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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0)화 (50/88)

50화

펄펄 뛰며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던 시후가 순순히 정민선을 동행하고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불안한 정민선은 자꾸만 시후를 돌아보았다.

“시후야. 네 아버지 말이야. 너한테 말은 무뚝뚝하게 하시지만 너 때문에 요새 통 잠을 못 주무셔.”

감정에 호소를 해볼 생각으로 정민선은 시후의 눈치를 살피며 또다시 말을 이었다.

“그날 너한테 모질게 말씀은 하셨지만 내내 후회하시는 눈치셨어. 너도 알잖아. 아버지 성격.”

너무 잘 알아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나면 죽어도 하나인 시후의 똑 부러지는 성격이 부친 현진권에게 물려받은 건 사실이었다. 

“넌 늘 착한 아들이었잖아. 시후야. 이번만 엄마 아빠 뜻을 좀 따라주면 좋겠어. 너보다 인생 많이 살아본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다른 일도 아니고,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일을 어떻게 한 번만 눈을 감으라는 말인지 도무지 시후는 모친 정민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응. 그래. 시후야.”

뭔가 감정에 호소했던 게 잘 스며드는지 궁금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들의 눈빛은 매우 차가워 보였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 인생 포기하고 누굴 위해 살면 되죠?”

“저기 시후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구나. 도희와의 결혼이 인생 포기는 아니지 않니.”

“포기 맞아요. 제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그 순간부터 저는 없죠. 저 현시후 아니고, 이도희의 남편이나 이국남 이사장 사위로 살라는 그 말씀이잖아요.”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말투도 차가웠다. 정민선은 아들의 손을 잡고 감정이 아니면 눈물의 호소라도 할 참이었다.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고, 나가라면 나가고, 먹으라면 먹고, 짖으라면 짖으면서 그렇게 살아 드려요?”

“어머. 시후야. 너무 비약이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런 말 아니었어.”

삐딱하게 구는 아들에게 정민선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해졌다. 어쩔줄 몰라하는 모친의 얼굴을 보면서 시후는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다시 한번 제 마음을 표현했다.

“그렇게 살아 드리면 좋겠지만, 전 안 합니다. 그런 줄 아세요.”

그리곤 도착한 장소에 시후가 먼저 내려버렸다. 뭔가 큰일이 나도 날 것 같은데 정민선은 허둥거리며 아들 시후를 잡으려 달려 갔다.

“시후야, 시후야.”

앞서 걸어가는 시후를 잡으러 달려가는데 이미 이 이사장과 그의 딸 도희가 오고 있었다. 그 뒤에 현진권의 모습도 보이기에 정민선은 아찔해져 버렸다. 시후도 걷다가 이 이사장의 무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 현시후. 언제 봐도 잘 생겼구만. 오랜만이야.”

이 이사장이 늙어 쪼글거리는 얼굴을 활짝 펴고 시후를 반겼다. 시후는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들어가자고. 하하하.”

기분이 좋은지 이 이사장은 딸 도희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시후를 또 한 번 쳐다보고 했다. 도희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시후에게 다가섰는데, 시후는 빨리 걸어 문을 잡고 섰다. 

그렇게 식당에 들어선 사람들은 평소 친분을 과시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려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다만 시후는 목석같은 표정이고, 도희는 새침하고 불만인 얼굴인 게 다를 뿐이었다. 도희는 제 전화도 씹고 연락 한번 없는 시후에게 투정이라도 부려볼 참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현시후.”

“네.”

갑작스런 호명에 시후가 얼른 대답을 했다. 이 이사장은 불러 놓고 또 한 번 시후의 얼굴과 도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병이 깊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이사장님.”

“아빠!”

다들 무슨 유언 씩이나 듣는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며 이사장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내 이 녀석 하나 잘 사는 거 보는 게 소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시후?”

“이사장님, 왜 이리 약한 말씀을 다 하십니까? 더 오래 견디셔야지요.”

현진권이 안타까운 얼굴 표정으로 말을 받아쳤다. 그러나 시후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이사장님.”

시후가 입을 떼니, 그 자리에 놀라는 사람만 벌써 세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도희의 부모님 두 분만 해맑게 웃으며 시후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바라보았다. 

“그래.”

“드릴 말씀 있습니다.”

도희는 직감했다. 시후의 입에서 모두가 나자빠질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걸. 도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말해봐.”

이 사장이 말해 보라 하기에 시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여 사죄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저 이 결혼 할 수 없습니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아비규환이 되고야 말았다. 이 이사장은 심장을 부여잡았고, 폭탄선언을 한 시후를 빼고 모두가 이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그만 노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미동을 못 하고 있자, 시후가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이사장의 셔츠를 풀고 호흡 소리를 확인하는데, 현진권은 시후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었다.

“저리 썩 꺼져.”

그리고는 현진권이 응급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구급차 불러!”

현진권의 소리에 이 사장의 수행비서가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도희의 엄마와 도희는 울며불며 이 사장에게 매달렸다. 시후는 현진권에게 떠밀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구조사들이 이사장을 들것에 실었다. 

따귀라도 맞을 생각에 버티고 서 있는 시후를 정민선이 얼른 밀어내었다. 

“얼른 가. 빨리.”

