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시후의 묻는 말에 턱이 빠진 사람같이 대답하는 재건이었다.
“아니. 못 찾았어. 근데 아, 여기 물 좋다~”
실없는 사람처럼 웃고 서 있는 재건을 시후가 쳐다보았다. 이리저리 열심히 시선을 옮기는 재건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와이프는 한눈에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어? 우리 희윤이는 빨간색 비키니 입었을 거야. 내가 골라줬거든.”
“그래? 그럼 김수인은?”
침 흘리기 직전인 재건에게 물었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까지 90도로 돌아가 있었다.
“김수인은 뭐 입었냐니까?”
“비키니 입었겠지.”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무슨 색이냐고. 그거라도 알려 주면 빨리 찾을 텐데, 그 말을 하려는 순간 시후의 눈에 한 마리의 표범이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찾았다.”
적어도 D컵을 넘는 바스트에 잘록한 허리, 햇빛을 볼 수 없으니 눈처럼 하얀 피부, 가느다란 팔과 다리, 그리고 액세서리 하나 없고, 매니큐어와 패티큐어도 없는 김수인.
시후는 슬그머니 수인이 잘 보이는 선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선베드에 기대 누워 김수인을 감상하듯 느른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아주 한가득 끼얹어진 사람처럼, 이 가면이라는 게 이리 좋은 건 줄 일평생 처음 깨달은 시후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대놓고 수인을 눈으로 훑어 내리던 시후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안 예쁜 데가 없네.”
그러다 수인에게 다가온 밋밋한 희윤을 보고 시후는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키는 큰데 너무 정직한 몸매랄까. 수인에 비하면 초등학생 같기만 해 보이니 재건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웃었는데 그 웃음이 이젠 걱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시후는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맞다. 다른 놈들도 다 보잖아.”
마음이 급해졌다. 저 완벽한 몸매를 어떤 놈에게도 보여주기 싫은데 이를 어쩌지. 희윤이가 입혔을 게 분명한 저 표범 무늬 비키니가 유난히 눈에 띄니 이를 어쩔까. 시후는 저도 모르게 다리가 달달 떨렸다. 왜 저렇게 예쁜 애한테 저런 옷을 입힌 거냐고!
“아. 어서 물 안에 들어가. 어서.”
하도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니 혼잣말 하는 시후의 말이 들리지 않아 다행이지, 아마 누가 들었더라면 미친 남자인 줄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속이 타서 시후는 오른쪽 다리를 떨다. 왼쪽 다리를 떨다 아주 야단법석이었다.
뭐가 좋은지 희윤이가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수인이는 깔깔 웃으며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데, 시후는 속이 타서 수영장 물을 다 마셔 버리고 싶었다.
이건 필시, 누군가를 음탕한 눈으로 보는 관음보다도 더 이상한 감정이었다. 저렇게 예쁜 몸매를 다 드러내 놓고 있는 수인을 지금이라도 한겨울 벤치파카라도 입혀 둘둘 싸버리고 싶었다.
아니, 수인의 몸매를 본 남자들 눈을 다 찌르고 싶었다. 그냥 달려가서 보쌈 해 버리듯 옷을 주워 입히고 싶었다. 그런 시후의 마음도 모르고 수인은 즐거워 보였다.
“찾았냐?”
재건이 맥주 두 병을 손에 들고 다가와 시후에게 한 병을 건넸다. 제 와이프가 빨간색 비키니를 입었다는 것도 아는 녀석이 아직 제 와이프를 정면에 두고 못 찾는 건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몰라.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러다 재건이 수인을 볼까 봐 시후는 은근슬쩍 거짓말을 했다.
“그치? 와. 끝내준다. 우리나라 여성분들 발육 상태가 이렇게 좋았냐?”
뭐 병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이리 헐벗을 일도 없거니와 적어도 그런 시선으로 본 적이 없으니 더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지금 시후는 재건이 무슨 말을 떠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안 왔으면 억울할 뻔했네.”
재건은 갑자기 팔굽혀 펴기를 하며 가슴 근육에 펌핑 질을 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의 눈은 오로지 한 마리의 표범에게 가 있었다. 저 표범을 그냥 사냥을 해 버릴까. 다른 놈들이 보기 전에?
그 생각만 가득한 시후의 눈에는 불길이 일었다. 그때, 수영장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가는 수인을 보고 시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맥주 배부르다. 보드카 한잔?”
재건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뜻하지 않게 수인의 감시 모드가 된 시후는 한 발자국도, 시선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오로지 김수인 곁에 남자 비슷한 게 붙기만 해 보라는 듯 눈에 비상등을 켜고 지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거품이 쏟아져 내렸다. 아주 열광의 도가니가 되기 충분했고, 모두가 동심의 세계에 빠진 듯 거품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후의 눈에는 비상등이 응급실의 비상벨 울리듯 울려댔다.
수인 주변에 몰려든 시커먼 짐승의 무리들, 자꾸 수인을 포위하듯 다가서기에 시후는 걸쳤던 가운을 휙 던져버리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허우적거리며 수영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이건 마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 같았다.
열광의 도가니인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전진하는데 체력이 다 고갈될 것 같았다. 그러나 체력하면 한 체력 하는 시후이기에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고, 숨이 턱에 찰 지경이었지만 드디어 육감적인 표범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수인은 거품에 푹 빠져서 손으로 거품을 모으고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 때문에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수인은 거품에 정신이 단단히 팔려있었다. 더는 안 되겠기에 시후가 수인을 끌어안았다.
“꺅!”
“쉬! 나야. 나라고.”
“어? 선배?”
“쉬!”
시후가 희윤을 피해 수인을 감싸 안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갑자기 나타나 수인을 거의 들어 안아버린 시후 때문에 달아나지도 못하고 수인은 제 몸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나타났었어요?”
