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47)화 (47/88)

47화

수인은 고개를 로봇처럼 턱하고 내렸다. 이게 무슨 기절초풍할 소리인가.

“진짜야? 시후 선배가 진짜 그렇게 이야기했어?”

“응. 시후가 진작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김수인이 자꾸 싫다 그랬다며?”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이게 그냥 싫은데요! 했던 내용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 수인이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재건 선배가 어디까지 아는가였다.

“선배님, 이야기 어디까지 아시는 거예요?”

“어디까지?”

술잔을 홀짝 마시고 재건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수인은 얼굴에 활활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남자들도 이리 입들이 가벼웠나. 도대체 시후가 뭐라고 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네가 시후를 덮치기로 마음을 먹었고, 실행에 옮겼고, 후회를 했고, 시후는 임신해서 튀는 거 아니냐며 너를 몰아붙였고.”

“잠깐요!”

수인은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쥐어뜯으며 재건의 말을 멈추게 했다. 

“아닌가?”

재건은 슬쩍 희윤의 눈치를 살폈다. 희윤은 눈을 꿈뻑거리며 재건에게 눈치를 줬고, 재건은 헛기침을 여러 번 하며 정신을 차려보았다.

“진짜 현시후 선배님이 말한 거 맞아요?”

“응? 그게. 그러니까.”

재건의 취약점이 바로 이랬다. 눈치가 없기는 했지만 거짓말은 죽어도 못하는 스타일, 그래서 시후와 지금까지 베스트 프랜드로 지내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야? 진짜 현시후 선배님이 말한 거 맞냐니까요?”

“응? 시후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 내가 짐작을 했다는 거야. 짐작.”

짐작이라는 것도 눈치가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한 일, 수인은 희윤을 째려보았다. 수인의 날카로운 눈빛에 압도당한 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해볼 기회를 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수인은 이를 부득 갈며 복화술처럼 말했다. 

“김희윤.”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난 희윤은 손까지 번쩍 들고서 거의 안드로메다급으로 빠르게 시인을 했다. 

“그래. 너랑 시후 선배 잤다는 이야기는 내가 했어. 미안하다.”

“아~ 이 배신자. 어떻게 그런 말을 막 할 수 있어? 야!”

눈이 저절로 흘겨졌다. 그런 수인에게 미안해서 배시시 웃어 보이는 희윤이었다. 

“너 어쩜 그래?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미안해. 나도 말 안 해보려고 했어. 근데 어떡해.”

뭘 어떡해. 이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져가자고 먼저 제의한 건 다름 아닌 희윤이었다. 밀려오는 배신감에 수인은 두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차마 재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시후를 봤던 시간만큼 함께 봤던 시후의 절친 이자 직속 선배 이재건이었다. 수인은 정말 쥐구멍이 있다면 그 속에 몸을 우겨넣고 싶었다.

“에이. 남녀가 다 그런 거지 뭘 그래. 우리도 다 그랬어. 너도 우리 처음 잤던 날 다 알고 있었잖아. 샘샘 치자. 응? 그리고 걱정 마 김수인.”

말은 걱정말라는데, 얼굴이 뜨거워져서 스르르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입이 마른 낙엽보다도 가볍고, 바람 없이 생생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은 저 김희윤을 믿고 오만 이야기를 다 한 자신의 탓이었다.

“그럼 어떡해. 우리는 부부 사이에 비밀이 원래 없는데.”

“이 나쁜 기지배! 좋겠다. 비밀 없어서.”

부부 사이를 이간질할 수도 없고, 부부 사이 비밀이 없다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수인은 움켜잡았던 머리를 더 세게 쥐어뜯었다. 부끄러워서 다시 풀 파티로 뛰어들어 물 안에 꼬르륵 잠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심하게 일었다. 

“근데, 자기야. 진짜 시후 선배가 수인이랑 결혼한다고 그랬어? 정말이야?”

“응. 그래서 지금 시후 네 부모님 집에 갔는데?”

그래서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갔다는 그 말인가. 수인은 두통이 전두엽을 지나 두 눈으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비밀 없다던 두 부부 사이에 새로운 정보였던지, 희윤이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언제 그랬어?”

희윤이 명탐정 같은 표정을 지어가며 물었고, 재건은 역시 비밀 없는 부부의 모범 답안같이 전부 읊어댔다.

“우리는 알고 있잖아. 시후하고 수인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굳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말은 생략해도 될 테지만 정직한 재건은 꼭 찍어서 다시 말했다. 수인은 다음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하면서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버렸다.

“시후가 워낙 입이 무거운 애잖아. 내가 전화하는 거 엿들었지.”

“진짜 수인이하고 결혼한다는 그 말을 시후 선배가 직접 했다고?”

“어? 그게 그 말이지. 내가 자기한테 듣고 시후 떠봤잖아.”

글쎄. 재건이 떠봤다고 떠질 현시후가 아닐 텐데, 뭘 어떻게 떠봤다는 말인지. 답답해서 수인은 속이 터져왔다. 무게로 달면 체중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입의 무게랄까 묵직함으로 무게를 달자면 재건은 시후의 십분의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하하하.”

갑자기 재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더 심난한 건 말해 무엇 할까. 그렇지만 지금 왜 웃는지 중요한 단서가 될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김수인이 현시후 덮치고 난 다음 날, 내가 전화를 해봤잖아.”

딱 말하는 품새로 보니 재건과 희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완벽한 내통자였다. 수인이 고민하던 그때부터 생방송으로 들은 게 분명했다. 

