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49)화 (49/88)

49화

수인은 인상을 쓰며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또 무슨 근거 없는 말로 사람 기절 시키려는지 두고 볼 참이었다.

“원장님 뵈러 가려는 건 아니지?”

“어떻게 알았어요?”

뻔한 서로의 대화에 수인은 슬쩍 시후를 노려보았다. 주말 내내 얼마나 고민한 일인지 시후는 알까. 사실, 재건과 희윤 앞에서는 돈 때문에 병원을 옮긴다고 했지만 솔직한 이유는 시후와 물리적인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애가 타는 얼굴로 시후가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수인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아래로 내렸다. 서로 정답게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도 아닐뿐더러 더는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시후 선배가 부모님에게 가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는 걸 알지만 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싶지 않은 게 수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간 있어요?”

“그럼. 아직 오전 진료 전이잖아.”

“커피 마실래요?”

웬일로 호의적인 말을 하는지 시후는 금방 해맑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수인을 졸졸 따라갔다. 

아직 오전 진료가 시작되기 전이라 병원 안은 한산했다. 주로 입원환자들이나 방문한 보호자들이 찾는 자판기 앞에 수인이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클래식한 맛의 커피를 두 잔 뽑아 올렸다.

자신이 내민 커피가 무슨 여왕이 하사하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 두 손으로 받아드는 시후의 모습에 수인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던 선배, 여자 알기를 발에 채이는 돌멩이 정도로 알던 선배, 그런 선배 현시후가 수인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요. 여기 의료원 정말 좋아요.”

“그럼 계속 일하자. 나도 사실 너 때문에 여기가 더 좋아.”

고백 타임이 아닌데 시후는 마음이 급해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그러나 수인은 솔직하게 호소를 하려던 참이었다.

“여길 떠나려는 이유는요.”

말을 채 다하기도 전인데 시후가 쓱 치고 들어왔다.

“돈 걱정은 하지 마. 내가 그것도 해결해 볼게.”

말하려던 내용이 그게 아닌데 갑작스러운 시후의 말에 수인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순조롭게 대화가 안 되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큰소리로 밀어붙였다.

“아니! 선배가 왜 돈을 해결해요? 왜요?”

“트렌스젠더 환자 수술도 내가 하기로 했잖아. 마취과 선생님 페이도 줘야 하고, 이런저런 돈 많이 들잖아. 그것 말고도 꽤 돈 필요한데가 많다고 들었어.”

시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행여 수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아닐까 매우 조심스러웠다. 역시나 수인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착하디착한 딸 수인은 지금까지 월급의 대부분을 아버지 김정수 원장의 자선의원에 밀어 넣고 있는데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자금이었다. 

그렇지만 시후에게 억지로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기적으로 의료봉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늘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 시후에게 경제적인 부분까지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맞아요. 돈 많이 필요해요. 하지만 아버지가 방법을 찾고 있고요, 우리 오빠도 세 식구 생활비 빼곤 고스란히 자선의원에 후원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 걱정은 말아요.”

그런 말이 아니었다. 정말 이 시간에 마주 서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돈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인은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 같은 기분이 들어 버렸다. 의로운 아버지가 선택한 길에 함께 하고 싶은 딸일 뿐이었다. 의사가 되었고, 아버지를 따라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가시밭길이었고 아버지가 즐겁게 가시는 길이니 수인도 그렇게 따르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수인이 선택한 의사의 길과 현시후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 말을 지금 하고 싶은 수인이었다.

“수인아, 나는.”

“선배님.”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수인은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고, 시후는 화가 난 수인을 달래주고 싶었다.

“내가 먼저 말할게요.”

하려던 이야기를 더는 머뭇거리기 싫었다. 자신이 정든 이 의료원을 떠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해주었으면 했고, 덤덤하게 받아들여 줬으면 하는 그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가 선배 부모님께 결혼 안 하겠다고 한 거 알아요.”

듣자마자 기대에 한껏 부푼 시후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그렇지만 그 얼굴을 다시 잿빛으로 물들여야 하는 수인의 마음은 괴로웠다. 

“근데요. 선배가 이도희와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요.”

“왜? 왜 달라지는 게 없어? 나 결심했다.”

다급한 시후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말했고, 수인은 그런 시후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안 된다는 표현을 했다. 그 힘없는 손을 의지 삼아 수인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 도대체 몇 살이에요? 지금 그게 떼를 써서 될 일이에요?”

“너한테 청혼 제대로 할 거야. 그러니까 너 혼자 고민하지 말라고. 그리고 다른 병원 가는 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게 누군데, 당신 다치는 게 싫어서 이렇게 달아나려는 거, 그걸 이해 못 할까. 수인은 다시금 눈에 힘을 주었다.

“싫어요. 내가 싫다고요. 누가 선배랑 결혼한대요? 나 이도희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 애석하기는 하지만요. 이도희하고 더는 얽히기 싫고요. 선배하고는 더더욱 얽히기 싫어요.”

“수인아.”

시후가 한발 다가왔다. 수인은 그만큼 뒷걸음질을 쳤지만 고개는 바짝 들고 있었다.