“이렇게 예쁜 몸 다 내놓고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어찌나 힘이 좋은지 수인의 엉덩이를 한 팔로 받치고 다른 한 팔로 사람들의 틈을 벌리며 걷는 시후였다. 수인은 저도 모르게 시후의 목을 끌어안았다. 쿵쿵대는 비트는 끝이 없고, 하늘에서는 거품 덩어리가 끝도 없이 쏟아지기에 이 둘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어도 누구 하나 보지 않았다.
시후는 힘을 내어 겨우 사람이 좀 적은 후미진 구역으로 수인을 안고 왔다. 그 사이 너무 밀착해 버린 두 몸은 그제야 서로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수인이 다리를 내려 시후에게서 내려왔다.
“뭐예요? 갑자기. 놀랐잖아요.”
“나는 더 놀랬다.”
“선배가 왜 놀래요?”
온 머리하며 얼굴에도 거품이 잔뜩 묻은 수인이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뭘 해도 예뻐 죽겠지만, 시후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옷이냐? 다 벗지 그랬어?”
“어머? 이거 왜 이래요? 한참 재미있는데. 왜 나타나서 시비예요?”
그렇게 대들듯 말하면서도 얼른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희윤이 건네준 표범 무늬 비키니가 작아도 좀 작은 편이었다. 희윤이 아마도 제 사이즈를 생각해서 마련한 비키니 같은데 발육 상태가 월등한 수인에게는 작은 게 당연했다. 같이 제 가슴을 내려다보는 시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수인은 얼른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어머 별꼴이야! 웬 간섭? 남이야 옷을 벗든 말든!”
“뭐? 간섭? 벗든 말든? 김수인. 네 가슴 이제 나만 볼 거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시후는 수술실에서 언뜻 했던 농담 같은 말을 얼른 꺼냈다. 그때는 단추 하나씩 밀려 끼워 넣은 수인이 민망할까 봐 농담같이 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진심이었다.
“미쳤어~”
“너 때문에 혈압 올라서 미치기 전에 죽겠다. 내가.”
주저앉아 있는 수인을 얼른 끌어 올려 껴안았다. 미끌거리는 비누 거품이 서로의 몸에 닿아 가만히 있어도 야릇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파도 같은 물 때문에도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느닷없는 사과에 수인은 밀어내던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사과할 말이 있었지? 아무리 눈을 깜빡거려 봐도 단번에 알아낼 수가 없었다.
“뭘 미안해요?”
“그놈하고 같이 오기에 순간 눈이 확 돌았어.”
“누구요?”
시후는 내내 생각했던 모양인데 수인은 지금 이 순간 야릇한 몸의 신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원장이라는 새끼.”
좋게 나오다가 막판은 기분이 언짢아서 시후가 인상을 썼다. 수인은 무슨 이야기를 또 하려나 싶어 자꾸 시후를 밀어내었다. 이렇게 붙어 있다가 또 언제 몸이 동할지 모를 일이었다.
“왜 자꾸 욕은 하고 그래요?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아. 몰라. 네 옆에 붙는 놈들 다 욕하고 싶다.”
아니, 사실 욕보다 더한 걸 하고 싶지만 차마 할 수 없는 사회적인 체면이 사람 여럿 구하는 중이었다.
시후는 자꾸 밀어내는 수인을 다시 끌어안았다. 수인은 너무 좋은데 겁이 나서 싫었다. 그래서 밀어낸다고 한 게 벗고 있던 몸들이라 시후의 가슴팍에 그만 손톱자국을 남겨버렸다.
“아!”
시후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수인은 몇 발짝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았다. 힘들게 이만큼 달아났다고 생각했으나 시후가 거품에 몸을 다 쑤셔 넣을 듯 구부리기에 수인은 다시 허우적거리며 시후에게 다가섰다.
“왜 그래요?”
“아~”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거품에 난리가 난 몸에도 선명하게 붉은 손톱자국이 보였다. 피가 날지도 몰랐다.
“어떡해.”
“그냥 좋으면 좋다고 말로 하라고.”
“이게 좋아서 그런 거예요? 암튼, 이렇게 해봐요.”
수인이 바짝 다가와 시후의 가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시후는 씩 웃으며 수인의 얼굴을 확 당겨 가슴에 끌어안았다. 미끌거리는 거품도 있겠다, 안 그래도 스파크 잘 일어나는 두 사람의 몸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릿했다.
“수인아.”
이미 눈동자가 끈적해진 시후가 수인의 등을 어루만졌다.
“왜 이래요. 상처 난 거나 봐요.”
“보면 뭐? 호, 해줄 건가?”
터지고 깨져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환자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의사 현시후였다. 호, 라니, 이런 비이성적인 말이 제 입에서 나올 줄이야. 시후는 다 말해놓고 머쓱해져서 괜히 엄살을 더 부려댔다.
“아. 따가워. 나 피 나는 거 맞지? 내 금쪽같은 피.”
“아우. 참 자기 사랑이 투철한 사람이야. 선배는 우울증은 안 걸리겠어요.”
말을 그리하면서도 수인은 시후의 가슴에 잔뜩 묻은 거품을 쓸어내고 상처를 보았다. 그러자 헤벌쭉 입이 벌어진 시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왜?”
“뻑하면 내 금쪽같은 새끼에다. 이번엔 내 금쪽같은 피요?”
그럭저럭 상처를 확인한 수인이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시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눈만 가리고 있는 가면이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인지 다 보였다.
“아. 맞다. 너 아직 증명 안 했잖아. 어떻게 됐어? 내 새끼 여기 들은 건 아니지?”
쓱 끌어당겨 아랫배에 손을 올리는 통에 수인은 펄쩍 뛰어 물 밖으로 날아갈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