다들 화가 나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정민선은 일단 시후부터 챙겼다. 그 다음 일은 시후가 피 터지게 맞을 일뿐인지라 정민선은 재빨리 아들부터 구하고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지금은 일단 얼른 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병원은 우리가 갈 테니까. 얼른 가. 아버지한테 맞지 말고.”

시후는 떠미는 정민선에 의해 억지로 한 발짝 걸음을 떼었다. 이 사단이 날 거라 예상을 했으나 병약한 노인을 상대로 너무 못난 짓을 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긴 한숨을 내어 쉬며 시후는 그래도 이 고비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더는 생각만 할 수 없었다. 시후 인생에 유일한 여자는 김수인이라는 결론을 내버렸으니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그가 달려가야 할 곳은 그녀 곁이었다. 시후는 이 사장을 넘어트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수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시후는 고속도로를 달려가면서 수인만 생각했다. 또 화를 내고 자신을 떠밀어 버릴 테지만 지금은 수인에게 달려가고 싶은 시후였다. 이정표가 보였다. 머지않아 도착할 의료원이었고, 조금만 더 달려가면 그녀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는데, 아버지 현진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는 순간부터 고함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죄송하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 들기는 하였지만 옳은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었다. 

현진권은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쏟아내고는 제 분에 못 이겨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데 시후의 마음은 후련했다. 부모님이 처한 상황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끌려갈 수는 없었다. 다들 이 방법이 틀렸다 해도 자신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확실한 불효자가 되어 버렸지만 수인의 남자가 확실히 되는 순간인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지을까. 잘했다고 칭찬해 줄 리 없지만, 그녀를 빨리 보고 싶었다. 

터널을 막 빠져나오는데, 흐릿한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눈이 아팠다. 아픈 눈을 잠시 힘주어 감았다가 다시 뜨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런데 흐릿하던 불빛이 꽤 밝은 빨강으로 번쩍였다. 

시후는 브레이크 등이 고장 난 트럭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을 하는 바람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뒷차는 거리 유지를 하지 못하고 시후의 차 뒷부분을 가격했다. 결국 큰 트럭과 미니밴 사이에 끼어버렸다. 

오늘 벌써 구급차 소리를 두 번째 듣는 중이었다. 시후는 미니밴에 타고 있던 운전자를 간신히 꺼내어 제 무릎 위에 눕혔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중상을 입은 운전자는 의식이 없었다. 

폐를 압박당했는지 호흡이 불안했다. 달려온 구급대원에게 시후는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바로 의료원으로 호송되면 과출혈이기는 했으나 기회는 있었다. 시후는 깨져버린 휴대전화를 간신히 찾아 가쁜 숨을 겨우 참아가며 전화를 걸었다.

- 수성의료원 응급실입니다.

“GS 1 현시후입니다. 콜록콜록.”

가슴 압박을 심하게 받은 터라 갈비뼈가 폐를 누르는 것 같았다.  

- 네. 과장님.

“지금 구급차 하나 응급실로 갔는데, 갈비뼈가 폐를 관통한 환자예요. 김상국 선생님 빨리 호출하십시오. 빨리요.”

-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은 지금 어디세요?

“여기 의료원에서 10킬로 앞 고속도로예요. 삼중 추돌사고 났고, 지금 구급차 또 한대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시지를 전달한 채 시후는 힘없이 휴대전화를 땅에 떨어뜨렸다. 

한편 수인은 왕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부장님.”

- 지금 인근 고속도로에서 삼중 추돌사고가 났다네. 환자가 모두 6명인데, GS환자는 없지만 수처 좀 해줄 수 있나?

수인은 빨래를 개다가 벌떡 일어났다. 수술환자가 없지만 이리저리 터진 상처들을 꿰매 달라는 소리에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시후 차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서울 본가에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모친 정민선이 다치셨다는데 심각한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응급실 일이 먼저인지라 수인은 차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의료원 응급실에 북적이는 느낌이 밖에서도 느껴졌다. 응급실에 들어섰는데, 오늘 근무자인 간호사들이 수인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김 과장님 어떻게 알고 오셨네요.”

“네?”

뭔가 말하려는 간호사를 다른 간호사가 말렸다. 이상한 느낌은 또 다른 곳에서도 느껴졌다. 분명 환자가 6명이라고 들었는데, 베드에 누워있는 환자는 3명뿐이었다. 폐 수술을 하느라 수술실에 들어간 1명을 빼도 이상했다. 

수인이 저 끝에서 오더를 내리고 있는 왕 부장이 보이기에 다가가는데, 어디선가 ‘현시후’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한민국에 동명이인이 많기는 하지만 하필 수성  의료원 응급실에서 현시후를 언급하기에 수인은 꽤 신경이 쓰였다. 

일단 수인은 응급실을 가로질러 왕 부장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어. 쉬는 날 오라 해서 미안해. 저 다른 게 아니고, 아니 잠깐만.”

왕 부장은 수인을 끌고 응급실 구석으로 갔다. 지금 상황을 보니 급한 일은 다 끝난 것 같아 보였고, 경상 환자들 뒤처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저기 있잖아. 이거 의료원이 시끄러워질까 봐 조심스러운데.”

“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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