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왕 부장은 시후에게 눈을 껌뻑거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이고. 김 과장이 이렇게 현 과장을 좋아하는지 내 몰랐잖아.”
“하하하. 부장님 잘 보셨네요.”
깐족이듯 말을 하는 시후에게 수인은 꿰매던 실을 쭉 잡아당겼다. 상처가 딸려 올라와 아픈지 시후가 신음소리를 내었다.
“아~”
“부장님도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수인이 새치름한 말투로 왕 부장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왕 부장은 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의 업적을 보상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고. 현 과장이 나더러 그래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했다니까. 김 과장하고 잘되고 싶은데 영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도와달라잖아. 그러니 내가 어떡하나. 도와줘야지. 그래야 김 과장 다른 병원 안 갈 거라는데.”
일사천리로 하나 남김없이 털어 버리고 왕 부장은 가벼워진 양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던 장본인 시후는 딱 낚시 바늘에 꿴 물고기 처지였다. 수처 바늘에 힘이 쭉 들어가서 시후는 입술을 말아 물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
“마취해서 안 아플 텐데 왠 엄살이에요?”
수인의 눈초리가 살벌했지만, 시후는 어떤 따가움도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살은 애정전선에 필수.
“아니야. 아파. 진짜야. 살살해주세요. 김 선생님.”
시후의 애교가 아주 사람 환장하게 만들었다. 눈을 있는 대로 흘겨대며 수인이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꿰매는데 옆에 왕 부장이 화들짝 놀랐다. 얼굴에도 1센티에 4 땀 정도면 훌륭한데, 쇄골 위 5센티 벌어진 상처에 수십 땀은 더 되게 꿰매는 수인이었다.
“아니, 무슨 수처를 이리 꼼꼼히 해?”
“흉 남잖아요.”
아니, 흉 남아봤자 얼굴도 아니고 게다가 남녀 차별까지 갈 것도 없지만 겨우 쇄골 윗 부위였다.
대답을 하면서도 어찌나 열심히 꿰매고 있는지 왕 부장은 웃음이 나왔다. 저리 좋아하는 사람을 어찌 애타게 만들었단 말인가. 왕 부장은 몽글몽글 아름다운 감정을 만들어 내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았다.
“둘이 잘 어울리는 줄 왜 몰랐지?”
“그렇죠? 우리 잘 어울리죠?”
팔불출에 빙구미를 막 방출하며 시후가 말했고, 수인은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저, 부장님.”
그때 김 간호사가 수술실 밖에서 연락을 받아 왔다.
“1인실이 지금 다 꽉 차서 OBGY 입원실밖에 없다는데요.”
“잘됐네. 뜨끈한 데서 몸 좀 지져.”
그렇게 시후는 산부인과 병동에 갈비뼈 골절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수인이 이런저런 연고와 거즈가 잔뜩 든 트레이를 들고 시후의 입원실에 들어섰다. 피투성이였던 얼굴과 몸은 깨끗하게 씻어내었고, 어색하지만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구들장이 뜨끈한 좌식 바닥에 누워있는 게 좀 웃음이 나긴 했지만 수인은 일단 시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다른 데는 괜찮아요?”
“어디?”
산소마스크를 쓰고 요염하게 바닥에 누워 말하는 시후였다. 어떤 순간에도 이 남자 참 멋있었다. 자기도 가슴 압박을 받아 갈비뼈 두 개가 골절이 된 상황에서도 뒤차 운전자를 차에서 꺼내 지혈을 하고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니, 직업정신마저 끝내주는 남자였다. 그렇게 제 몸 소중함을 미루는 남자였기에 수인은 세세하게 살펴보려 했다.
“어디든요. 립 말고 다른데 아픈 곳은 없냐고요.”
“모르겠는데. 김수인이 꼼꼼하게 다 꿰매준 거 아닌가?”
바닥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수인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숨을 있는 대로 내어 뱉었다.
“옷 갈아입으면서 못 봤어요? 나는 얼굴하고 목 부분만 봤잖아요.”
