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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43)화 (43/88)

43화

맥주잔을 부서지듯 내려놓은 시후가 다그치기 시작했다. 

“뭐? 병원을 옮겨? 왜? 왜?”

마지막 ‘왜’ 에서 울컥한 지 시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수인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월급 더 준대서요. 알잖아요. 난 늘 돈이 필요하고.”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 버린 수인의 말에 듣고 있던 세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 수인의 처지를 10년 전부터 전부 알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수인의 아버지 자선의원에 수인의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자선의원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음을. 

“자선의원이 돈 먹는 하마예요. 돈 먹는.”

수인은 웃으며 애써 씩씩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시후는 울먹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간신히 입을 떼어내었다. 반면 수인은 슬프지만 웃어야 하는 피에로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아니에요.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침 자선의원 근처에 자리가 나기도 했고, 수술 케이스 많다기에 욕심도 나고.”

그녀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어 시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마 수인을 잘 아는 희윤도, 또 눈치 없는 재건마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 씨. 그놈의 돈이 문제지. 늘.”

“아버지 많이 힘드시지?”

“늘 힘들죠. 다음 달까지 내야 할 은행 빚도. 휴, 모르겠어요. 어떻게 되겠죠?”

수인이 또 한 번 웃었다. 그 미소가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잠시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먼저 침묵을 깬 건 재건이었다. 

“근데 그 바싹 마른 멸치 대가리 같은 남자는 누구야?”

시후의 고개가 번쩍 위로 들렸다. 가슴 아픈 건 아픈 거지만, 궁금증이 한번 일면 잠도 설쳐대는 현시후의 눈이 아주 예리하게 이글거렸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 직장을 옮긴다는 그 말까지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고 보지만, 그 기름통에 빠진 생쥐 같은 남자의 정체는 아직 해결된 것이 없었으니, 시후는 수인을 한입에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예? 남자요?”

서로가 봤다는 걸 알지만, 순순히 다 털어놓기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생쥐, 마지막 연사로 나왔던데?”

“생쥐라뇨. 우리보다 훨씬 선배님이에요. 저 오늘 면접 본 병원 원장님이요.”

“원장님? 엄청 젊어 보이던데?”

벌써 이렇게 스토리를 만들어 버렸단 말인가? 시후의 눈이 더욱 커져서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이런 느낌 소름 끼치게 싫은데, 왜 그 착하던 후배 김수인이 이런 감정을 자신에게 막 던져대는지 딱 싫어 죽겠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야! 너.”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니 수인도 잠시 얼어붙었다. 시후는 사회적인 체면이 문득 떠올라 용광로같이 솟구치는 화를 눌러 내렸다.

“훨씬 선배? 하!”

“논문도 많이 내셨대요.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요.”

수인의 말에 눈이 안 돌아간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후는 부글거리는 가슴이 진정이 안 되어 급한 대로 맥주를 한잔 비워냈다. 

“누구 말하는 거야? 면접 본 원장이 여길 같이 왔어?”

상황을 모르는 희윤이 답답해서 묻자 재건이 눈치 없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학회 시작하기 전에 김수인이 웬 생쥐 같은 날라리 새끼랑 같이 오더라고. 그래서 우린 의심을 했지. 저놈이랑 룸으로 올라가나 하고.”

“예? 나, 참 선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수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질러주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 것 같은 시후였다. 시후는 아무도 못 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곤 웨이터를 부르려 손을 번쩍 들었다. 

“술 그만 해요. 우리 가야 할 데가 있다니까!”

희윤이 번쩍 든 시후의 손을 잡아 내렸다. 

“누군 새로 만난 원장님인지 뭔지 하고 정답게 학회를 같이 오는데, 나는 술이라도 마셔야지.”

“현시후 선배님.”

수인의 눈꼬리가 스르륵 올라붙은 걸 보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시후는 이쯤에서 그만하려고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을 표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 감정대로 수인을 더 볶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 돈이 좀 많이 들어가는 수술을 자선의원에서 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시후도 잘 알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가벼이 꺼낼 이야기가 아님을 알기에 시후는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아. 가자. 심각한 이야기는 스탑하자고. 우리 파티에 가야 해. 가자. 응? 오늘은 김수인을 위해서 우리 온몸을 다 불살라 버리자고.”

희윤이 침체되어 가는 분위기를 수습하며 나섰다. 억지로 희윤의 손에 끌려 나가며 수인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

음악이 쾅쾅 울려대니 이곳이 나이트클럽인지 수영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정신없이 물 대포는 쏘아지고 있어 워터파크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워터파크의 어른 버전 같기도 했다. 

입장부터가 요란하기에 수인은 발바닥에 힘을 줘가며 버텼다.

“여긴 왜 들어가?”

“파티 가자니까. 더 늙으면 이런데 갈 수도 없어.”

“그러니까 이런 데를 왜 오냐고. 우린 이미 늙었어. 저 봐라. 저 쭉쭉 빵빵들.”

수인이 있는 대로 삿대질을 해대는 수영장에는 비키니의 늘씬한 미녀들이 서치라이트를 받으며 유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대고 있었다.

“우리도 쟤들만큼 안 딸려. 가자.”

“야! 난 딸려. 딸린다고.”

잡힌 손목을 빼내어 보고 도리질을 쳐보지만, 희윤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때마침 외과학회가 열리는 이 호텔에 ‘지나간 여름날의 추억’이라는 주제로 열린 풀 파티의 마지막 날이었다. 죽어도 반드시 가야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우. 희윤아. 나 수영복도 없어.”

“걱정 마. 내가 준비했어. 그리고 여기 가면 파티야. 왠지 더 설레지 않니?”