“그래. 자기가 시후 선배한테 전화했지. 펄쩍 뛰며 난리쳤다며?”

“현시후는 원래 그럴 놈이지. 뭐 지저분하게 떠들 녀석이 아닌데, 이번에 내가 대놓고 그랬잖아. 김수인 소개팅 시켜줘야겠다고 했지.”

어라? 재건이 머리를 쓴 게 분명했다. 수인이 아는 시후라면 아무리 친한 절친 재건이라 해도 제 입으로 수인과의 일을 떠벌릴 남자가 아니었다. 이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그랬더니 뭐래? 시후 선배가?”

수인을 앞에 두고 두 부부가 아주 맛깔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비록 수치스러운 건 고스란히 수인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이 두 부부 이야기 말고는 귀동냥 할 곳이 없었다.

“야. 현시후 그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봤다. 여차하면 나 한 대 치겠더라고.”

“왜?”

부부는 닮아 간다 했던가. 희윤의 맥 빠지는 ‘왜?’ 소리에 수인마저 힘이 쓱 빠졌다. 재건은 저도 말귀 잘 못 알아들으면서 희윤에게 꽤 큰소리치고 싶었던지 목에 힘을 잔뜩 주었다.

“아 답답해. 왜긴 왜겠어. 현시후가 김수인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그렇지. 잘되고 있어.”

뭘 기대를 했던가. 기대했던 수인이 바보였던가. 수인은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이 된 거 같았다. 그러게 시후가 자신에게 직진인 걸 누구한테 들어 뭣하리. 본인만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수인은 시후의 마음을 남에게 듣고 싶어 하던 자신이 참 바보같이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이 불도저 같은 남자 현시후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긴 아는지가 궁금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리 마음대로 해대는지.

“아. 나 몰라. 시후 선배 미쳤어. 어떡해.”

“뭘 어떡해? 말이 되니? 이도희 같은 애랑 시후 선배가?”

희윤은 수인의 베스트 프랜드니까 수인이 아깝다는 듯 말할 수 있겠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닌 것이 문제였다.

“그래. 김수인 네가 훨 낫지.”

하나 도움도 안 되는 말을 이 부부는 세트로 해주고 있었다. 수인은 딱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시후가 집안에서 내쫓기기라도 한다면 어쩌지. 이러다 그 광녀 같은 이도희가 또 한 번 아버지를 괴롭게 만들면 어쩌지. 그 생각에 수인은 술이 화들짝 깨어버렸다.

딱 한 번, 자선의원이 일주일 넘게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은 수인이 전교 회장 임명장을 받은 다음 날 바로 일어난 일이었다. 자선의원은 진료 도중에 압수수색을 당했고, 느닷없이 들이닥친 검찰과 경찰들로 인해 병원 기록 등이 박스로 담겨 의원에서 쏟아져 나갔다. 

달랑 둘뿐인 직원 박 간호사와 방사선사도 밤샘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 김정수 원장과 직원들을 구속수사 했던 이유는 세금 탈루와 제약 회사 및 의료기 상사에 무상지원을 압박했다는 이유와 수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 사건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유가족들에게 합의금을 억지로 쥐어 주었다는 억측 때문이었다. 

아버지 김정수 원장이 구속수사를 받고 돌아오던 날, 수인에게 웃으며 말하던 이도희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도희의 말은 가끔 몸이 힘들 땐 악몽이 되어 수인을 아직도 괴롭혔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지 그랬어?’

수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왜 이렇게 엮이고 있는 걸까.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도희를 두려워하는 걸까. 

***

한 장의 사진은 즐거운 한때를 추억하는 기념물이 되기도 하고, 한 장의 사진은 발뺌할 수 없는 증거물이 되기도 했다. 

이도희는 김희윤의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다 기겁을 하였다. 표범 무늬 비키니를 입은 김수인의 모습, 그리고 네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진에서 이도희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하필이면 시후가 수인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진을 적나라하게 보게 될 줄이야. 도희는 머리에 피가 일순간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또 김수인이던가. 아직도 이도희 인생에 걸리적거린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도희야.”

“아. 아빠.”

얼마나 화가 나고 억장이 무너졌던지 제 이름을 수 차례 부르며 다가온 아버지 이 이사장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도희였다. 이 이사장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명딸 도희가 근심스러운 표정인 게 못내 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일 없어.”

도희는 얼른 휴대전화를 엎어버렸다. 이 이사장은 딸이 항상 웃기를 바라는 여느 아버지였다. 이제 머지않아 결혼도 시킨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시후 녀석하고는 잘 되어 가는 거야?”

“그럼. 내가 연애 기간도 없이 결혼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

이 이사장은 도희가 웃어주길 바라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아빠가 기다리고 있잖아. 그런데 이 녀석 우리 딸한테 잘하는 거야, 뭐야?”

“잘하고 있어. 일이 많잖아. 일반외과라는 게.”

제법 시후를 이해하는 여자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 딸이 기특하다 느낀 이 이사장의 표정은 꽤 밝았다.

“언제 데려올 거야?”

“아이참, 아빠가 자꾸 조르니까 내가 매달리는 여자 같잖아.”

“아. 그래. 그럼 안 되지. 우리 공주님 속상하게 하면 안 되지.”

이 이사장은 도희의 눈치를 슬슬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이 이사장에게 도희는 눈을 슬그머니 흘리다가 곧장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