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정민선은 남편 현진권을 잡았던 손을 놓고 시후의 팔뚝을 잡았다.
“너 뭐라고 했니? 결혼할 여자?”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정미선의 손이 달달 떨려왔다. 그저 결혼에 관심이 없는 시후라고 생각했다.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일에만 빠져 있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여자라니, 정민선은 주저앉으려다가 간신히 버티며 시후를 붙잡았다.
시후는 충격 받은 정민선의 얼굴을 보고 살짝 죄송한 마음은 일었지만, 오늘 서울에 왔던 이유를 분명히 하고 싶었다.
“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요.”
이건 결혼하기 싫다고 하는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현진권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건실한 아들이라 믿었던가. 갑자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아들을 살뜰하게 간섭하지 않았다.
정민선의 말을 통해 띄엄띄엄 아들의 근황을 듣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은 더더구나 없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시키려는 이 중대한 시점에 아들 입에서 여자를 언급했다. 현진권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다.
“결혼할 여자라니! 도희와 결혼 얘기 오갔던 게 하루 이틀이더냐? 뭐가 어쩌고 저째?”
“시후야.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어? 말 좀 해보라니까.”
정민선마저 이젠 안달이 나서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정민선은 시후 입에서 아니라고, 그냥 해본 말이라고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시후는 잠시 망설였다. 아직 수인에게 사귀자는 말에 대한 응답을 듣지 못했다. 틈만 나면 달아나려고만 하는 수인, 그러나 그녀를 죽어도 놓을 수 없기에 시후의 얼굴빛이 변해갔다. 그리고 아버지 얼굴을 보니 더더욱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 말씀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수인의 확답을 받는 게 먼저였는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받아주면 좋으련만 부모 입장에서는 납득이 가지 않을 일이기에 시후는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들어버린 현진권과 정민선에겐 심장이 바짝 조여오는 일이었다.
그저 시후가 결혼에 마음이 없다는 문제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따로 있다는 문제는 본질부터가 달랐다. 여자가 있다면 이것은 사뿐하게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함정 구덩이에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뭐야? 대체 누구야? 어? 어떤 여자이기에 내놓을 수 없다는 그 말이야?”
“어머, 시후야. 너 혹시 이상한 여자 만나니? 응?”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정민선이었지만 다 큰 아들이니 볼기라도 쳐서 대답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이상한 여자 아니고요. 지금은 말씀 드릴 수가 없을 뿐입니다.”
“뭐야? 말도 할 수 없는 여자라? 너 지금 우리 놓고 장난질하냐? 어?”
현진권의 얼굴이 펑, 하고 터지기 직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후는 말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일단 삼켜 내렸다.
“말해봐. 현시후!”
정민선도 단단히 화가 나버렸다. 도희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머지않아 좋은 소식 들리지 않을까 기대 만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후가 오늘 드릴 말씀이 있어 집에 오겠다고 전화하니 왠지 오금이 저려왔다. 게다가 어떤 여자인지 내놓을 수도 없다면 아무리 자랑스럽고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시후라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말씀드릴 단계가 아니에요. 이제 곧 인사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너 설마 그 여자가 튕기고 있다는 그 뜻이니? 어머!”
정민선은 눈치로 알아채 버렸다. 시후가 주저하듯 말하는 그 순간 시후가 더 많이 좋아하고 있고, 상대방 여자는 시후 뜻대로 끌려오지 않는다는 느낌이 확연히 들어버렸다.
어처구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충격을 받은 정민선 대신 현진권이 시후를 째려보았다. 한대 귀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은 마음 간신히 참아 넘기며 겨우 욕 한마디 던졌다.
“나 원 참! 기가 막히는군. 머저리 같은 새끼.”
정민선은 아직도 손이 발발 떨렸다. 시후가 제법 남자가 되어 갈 때부터 아들을 쫓아다니는 여자애들을 수십 명도 더 보았다. 처음엔 신기했고, 그 수가 늘어나니 은근히 자랑거리가 되었던 정민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후는 그런 과거를 깡그리 잊은 남자처럼 처량 맞고 궁색하기 그지없이 제가 좋다고 여자를 따라다닌다는 그 말이던가. 도무지 아들 현시후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더구나 그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이도희마저 시후에게 먼저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똑 부러지게 시후한테 반했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이도희마저 시후를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저를 좋아한다는 여자와의 결혼에 그저 결혼식장에 서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시후야. 이게 뭐니? 너한테 튕기는 여자 뒤꽁무니만 쫓고 있다는 그게 말이 되니?”
시후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이 어쨌거나 정민선이 하는 말이 맞았다. 아직 수인은 집안 핑계를 대며 시후를 거부하고 있기에 더욱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해결할 겁니다.”
달리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수인이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해결하고 수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시후였다.