글쎄다. 가면 쓴다고 몸을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니? 친구야? 라고 말하려 했지만 희윤은 이미 수인을 끌고 입장 라인에 들어섰다. 

“시후 선배랑 재건 선배는?”

“응? 두 남자는 아마 사우나 갔겠지?”

모두가 눈만 가리는 가면을 쓰고 네온 불빛이 파란 바다에 동동 떠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아무튼 열광의 도가니가 딱 저 모습일 것 같았다.

“내가 미치겠다. 너 때문에.”

“야, 야. 널 위해 준비했다니까. 인원수 제한 있어서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곳이야. 내가 울 엄마 찬스를 좀 썼지.”

어지간하면 칭찬받고 싶어 안달인 친구 희윤에게 칭찬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영 입 밖에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자꾸 이렇게 시후와 엮여서 뒷감당은 또 얼마나 힘이 들지 그것만 수인의 머릿속에 뱅뱅 돌았다. 

“희윤아. 나 시후 선배 때문에 힘들다니까. 너마저도 내 속을 이렇게 몰라 주냐?”

“다 알아. 아니까 이렇게 스트레스 풀어 주려는 거잖아. 시후 선배 때문에 미치겠다며? 그냥 오늘 하루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놀자. 어차피 따로 놀기로 했어.”

“응? 따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수인이 고개를 꺄웃했다. 희윤은 활짝 미소를 짓고는 스르륵 다가와 수인의 귓가에 입을 댔다.

“너랑 나랑 둘이 놀러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우리 그이랑 시후 선배는 지금 사우나 갔던지, 아님 루프 탑 바에 갔을 거야.”

“아. 그런 거야?”

맹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수인에게 희윤은 비치 가방에서 야시시한 비닐 하나를 꺼내 툭 하고 안겼다.

“내 특별히 준비했지.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

“수영복? 근데 뭐가 이리 가벼워?”

“야. 들어가자. 오호!”

입장 라인에서 손목에 야광 팔찌를 하나씩 두르고 드디어 입장을 하였다. 희윤은 수인을 이끌고 일단 탈의실로 향했다. 희윤에게 전해 받은 수영복이 너무 가볍고 얇아서 걱정이긴 했지만 일단 희윤이 수인부터 탈의실에 밀어 넣기에 들어섰다. 

어쨌든 비닐을 개봉하는 데 놀랄 지경이었다. 손바닥만 한 팬티 하며, 끈으로 되어 있는 브라 부분이 겨우 치부만 가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언제부터 희윤의 취향이 이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지금 심각한 고민에 싸여버렸다. 그러다 문득 발아래 툭 떨어지는 가면을 보니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도 같았다. 

“아, 몰라.”

수인은 이 풀 파티의 이름처럼 ‘지나간 여름날의 추억’에 현시후를 꽁꽁 밀어 넣어 버리자, 그리 마음먹고 비키니를 갈아입었다.

벌써 수영복을 갈아입은 희윤이 손을 흔들었다. 희윤의 몸에 걸친 비키니는 빨간색, 아주 도발적인 색감이었다.

“아우. 기지배. 이게 뭐야?”

“야. 완전 색다르지? 너도 표범 무늬 엄청 잘 어울린다. 어머 어머. 김수인 글래머 폭발이네?”

희윤은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더니 수인이 들고 있는 비닐 가방들을 재빨리 빼앗아 선 베드에 던져버렸다.

“일단 젖기 전에 사진 한 장.”

희윤은 어디서 배웠는지 몸을 있는 대로 틀어서 다리를 꼬아대며 포즈를 취했다. 수인은 엘리트 코스만 제대로 밟아온 희윤이 놀기도 잘 노는 친구라 항상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서로 헐벗고 보니 기가 막혔다.

“김희윤. 너 이러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뭘 참아? 나 안 참아. 내가 몸매가 좀 안 되서 그런 거지. 네 정도 몸매면 난 벗고 다녔지. 이미.”

희윤은 늘씬하긴 하지만 단조롭고 올곧은 몸매를 연신 이리저리 비틀어대며 포즈를 취했다. 

“너도 찍어줄게. 사진밖에 남는 게 없어. 빨리빨리.”

하도 독촉을 하니 수인은 별수 없겠다 싶어 손가락 브이를 들어 보였다. 이번엔 희윤이 셀카 봉을 꺼내서 수십 장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아. 맞다. 우리 칵테일 시켜야지.”

“그러자. 분위기는 좋긴 하다.”

희윤이 칵테일을 시키러 가고, 수인은 선베드에 걸터앉았다. 귓가를 쉼 없이 어택 하는 비트에 몸이 절로 들썩이는 것 같았다. 넘실거리는 수영장 물은 신비로운 물감을 타 놓은 듯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몸을 자유로이 흔들어 대는 사람들, 음악도, 분위기도 어느 하나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들 같았다. 수인은 자꾸만 기어 올라가는 비키니를 잡아 내리며 선베드에 몸을 깊이 들여 앉았다. 가을이 시작된 밤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그래. 아옹다옹 살 게 뭐야.”

너무 일밖에 모르고,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수인은 흥에 취해 몸을 흔들어 대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수술실에서 살아오느라 어느새 30대 초입, 수인은 오늘 하루 희윤을 따라 즐겁게 놀아보자 그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각 시후와 재건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무언가 찾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찾겠는데. 전화해볼까?”

“야! 그럼 왜 왔냐고 난리 칠 거 아니야?”

“그렇지. 맞아. 희윤이가 연락도 하지 말랬는데.”

역시 재건은 와이프 말을 잘 듣는 공처가이자 의리파 친구였다. 시후는 시력 게이지를 한껏 올리고 샅샅이 훑어 내렸다. 그사이 재건은 모든 여자들의 몸매 감상에 빠져 그저 웃고 있었다.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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