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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3)화 (53/88)

53화

한대 또 쥐어박을까 하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치겠다. 현시후씨. 치료에 집중해요. 뭐에 찔렸는지도 모르면서, 이러다 테타누스면 어쩔 거예요? 테타블린하고 GM 처방할 테니 얌전히 맞아요.”

녹슨 못이나 철제에 찔렸을 가능성이 있기에 수인은 파상풍 주사약과 항생제를 처방한다면서 아주 깨끗하게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아!”

“괜찮아. 다 했어요. 좀 참아요.”

“아!”

계속 아프다며 엄살을 떨어대는 시후 때문에 수인은 점점 더 고개를 처박고 상처에 집중했다. 하필 좌식 입원실이기에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벌린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인은 초집중 상태인지라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정형외과 담당 의사가 들어왔다.

“헙!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노크 했습니다.”

영락없이 문 쪽에서 보면 이상하고 요상한 자세임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수인이 쓱 돌아보았다.

“저. 좀 있다가 올까요?”

되레 정형외과 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미 원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에 오늘 근무자가 아닌 직원들에게까지도 핫라인으로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아니에요. 다 했어요.”

수인이 장갑을 탁 벗어 뭉쳤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정형외과 쌤이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며 입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보이는 장면만으로 무슨 상상을 하였던지 새빨개진 얼굴로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현 과장님, 엑스레이 상으로 3번, 4번에 프랙쳐 소견 보입니다. 심한 건 아니고 뼈가 붙을 때까지 통상 2주에서 3주 소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사이 무리한 생활은 안될 것 같고요.”

무리한 생활이 무얼 뜻할지 각자가 해석할 일이었지만, 정형외과 쌤은 조금 전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네. 하하하.”

아주 친한 동료가 아니었지만 2년을 함께 일해온 직장 동료였기에 정형외과 쌤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두 분, 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

“예?”

수인이 당황하여 딸꾹질이 막 튀어나왔다. 시후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짓고는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오늘부터 1일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지금 원내가 두 분 이야기로 아주 시끄럽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하! 조용히 사귀려고 했는데. 하하하.”

시후가 따라서 웃었지만, 탈탈 털어 보아도 그의 말처럼 조용하게 사귀려던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선남선녀의 만남이네요. 두 분 축하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축하 인사에 수인은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여 버렸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잘 어울리세요. 저도 와이프하고 학교 때부터 커플이었는데 아주 좋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동료인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시후는 신난 사람처럼 말을 자꾸 받아쳤다.

“그렇죠? 같은 직종이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과장님 결혼하신 지 몇 년차십니까?”

“저는 5년 넘었죠. 아주 좋으실 땝니다. 눈치 보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

나이가 시후와 수인보다 5년 많은 정형외과 쌤은 쑥스러워할 때는 언제고 이젠 결혼 선배로서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결혼은 언제쯤 하실 생각인지?”

아주 정형외과 쌤이 자기 멋대로 진도를 시원시원하게 내빼주고 있었다. 듣고 있기 민망하여 수인은 계속 트레이 안에 별거 없는 도구들을 정리했다.

“빨리 해야죠. 당장 내일이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 몸이 이러네요. 하하하.”

“무리하시면 안 되지만 뭐, 행복한 시간이 치료에 도움이 되기는 하죠. 하하하.”

도대체 이 두 남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무튼 수인은 좀 빨리 정형외과 쌤이 나가주길 바랬다. 

“오늘, 저 당직입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콜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정형외과 쌤이 자리를 떴다. 너덜너덜해진 건 수인 혼자였던가. 시후는 다친 사람 같지 않게 얼굴색도 밝았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널따란 요 위에 몸을 눕힌 시후가 갑자기 옆에 누우라는 듯 바닥을 탁탁 쳤다.

“왜요?”

“이제 곧 자정이잖아. 자야지.”

시간이야 그쯤 되었을 것이지만, 이건 뭐 어째야 할지 수인은 난처했다. 정형외과 쌤에게 오늘부터 1일이라고 아무리 말했다 하더라도 사이좋게 같이 누울 수는 없었다. 

“필요한 거 말해요. 내일 아침에 챙겨 올 테니까.”

“필요한 거 말해?”

또 사람 기를 깔딱 넘길 말을 해댈 것 같아서 수인이 인상을 마구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눈치 볼 것도 없는 시후는 아주 당당했다.

“필요한 건 김수인 하나뿐이지. 이리 와, 여기.”

또 한 번 바닥에 탁탁 소리를 내며 팔을 내밀었다. 밤은 깊어가고, 마음도 깊어가니 어쩌면 좋을까. 이성적으로 미쳤다며 거부해야 하는데 그게 또 안될 것 같았다. 수인은 슬그머니 엉덩이로 뽀짝뽀짝 다가가 앉았다. 

“누워. 그냥 누워서 이야기하자.”

“하! 모르겠다. 죽다 살아왔다는데.”

생각과 걱정을 멈추고 그저 이 남자 무사하게 있다는 그 사실만 느끼고 싶었다. 수인은 그가 내어주는 근육질 팔뚝에 머리를 베었다.

“아!”

누운 수인을 다른 팔로 껴안아 보려고 무심코 팔을 들어 올렸다가 갈비뼈 통증으로 시후가 외마디를 질렀다.

