔러 볼 곳이 없다는 걸 느끼며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후의 입원실을 나오며 정민선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민선은 도희의 전화를 받았다. 화들짝 놀라면서 정민선은 심호흡을 연신 한 뒤에 겨우 전화를 받아들었다. 

“응. 그래 도희야. 지금 시후 만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야.”

- 오빠 많이 다친 거예요?

그래도 걱정인 목소리를 들으니 정민선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도희야. 네 속도 편하지 않을 텐데. 미안해. 일이 이렇게 어그러질 줄 누가 알았겠니.”

- 아직 안 끝났어요.

살벌한 도희의 말에 정민선은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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