슬며시 시선들이 서로 얽혀드는 통에 수인은 얼른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이번엔 시후가 스르륵 수인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입술은 상처가 안 나서 다행이야. 그치?”
“그치는 뭐가 그치예요? 몸에서 피가 나는데도 키스가 급해요?”
좀 전 응급 수술실에서의 일을 두고 수인이 타박을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떤가. 시후 입장이라면 피가 한 바가지 흐른다고 눈 하나 깜짝할 일이 아니었다. 애를 새카맣게 태우던 그 김수인이 순순히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춰주는데 이보다 더한 상황이면 어떠하리. 이렇게 수인이 눈만 맞춰줘도 좋아서 숨이 꼴딱 넘어가겠는데 어쩌겠는가.
“키스가 급하지. 더 급할 게 뭐야. 우리 예쁜 김수인이 드디어 나를 받아준다는데.”
“몰라요. 아직!”
이미 다 들통 난 마당이었지만 수인은 아직 이라며 선을 그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건 수인 자신이었다. 모르긴 개코를 모르나. 수인은 그저 인정할 수 없다고 비겁하게 밀어내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고, 이제는 그에게 가는 마음 막아설 자신이 없었다.
“김수인. 너 자꾸 이러면 나 방송 출연해서 말한다!”
말없이 그를 째려보았다. 째려볼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시후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가슴을 숯덩이로 만들며 기다린 시간만큼 시후도 이젠 무조건 직진이었다.
“얼른 항복해. 빨리!”
“아, 진짜 왜 이래요?”
“항복해.”
그의 눈이 너무 진지하기에 수인은 한숨을 내쉬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후가 만세라도 부를 태세로 팔을 치켜 세우다 억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어머! 괜찮아요?”
“드디어 항복 받았다.”
천진한 아이처럼 활짝 미소를 짓는 시후를 보며 수인은 또 한숨이 나왔다. 인생 뭐 있나. 그렇다고 둘의 사랑이 불륜도 아니고, 직진하자며 손 내밀고 있는 남자의 손을 거절해도 유분수가 있지. 그저 이젠 손을 잡을 수밖에.
감격에 겨운 시후와 그 감격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던 수인은 정지 화면처럼 똑바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수인에게 향하는 못된 몸을 억지로 눌러 내리며 시후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확인 부탁드립니다.”
은근슬쩍 환자복 상의를 탈의하는 시후, 수인은 큼 하고 기침 소리를 내면서도 그의 상체를 샅샅이 살폈다.
상처 난 몸이지만 이 남자의 몸은 어느 순간에도 완벽하게 빚어낸 조각 같았다. 매끄럽고 탄력이 넘치는 피부 감촉을 느끼며 수인은 그의 몸을 훑어 내렸다.
“큰 상처는 없네요. 돌아봐요.”
어깨를 잡고 돌리려는데 힘주고 버티는 그가 느껴졌다.
“사실은.”
주저하는 듯 시후가 망설였지만 수인은 이런 순간에도 장난을 칠 것만 같아서 그를 째려보았다. 아무튼 이제 막 나가겠다는 거지? 이미 서로 마음 확인해 버린 직후지만 그래도 아직 수인은 이성이 멀쩡했다.
“뭐요? 뭐? 사실은 뭐?”
바지춤을 내리려 드는 시후의 손목을 꽉 눌러버렸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성급히 놀란 입은 말을 버벅거렸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실은.”
뭐가 사실은, 이라는지, 수인은 혹여 문이 확 열릴까 두려워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 사이 수인이 누른 손을 가뿐하게 털어내고 시후가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
그의 드로우즈 밴드가 보이고 더 아래까지 내려간 바지 때문에 수인의 눈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눈을 감을까 잠시 고민하다 눈을 위로 치켜세웠다.
“아. 김수인. 뭘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나 덮치고 싶은데 어떻게 참았어?”
“나. 참! 지금 바지는 왜 벗고 그래요? 얼른 안 올려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그때, 시후가 가랑이를 좀 더 벌려 한쪽 다리를 세웠다. 더 민망해진 수인이 화들짝 놀라서 얼굴에 인상을 확 썼다.