“그냥 누워있어요. 애쓰지 말고.”

“그럼 수인아. 네가 안아주라. 응? 나 환자잖아.”

미치겠다. 아니 돌겠다. 수인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자꾸 팔을 뻗어 수인을 안아보려 애를 쓰는 시후의 그 몸부림이 애처로워서 큰맘 먹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환자복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에게서 나는 시원한 체취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좀 위로 올라오면 안 돼?”

“거 참, 요구 사항이 왜 이리 많아요?”

“얼굴이 안 보이고 머리만 보이잖아.”

시후의 애교 만발인 말 때문에 수인은 머리를 조금 더 위로 올리다가 시후의 근육 빵빵한 팔뚝에서 미끄러져 고개가 휙 젖혀졌다. 고개 때문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고, 그 모습으로 시후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아이참. 김수인.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섹시하게 도발하면.”

“어머 어머. 나 목 디스크 걸릴 뻔했다고요. 무슨 남자 팔뚝이 이렇게 굵어요?”

티격태격하는 재미가 미치게 좋았다. 그냥 옷깃만 스쳐도 심장이 벌렁거렸고, 뽀스락 소리만 들어도 땀구멍에서 땀이 뿜어져 나올 지경이었다. 

“아. 안 되겠다.”

“왜요?”

시후가 팔이라도 저린지 뭔가 불편한 것 같아서 수인이 얼른 고개를 들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시후가 아주 능글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키스해줘. 나 환자니까.”

그놈의 환자 소리에 수인은 인상이 써졌다. 환자라면서 왜 자꾸 매력을 질질 흘려 대는 건지. 주저하는 수인을 억 소리 내어가며 시후가 잡아당겼다. 못 이기는척 수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 연고를 찍어 바르고 밴드를 붙인 얼굴이었지만 잘생긴 건 감추어지지 않았다. 수인은 그가 입술은 안 다쳐서 다행이라던 그 입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어쩜 남자가 이리도 깨끗하게 하얀 피부하며, 주름 하나 없이 입술은 탱글한 라일락 색깔인지. 그 입술이 무슨 맛인지 이미 알아버린 수인의 몸이 자동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지그시 아래로 내려 입술을 머금었다. 쪼옥쪼옥.

얼마나 정신없이 그의 입술을 탐하였던지 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시후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고 두 손으로 수인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어머!”

“아. 나, 나도 모르게. 미안.”

온통 붉어진 얼굴을 해서 수인이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가 금 간 갈비뼈 두 동강 나겠네요. 안 되겠다. 그만 자요. 산부인과 병동이라 방바닥도 따끈하고 잠이 푹 잘 오겠네요.”

수인이 어느새 신발을 꿰신고 있었다. 아쉬움이 폭발한 시후는 빨리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손을 뻗어댔다.

“필요한 거 문자 해요. 세면도구는 뭐 다 있네요. 그럼 전 이만.”

수인이 달아나듯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분명 의사는 환자의 건강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환자의 건강을 악화시켜 버릴 것 같았다. 수인은 도망치듯 입원실을 나와 간호사 데스크를 피해 빙 돌고 돌아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주차장까지 도둑고양이처럼 사람들 눈을 피해 간신히 도착을 하였다. 내일부터가 문제였다. 병원 떠나가도록 통곡을 하며 그 난리 쇼를 해댔고, 목격자가 넘쳐나는 이 마당에 어떻게 철판을 깔지 그것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수인은 운전석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어쩌지.”

하. 어쩌지. 이미 먹겠다고 빵 반죽 다 해놓은 마당에 밀가루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지만 수성 의료원 이 안에 현시후를 좋아하는 여자가 몇 명인데, 그 여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한 번씩만 받아도 최소 사망일 듯했다. 

이러다 의료원 그만둔다는 직원들 속출하면 어쩐다. 수인은 한숨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고민이라고 하고 있는 걸 보니 간이 커지긴 한 것 같았다. 

이런 자잘한 고민에 비할 수도 없이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맥 같은 고민이 이제 곧 닥쳐올 텐데, 이게 뭐라고 고민씩이나 하는지. 수인은 그래서 한숨이 또 툭 하고 나와 버렸다.

그렇지만 이제 수인은 겁난다고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도 마음 같아서는 시후를 막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감정이 먼저였다. 겨우 시후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달아나고 있는 수인이었지, 다른 이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뭘 고민해? 고민 끝이잖아.”

수인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날, 시후의 사고 소식을 접한 모친 정민선은 기겁을 해서 의료원에 달려왔다. 시후를 보자마자 눈물 바람인 정민선이었다.

“어머 시후야. 이게 어떻게 된 거니.”

“괜찮아요.”

“이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정민선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글썽였다. 시후는 제가 저지르고 나온 일이 걸려서 정민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괜찮으세요?”

“나? 나야 뭐 그렇지. 네 아버지가 충격을 받으셔서 그게 문제야.”

아들이 사고가 나서 이리된 걸 보고 더는 언짢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지 정민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죄송해요.”

“에효. 그게 뭐. 너도 편하지는 않은 일이었겠지.”

이 사장과 만났던 일들을 더 언급하지 않는 정민선을 보고 시후는 이젠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 저 만나고 있는 사람, 이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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