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능글맞은 눈빛으로 보고 있는 시후에게 수인은 앙칼지게 말했다.
“손 치워요! 그게 언제인데? 의사라는 양반이 상식이 없어요? 아우, 미쳤다 돌았다.”
손등을 찰지게 한 대 맞고도 시후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곤 또 스르륵 다가서서 능글거리며 웃어댔다.
“증명을 해야지. 안 그래 김수인? 안 그럼 나 기대한다.”
“뭘 증명해요? 뭘 기대해요? 미쳤어. 정말!”
수인이 화를 내며 물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만 봐도 숨이 턱 막혔다. 아찔한 바디라인에서 거품이 쓸데없이 에로틱하게 흘러내렸다.
시후는 얼른 물 밖으로 점프하듯 뛰어올라 제일 가까운 프런트에서 가운을 하나 가져왔다. 빙 돌아 짐을 두었던 선베드 쪽으로 걸어가는 수인을 뒤에서 가운으로 거의 랩을 감싸듯 감아버렸다.
“김수인! 갈수록 미치게 만드네?”
당연히 자신의 몸에 눈을 떼지 못하는 시후를 보니 뭘 말하는지 알아버렸다. 그냥 모른 척하면 될 테지만 또 그렇다고 알았다고 하기는 싫었다.
“아 또 뭐요?”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이번엔 시후가 가운의 앞자락을 확확 잡아당겨 끈까지 동동 매어주었다.
“제발 나 미치게 만들지 마라.”
“선배 진짜 술 취했어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티도 안 난다고요.”
수인도 처음엔 좀 과한가 싶어서 망설였지만 수인보다 과감한 여자들이 더 많았고, 이왕 가면이라는 걸 써버렸으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뭘 티가 안 나? 늑대 같은 놈들이 너만 노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어딜 봐서 남자들이 수인만 노릴까. 다들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고, 음악은 귀청을 찢을 듯 울려대고, 디제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쳐 질러대는 이 순간, 누가 수인만 노려본단 말인가.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현시후만 수인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 미쳤다. 진짜.”
좀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며 간신히 용기를 내고 있는데, 시후 눈에 딱 걸릴 건 또 뭐람, 게다가 사우나에 갔을 줄 알았던 남자가 여기서 왜 딸 단속하는 아빠같이 굴고 있는지.
“언제까지 있을 거야?”
“문 닫을 때까지 있을 거예요. 아님 여기서 멋진 남자 하나 만나보던지.”
그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나? 시후의 표정이 아주 사납게 일그러졌다. 가면 따위는 그의 표정을 가려주지도 못했다.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물 반 사람 반인 이곳이기에 수인의 간이 좀 커지고 있었다.
“너, 이대로 샤워하고 딱 20분 후에 저기 저 앞으로 딱 나와!”
시후가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얼굴이 붉어져 긴 팔을 쭉 뻗어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냥 선배는 집에 좀 가요. 모처럼 자유롭고 좋은데 왜 그래요. 네? 나 이제 좀 놀아볼까 싶은데 왜 이래요?”
“어딜 놀아? 너 놀 만큼 다 놀았고! 더는 안 돼.”
둘은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노려보았다. 만날지 맘대로 된다, 안 된다를 결정하는지 정말 짜증이 확 일었다.
“왜 자꾸 간섭을 하냐고요? 내 인생 내가 산다는데?”
“빨리 나와라. 오늘 재건이하고 희윤이 앞에서 내가 선언해버릴 테니까. 우리 관계 다 까발리고 싶으면 알아서 해.”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면서 눈싸움을 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수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요? 그거 지금 협박이에요?”
“어. 협박 맞아.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키스하고 할 거 다 하는 사이! 더 크게 말해줘?”
쩌렁 쩌렁 울려대는 뱃고동 소리와 비트가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수치심에 꽉 죽을 수도 있을 만치 수인은 팔짝팔짝 뛰었다.
“진짜 이럴 거예요?”
“어. 이럴 거야. 강원도 그 소나무 숲 이후로는 더는 못 참겠다. 지금도 너 확 껴안고 키스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어디 한번 버텨 보던가.”
시후는 진심이었다. 술기운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오늘을 각오하던 시후였다.
“딱 20분 준다. 지금 10시 15분이니까. 35분까지 저기 저 정신없는 나무 밑! 그리로 나와. 알았어?”
그리곤 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수인은 입술을 말아 물고 걸어가는 시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빌려 입었을 트렁크 수영복인데도 긴 기럭지에 떡 벌어진 역삼각형 넓고 넓은 등짝, 정말 완벽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수인은 그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할까 싶으면서도 샤워를 하고 옷을 주워 입었다. 그렇게 화난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다. 그가 무서워서라기보다 지금 몸을 다 내놓고 노는 게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다.
수인은 억지로 명분을 찾아내었다. 지금 이렇게 아이같이 비누 거품 놀이에 빠져서 미친듯이 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자조했다. 그리고 가면 뒤에 숨어 놀고 싶었으나 아는 사람에게 들켜버렸으니 붕붕 들떴던 마음에 구멍이 나버렸다.
수인은 슬그머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나왔는데 50분이 넘어 있었다. 시후의 표현대로 정신없이 휘황찬란한 나무 아래 두리번거려도 시후가 보이질 않았다.
