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 이사장과의 대화를 마친 도희는 제 속에 일어나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가면을 쓰고 있어도 김희윤의 절친 김수인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도희도 싫지만 한눈에 김수인을 알아보았고, 그 다음 사진으로 인해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지금도 제어가 되질 않았다.
“현시후!”
이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듯 하게 될 줄이야. 분명 현시후와 집안에서 결혼을 진행 중임을 알렸던 도희였다. 그런데 수인이 의도적으로 아직 시후 옆에 붙어있는 건 아닐까, 라는 여자로서의 촉이 이상하게 움직였다.
도희는 신경질적으로 휴대전화를 눌렀다. 역시나 받지 않는 현시후, 도희는 휴대전화를 집어 던져 버리려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울리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희는 전화를 받는 상대에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아줌마. 시후 오빠 서울 왔었어요?”
- 도희야. 그게 학회가 있었다더라. 그래서 잠깐 왔다가 또 내려간 모양이야.
정민선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희에게 대답을 했다.
“아시면서 저한테 말씀 안 하신 거예요?”
- 아니. 그런 거 아니고, 금세 또 내려간다잖아. 그래서 못한 거야.
도희에게 쩔쩔매고 있는 제 모습이 처량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도희마저도 돌아서면 안 되기에 어떻게든 도희의 비위를 맞춰야 할 것 같았다.
도희는 정민선의 대답을 듣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학회 때문에 서울로 왔고, 같은 전공이니 시후와 수인이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럴 수 있겠다며 이해를 하고 봐도 짜증이 일었다. 도희는 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되어 정민선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아줌마도 못 만났어요?”
- 그렇지. 하도 바쁘다고 그러네.
정민선은 거짓말을 하면서 자꾸 양심에 찔렸다. 이러다 시후가 도희와의 결혼은 싫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 선언한 게 들통난다면 그땐 어째야 할지 요즘 정민선뿐만 아니라 현진권도 제일 큰 걱정이 이 문제였다.
지금도 언짢은 목소리로 취조하듯 말하는 도희를 상대하는 게 딱 죽을 맛이었다. 비굴함의 끝에 서 있는 그런 기분으로 정민선은 자꾸 돌아가는 상황을 물었다.
- 도희야. 이 사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니?
“아빠는 뭐 제 의견에 따라주시죠. 하지만 시후 오빠 너무하긴 하네요. 아빠가 그렇게 기다리시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천번 만번 맞는 말이라고 두둔을 하고 싶은 정민선이었지만 말 안 듣는 시후가 어쩔 수 없어 답답한 건 그녀가 더 했다.
- 그렇지. 미안하게 생각해. 도희야.
이렇게 사과를 대신할 수 있다면 머리라도 조아릴 텐데, 이 심정 시후가 알아줄까. 야속한 마음에 정민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후 오빠 진짜 너무해요. 전화도 안 받고, 찾아가도 쌩하고. 저는요. 자존심이 너무 상해요.”
그도 그럴 것이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냉랭함일 테고 도희가 그래도 참아주는 게 고마운 일이라고 정민선은 생각했다.
-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 우리 시후가 워낙 인정머리가 없어.
제 아들의 흉이라도 보아서 도희의 마음을 풀어 줄 수만 있다면 정민선은 시후를 바보 멍청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었다. 한숨 소리를 내어 버리는데, 도희가 섬뜩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줌마.”
- 응?
소스라치게 놀라듯 정민선이 대답했고, 도희는 지금 제 머릿속에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할까 잠시 고민하였다. 조금 전 보았던 희윤의 소셜미디어 사진 한 장이 자꾸만 도희를 자극했지만 말로 하기는 싫어졌다. 김수인과 나란히 언급되는 일조차 싫었다.
도희는 생각을 바꾸었다.
“시후 오빠 서울로 부르면 안되나요? 아줌마가 어떻게든 불러 올려주세요. 아빠도 더는 못 참으실 것 같아요. 인사드리게 해야겠어요.”
- 그, 그래보자. 내가 전화해볼게. 주말에 내가 꼭 올라오라고 할게.
구차하기 이를 데 없지만 도희는 이 이사장이 안심할 수 있도록 시후가 인사 정도는 하게 하고 싶었다.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해버렸지만, 이제 와서 시후가 결혼을 원하지 않고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시후는 이제 꺾어버리고 싶은 도전과제처럼 느껴지는 도희였다. 더구나 김수인과 얽혀있다면 뿌리째 뽑아 손아귀에 꽉 쥐어 들고 싶은 욕망이 마구 치솟았다. 이 결혼은 이제 이도희의 자존심이 되어 버렸다.
정민선은 도희를 달래듯 전화를 끊고, 손을 달달 떨었다. 시후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의료원에 내려간 지 3일째였다.
그사이 현진권은 아들 녀석 하나 휘어잡지 못했다며 정민선의 탓을 했고, 시후 때문에 부부가 같은 목적을 두었지만 서로를 탓하며 말싸움을 매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희의 전화를 받고 보니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물을 한컵 들이킨 정민선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후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도, 갑자기 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것도, 너무너무 이상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를 만났다는 거야? 아후. 내가 못 살아. 내가 못산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도희가 저리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만 한다면 다 해결될 거라 의심 없이 믿었다.