그런데 지금 듣고 있는 부모의 마음엔 상상의 세계가 정신없이 마구 펼쳐졌다.
“이 자식이 지금 뭐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미친 녀석, 설마 너 어디 내놓을 수 없는 그런 여자 만나는 거냐?”
“어머. 여보,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정민선은 설마하며 시후를 간절한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여자 뒤를 쫓아다닌다 쳐도 시후가 수준 미달인 여자를 죽자고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니 정민선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자식 하는 짓이 딱 그런데 뭘 그래?”
시후는 눈을 부릅떴다. 비록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 그 발언은 시후의 가슴을 꾹 눌러 버리는 것 같았다. 몹시 화가 난 김에 현진권은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아. 이 자식 하는 꼴을 봐!
“아닙니다. 그런 거.”
당당히 외치고 싶으나, 지금 자신을 이리 죄인 취급하듯 하는 제 부모가 수인을 아프게 할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누구야? 어떻게 알고 지내는 여자냔 말이야?”
윽박지르며 다가오는 부모를 보고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자신 앞에 놓인 거대한 장벽이 현실로 다가왔다. 수인이 그토록 울면서 했던 그 말, 별거 아닐 거라 얕잡아 보았던 그 말을 떠올리며 시후는 깜깜한 장벽 앞에 선 것 같았다.
현진권은 아들 시후에게 타협할 수 없음을 꼭 찍어 말하고 싶었다.
“이 자식, 내 다른 건 다 참았다. 그래.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훤히 알고 있지. 속물 중에 속물로 나를 보겠지. 그래 좋다. 네 눈에 네 아비가 그리 보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만나는 여자 당장 정리해. 알겠어?”
현진권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후를 노려 보았다.
아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건 어릴 때부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모습이 꽤나 자랑스러웠던 현진권이었지만 이번만은 시후 뜻대로 둘 수 없었다. 기선대학병원의 원장 직에 목이 달아날까 노심초사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따라 여기까지 왔듯 제 아들도 제 뒤를 이어 보란 듯이 성공해주길 바라는 욕구가 현진권을 지배했다. 나이가 들어가니 제 아버지가 현진권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또 얼마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느끼고 있었다.
그 뿌듯함을 아들 시후를 보며 더 오래오래 느끼고 싶은 게 바로 현진권의 한 가지 바람이었다. 그 성공의 길에 풍력을 더해줄 이도희가 이래도 저래도 시후에게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에 이 결혼을 꼭 시키고 싶었다.
***
한편 지금 시후는 제 부모에게 고초를 겪고 있는 시각인데, 호텔에 남은 수인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가을 하늘 너무 좋다.”
루프 탑 위로 하얀 천이 나부끼고 밤하늘은 아름답게 흘러갔다.
“너무 좋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으로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희윤은 벌써 이 말을 열 번도 더 한 것 같았다.
“덕분에 오늘 내가 호강한다.”
“그래. 넌 친구 잘 둔 줄 알아라. 근데 현시후 선배는 갑자기 어딜 간 거야?”
“집에 간다고 아까 말했잖아.”
희윤이 또 묻기에 수인이 좀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희윤이 째려보았다.
“내가 내 남편만 챙기면 되지. 남의 남자 스케줄까지 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우. 진짜.”
수인이 달짝지근한 잭콕을 홀짝 마셨다. 남의 남자, 그렇지. 현시후는 남의 남자가 맞지. 그게 김수인의 남자도 아니고, 이도희의 남자라는 게 지금 문제인 거지.
그런데 달큰하게 수인의 몸을 감싸는 가을밤 바람이 좋아 그런지, 그가 자신을 껴안았던 피부 촉감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문제 중의 문제였다. 수인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시후 오늘 집에 부모님하고 중대한 이야기 한다던데?”
재건이 툭, 하고 무심하게 던진 말에 수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중대한 이야기? 설마. 결혼식이 확정되었던가. 뭐가 빠르게 진행될 것 같기는 했기에 수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중대한 이야기요?”
“아, 시후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떠밀고 있잖아.”
다 아는 내용인데 재건은 친절하게 설명을 자처하고 있었다. 희윤도 술이 오르는지 그냥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수인은 그사이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는 그런 내용을 듣게 될까 봐 초집중이었다.
“그건 다 아는 이야기고.”
희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건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시후는 결혼 생각이 없대.”
“그것도 다 아는 이야기고.”
눈치라고는 약에 쓸려 해도 없는 재건답게 영양가 없는 말을 해댔다. 수인은 별 진전없는 이야기였나 싶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펄럭펄럭 시원하게도 하얀 천이 예쁘게 나부꼈다. 그때, 재건이 가을바람을 타고 말랑하게 입을 열었다.
“이도희하고 결혼 안 하고 김수인이랑 결혼한다고 할 거라던데.”
젖혀 올렸던 수인의 고개가 뻣뻣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