괜히 말 잘 듣는 사람처럼 뛰어나온 게 살짝 후회되어 바닥을 발바닥으로 비비고 있었다. 그때, 시후가 뒤에서 수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거 놓고 이야기하죠.”
“그래.”
시후는 얼른 어깨를 놓았다. 그리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수인은 시후를 그저 째려보았다.
“가슴은 어떻게 됐어요?”
“고속도로가 났어. 야하기 그지없는 표범 한 마리가 어찌나 사납게 구는지.”
그러면서 티셔츠를 가슴까지 훌떡 걷어 올렸다. 매끈한 복근하며 단단한 가슴 근육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 진짜!”
고개를 돌려 버릴까 순간 고민하던 수인이 고개를 되레 빳빳하게 쳐들었다.
“피가 좀 많이 났어. 이러다 피가 모자라서 죽을지도 몰라.”
“아우 유치해! 유치찬란하다~”
피가 났고, 긁힌 자국이 조금 더 진해지긴 했으나 너무 비약이었다. 수인은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대는 시후의 정강이라도 걷어차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열 받아서 풀풀 거리는 수인을 시후는 줄곧 똑같은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할 거야?”
갑작스럽고도 이상한 질문이었다. 수인은 인상을 팍 쓰며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뭘 어떻게 해요?”
“난 집에 간다. 너 혼자 신혼부부한테 끼어 자고 가던지.”
집에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진짜 집에 간다고 하니까 수인은 살짝 당황했다. 풀 파티가 끝나면 루프 탑에서 또 한 잔 하자는 희윤이의 계획을 들었던 터라 당연히 그럴 줄 알았던가.
“그래요. 선배는 집에 가세요. 나는 뭐 알아서 할 테니까.”
간신히 말이 나와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수인은 들킬까 봐 한숨을 살짝 내어 쉬었다.
그렇게 간다는 인사를 하고 시후는 택시를 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수인을 찾아 난리가 난 친구 희윤의 전화를 받았다.
한편 수인과 시후가 풀 파티에서 은밀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시간, 시후의 집안에서는 난리가 나 있었다. 시후는 그래서 지금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부모님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곧 도착한 부모님의 집엔 고용인들이 전부 집에 없었다. 큰일이 터져도 터질 것이기 때문에 모친 정민선이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집안에 들어서자 부친 현진권이 다짜고짜 소리를 내질렀다.
“뭐야? 이 노무 자식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어우. 여보, 진정해요. 제발요.”
정민선이 남편 현진권을 말렸다. 그러나 시후에게로 향하는 현진권의 발걸음은 거칠기만 했다.
“너 이 자식 말해봐! 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지.”
“말씀드린 대로예요. 내일 이사장님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후는 오늘 그저 외과학회가 있어 서울에 온 게 아니었다. 더는 수인을 그냥 둘 수 없고, 수인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병원까지 옮기려는 그녀의 마음이 왜 그런지 알기에 시후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사장님 찾아뵙고 뭐라고 지껄이려는 수작이냐? 어?”
“결혼 못 한다고 말씀드릴 겁니다. 이 결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이제 결혼에 관심이 없던 3개월 전의 시후가 아니었다. 이제는 수인만 눈에 보이고, 수인에게 어떻게든 가고 싶어 안달인 남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시후가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고, 그럴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도희라는 부담스러운 존재 때문에라도 빨리 끝을 보고 싶었다.
“아우. 아우. 시후야. 그러지 마. 도희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너만 결정하면 되는 일이야. 시후야.”
정민선은 펄펄 뛰는 남편 현진권을 잡으랴 고집불통의 얼굴로 서 있는 아들 시후를 달래랴 힘이 벅차기만 했다.
“네 멋대로 병원도 정하더니, 결혼까지 깽판을 치겠다 이거냐? 어?”
“아버지, 결혼은 인생이 달린 문제잖아요. 왜 싫다는데 억지로 떠밀려고만 하세요?”
시후의 말에 현진권은 바짝 시후 앞에 다가섰다.
“뭐가 어쩌고 저째? 인생이 달린 문제인 걸 잘 아는 놈이 이렇게 나와? 이건 기회야. 몰라?”
“아버지. 전 싫습니다. 결혼을 해도 제가 하고 싶은 여자와 해요.”
시후는 아버지에게 지기 싫은 아들의 얼굴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현진권은 부르르 떨었다. 제 말에 고분고분했던 적이 없는 아들이었지만, 공든 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기선 대학교 이사장이 그토록 자연스럽게 시후를 사위로 점찍었다 하기에 다들 그런 줄 알았고, 본인 시후마저도 무리 없이 이 일만은 따를 거라 생각했다. 허나 아들은 뒷통수를 제대로 칠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닥치고 결혼해! 기선 재단 이사장의 사위다! 그게 쉬운 일이냐? 감히 이사장의 하나뿐인 사위 자리란 말이다!”
감히, 라는 말을 현진권 입에서마저 듣고 있으니 시후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기선 대학 재단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스스로 비굴하단 말인가.
“아버지. 전 이도희와 결혼 안 합니다. 결혼할 여자 따로 있습니다.”
“뭐라고?”
“어머, 시후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머어머.”
시후는 달아날 구멍 같은 거 마련해 두지 않았다. 배수의 진, 더 늦기 전에 수인을 위해 앞으로 전진만을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