“이 남자, 왜 이러는 겁니까? 혹시 추돌 때 머리도 부딪혔어요? 네?”
이 미칠 것같이 이상한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할 수 있는 말은 다 끌어내 놓으려고 수인의 뇌를 미친 듯이 돌렸다. 그 와중에 시후의 손이 수인의 어깨를 꾹 눌러 잡았다. 그리고 아래로 당겨대는데, 점점 몸이 시후의 그 중심부 쪽으로 가기에 수인은 이제 진짜 식겁한 얼굴로 시후의 손을 뿌리쳤다.
“아, 뭐? 뭐 하자는 건데~”
“여기. 뭐에 찔린 거 같은데.”
머리가 순간 멍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수인이 또 말을 더듬어댔다. 이번엔 정말 당황해서 그랬다.
“어. 어디요?”
시후가 다리를 더 세웠고, 허벅지 안쪽에 꽤 깊이 찔린 상처가 보였다. 위치가 조금만 빗겨 들어갔으면 큰 혈관을 찌를 뻔한 상처였다.
“왜 말 안 했어요? 이거 뭐에 찔린 거예요?”
“지금 말하잖아. 근데 왜 환자한테 화를 내고 그래?”
역시 한 수 위랄까. 시후는 느긋한 표정을 지어가며 수인 놀리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진심으로 당황한 수인은 떨리는 손을 겨우 상처 근처에 가져다 댔다.
“아니. 뭐. 갑자기 예고 없이 바지를 벗으니까.”
수인은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준비했던 처지 트레이를 잡아당겨 옆에 놓고 시후의 허벅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 그럼 예고하고 바지 벗는 건 오케이?”
“아, 진짜! 미쳤어~”
째려보는 수인을 마냥 행복한 얼굴인 채 보면서 웃어대는 시후였다.
“아. 진짜. 바보 같은 거 알아요? 그 똑똑하고 잘난 현시후 씨 대체 어디로 간 거예요?”
“맞아. 나 바보. 그냥 바보 할래.”
현기증이 일어서 수인은 목이 탔다. 괜히 가슴을 탁탁 쳐보았다. 그리곤 거칠게 시후의 허벅지를 손으로 끌어 잡았다.
“아~ 살살 해주세요. 선생님. 저 환자예요.”
“꽤 깊은 스탭 운드잖아요.”
“그래? 어쩐지 샤워하는데 피가 자꾸 나더라.”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어찌나 성의없이 말하는지 수인이 다시 고개를 들어 시후를 째려보았다.
“어머? 이게 어쩐지 할 일인가? 여기, 여기 찔렸으면 어쩔 뻔했어? 왜 이리 둔해요, 사람이?”
큰 혈관이 지나는 자리를 일부러 손으로 콕콕 찍어대었다. 움찔거리며 아픈 티를 내고는 있지만 시후는 연신 헤벌쭉했다.
수인은 한숨을 내쉬고는 멸균 장갑을 착용하고 시술 포를 다리 아래에 깔았다. 준비를 하고 있는 수인을 흐뭇한 표정을 내려다보는 시후가 말했다.
“여자친구가, 아니지 와이프가 의사니까 짱 좋네. 응?”
이미 시후에게 수인은 어디 달아날 수 없이 와이프가 되어 버렸다. 그 생각에 혼자 키득 웃는 시후였고, 말을 하는 그의 눈이 또 둥글게 휘어져 애교를 떨어댔다.
그러나 수인은 배운 대로 냉정하게 소독약을 들이붓고 처치를 시작했다.
“아 따가워~”
“움직이지 마세요.”
몸을 비틀어대는 시후와 상처를 치료하려는 수인의 몸이 야릇하고 희한하게 얽혀들었다. 결국 시후는 다른 쪽 허벅지를 한대 얻어맞고서야 호들갑을 멈추었다. 수인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허벅지 안쪽을 치료하는데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요?”
“야릇해. 와, 미치게 좋은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