“싫다고요! 진짜 이제 그만 해요. 선배 후배도 이젠 더 못하겠네요.”

수인은 들고 있던 커피를 쓰레기통에 팍 던져 넣었다. 얼마나 더 밀어내야 하는 걸까. 이 정도로 잔인하게 굴면 남아있던 정도 다 떨어질 텐데. 누군가에게 이리도 모질게 말을 해야 하는 자신도 싫어서 죽을 것 같았다. 수인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이 길로 의료원 원장님 찾아뵙고, 떠나겠다고 말해 버릴 작정이었다. 

병원 내에서 땅만 쳐다보고 다녀도, 밥 안 먹고 일에 미친 사람 같이 굴어도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또 한 번 밀어내고, 또 밀어내면 그 끝이 언젠가는 있겠지. 수인은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주말이 되었다. 시후는 침대에 누운 채 한 통의 전화를 겨우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시후야. 엄마야. 지금까지 잔 거니?

아들의 한숨이 전화 너머로도 들리기에 정민선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렇지만 오늘 저녁 이 이사장과 저녁을 함께 하기로 이미 약속을 해놓은 터라 정민선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있잖아. 시후야.

“어머니, 저 결혼 안 해요. 제발요. 저 결혼하고 싶은 여자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아들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힘들었지만 정민선은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 시후야. 엄마가 다쳤어.

“네? 어디를요? 얼마나요?”

- 입원할 정도는 아닌데, 아버지도 세미나 가시고 엄마 혼자 우울해. 너 좀 오면 안 되겠어?

시후는 누워있다 벌떡 일어났다. 제아무리 지금 부모님 원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불효자 꼴을 하고 있지만 다쳤다는 모친을 모른 척 할 만큼 독한 인간은 못되었다. 

시후는 그길로 정신없이 달려 서울로 향했다. 달리는 내내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여 자신을 찾을지 몰라 행선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받지 않는 수인이었고, 시후는 문자를 남겼다.

『어머니께서 다치셨다고 해서 서울 가는 길이야.』

내 전화 좀 받아달라는 뒷말을 붙이고 싶었으나 시후는 천천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딱 이렇게만 문자를 보냈다. 수인이 너무 힘들어하니 지금은 수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호기롭게 큰소리를 쳐도 제 아버지 현진권과 수인의 아버지 김정수 원장이 평행선을 긋고 있는 상황에 끼어들어 해결할 방법이 아직 시후에게는 없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좀 빨리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시후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서울로 향하는 내내 수인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부모님 집 앞에 도착하였다. 역시 아버지 차가 보이지 않기에 집에 없는 것 같았고, 모친 혼자 시후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시후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안일 도와주는 메이드가 시후를 반겼다. 

“어머니는요?”

“안방에 계세요.”

가끔 시후는 그런 생각을 했다. 소녀 감성을 지닌 모친이 무뚝뚝한 남편과 아들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힘이 들겠구나, 세 사람이 있어도 말을 하는 이는 어머니 뿐이었고, 다들 입에 자물쇠를 걸어둔 듯 조용하기만 하니 얼마나 외로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또 한 번 수인을 떠올렸다. 싹싹하고 착한 수인이라면 어머니에게 딸 같이 살갑게 굴어줄 텐데, 그런 수인을 어머니도 참으로 예뻐할 텐데.

시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방 문을 노크하였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시후는 걱정했던 무거운 마음을 잠시 미뤄 둔 채 안방에 들어섰다.

“어머니.”

“왔어? 우리 아들?”

화장을 고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시후는 의아했다. 다쳤다 했고, 지금 우울하니 좀 와주면 좋겠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뭐예요?”

“미안해. 아들. 네가 오라고 하면 그냥 오니? 그래서 엄마가 거짓말했어. 미안해.”

아무리 바로 용서를 구한다 한들 상해버린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시후는 기가 막혀서 앞머리를 힘주어 쓸어 넘겼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얘. 미안하지만 가면서 얘기하자. 응?”

“뭐라고요? 어딜 간다는 말씀이세요?”

시후가 인상을 구기며 말을 하는데, 정민선은 더 어두운 얼굴이 되어 아들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보았다.

“시후야. 화내지 마. 응? 엄마를 봐서 딱 한 번만 참아. 응?”

“뭐냐고요?”

화를 내지 말라고 미리 언급하는 걸로 봐서 시후가 화낼만한 이야기일 게 뻔했다. 정민선도 시후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서로에게 이렇게 애걸복걸하지 않았다. 정민선이 일방적으로 시후를 외사랑 하듯 그렇기는 해도 이리 비굴하게 아들에게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안이 지금은 너무 중대했다. 이 이사장이 시후를 만나고 싶다고 한지도 벌써 3개월이 흘렀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현진권이 더는 미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참에 시후의 다리라도 꺾어 결혼식을 억지로 시키고 싶어 했다. 

시후는 암담한 표정으로 정민선을 쳐다보았다.

“인사만 하자. 응? 어른이 보자고 하시는 거잖아. 그냥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자. 응?”

“어머니. 이렇게 하면 제가 이도희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믿으시는 거예요?”

뜨끔했지만 정민선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