그동안 별문제 없이 그저 병원 일에만 열심히 하던 아들 시후라 결혼에 관심이 없어도 이렇게 저렇게 어르고 달래면 무리 없이 결혼식장에 들어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복병을 만나고 말았으니 대 놓고 말을 할 수도 없는 정민선의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정민선은 답답한 마음에 시후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그러나 시후는 걸려 오는 휴대전화를 인상을 쓰고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밤도 낮도 없이 도희와 모친 정민선의 전화가 울려대기에 아예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그런지 목 뒤가 뻐근해서 시후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입원실 회진을 끝내고 나왔다.
간호 데스크에 서서 오더를 내고 있는 수인의 모습이 보여서 시후는 스윽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수인의 모습 한 번만 보면 모든 게 사라지는 희한한 증상을 경험하는 시후였다.
시후가 볼펜을 가지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수인 근처로 다가섰다. 그때, 진창욱이 슬그머니 수인에게 초콜릿을 까서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시후는 날렵한 독수리같이 초콜릿을 낚아채서 입에 쏙 넣었다.
“아. 뭡니까? 이렇게 대 놓고 차별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되레 빼앗아 먹고도 시후는 큰소리를 쳤다.
“과장님, 하나 드세요.”
수인에게 내밀었던 초콜릿을 강탈당하고도 진창욱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수인은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시후를 쳐다보았다. 역시 저 능글거림을 누가 당할까. 더 길게 있어봤자 엉뚱한 진창욱이나 시후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 수인은 차트 정리에 속력을 내었다.
“진쌤, 오후에도 김희숙 환자 고열나면 ns 500cc 풀드랍해주시고 데노간 사이드로 주세요.”
수인은 해열제 주문을 해놓고 다음 차트를 빠르게 넘겼다.
“네. 과장님.”
시후의 소리를 들었던지 간호사 나리가 어느새 쪼르르 달려 나왔다.
“현 과장님, 우리 언제 술 먹자고 하셨잖아요.”
나리의 말에 시후는 커다란 눈이 더 커져서 당황해했다. 당황해하는 사람 중에 수인도 있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다른 환자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아이참. 우리 의료봉사 뒤풀이 돌아와서 하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정확하게 이해한 시후가 활짝 핀 해바라기 같은 얼굴로 크게 웃었다.
“아~ 그랬나? 그러기로 했었죠? 내가 요새 논문 쓸 게 있어서 정신이 없었네요. 말 나온 김에 오늘 어때요? 마침 여기 다 있네요. 네 사람.”
그러면서 달달한 꿀 떨어지는 눈으로 수인을 보았다. 그러나 수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저는 좋아요.”
먼저 말을 꺼냈던 나리는 대찬성이라며 생글 웃었다. 그런데 수인은 의도적으로 고개를 처박고 계속 딴청을 부렸다.
“진창욱 샘은 오늘 시간 어때요?”
“죄송한데요. 저는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서 안 될 것 같네요.”
진창욱이 꽤 아쉬워하며 대답을 하는데 시후는 더 활기차고 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어머니 생신에 아들이 빠지면 큰일 나죠.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우린 또 한 잔 하면 되니까. 응?”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껴질 만큼 그랬다. 수인은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시후가 슬쩍 옆구리를 꾹 잡았다. 전기가 오른 사람처럼 수인이 몸을 비틀었고, 다들 시선이 집중되기에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김 과장은 시간 되지? 어제까지 당직 섰고, 오늘 응급실 콜도 왕 부장님이시고, 죽었다 깨어나도 오늘은 여유롭네. 그치? 진창욱 샘도 빠지는 이 마당에 의리파 김 과장님 개인 약속 있다며 빠지지는 않을 거야. 그치?”
아, 몰아가기 선수인 현시후였다. 수인은 벌써 멘탈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수인을 태워 버릴 듯 이글거리며 쳐다보는 나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제발 약속 있다고 해달라는 그 눈빛, 여자라면 다 알아볼 것 같은 저 눈빛, 심한 내적 갈등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콜. 그래 좋다. 오늘 저녁 피자와 맥주 내가 쏜다. 끝나고 바로 주차장에서 모입시다. 그럼 난 이만.”
에? 대답도 하기 전에 시후가 결정을 내려 버렸고, 벌써 쌩하니 긴 다리로 축지법을 쓰듯 비상계단까지 가버렸다. 수인은 기가 막혔다. 덩달아 나리도 기가 막혔다.
어쨌거나 내적 갈등 중인 수인은 지금 이 상황보다 의료원 원장님과 면담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수인이 비상계단을 총총 내려오는데 2층에 서 있던 시후가 훅하고 잡아당겼다.
“어머? 왜요?”
커다란 덩치의 검은 그림자가 쓱 잡아당기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어디 가려고?”
“하. 진짜 스토커예요? 월요일부터 지금까지 내내 쫓아다니고 그래요?”
주말이 끝난 월요일부터 틈만 나면 수인을 감시하는 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