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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42)화 (42/88)

42화

그도 그럴 것이, 의사치고 190센티 가까이 되는 체격은 완벽하여 모델 같고 인물 또한 이렇게 수려한 남자는 좀 드물었다. 더구나 그런 두 남자가 함께 있는 모습도 사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문제는, 수인이 시후와 재건을 보기에 앞서 시후의 눈이 수인을 먼저 봤다는 것이다. 게다가 옆에 절친 재건마저 그 모습을 보았다.

“김수인이 웬 기름통에 빠진 생쥐 같은 놈이랑 같이 온다?”

“하!”

시후의 인상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수인과 나 원장의 모습은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했다. 수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지만 옆에 있는 날라리 같은 남자는 마치 수인의 환심을 사고 싶어 안달인 것 같이 시후의 눈에 보였다. 

“근데 수인이가 원래 저랬나?”

눈치라곤 영 가망이 없는 재건이 툭 하고 한마디 뱉었는데, 시후의 눈에는 핏발이 세워졌다.

“뭐?”

“아니, 쟤가 원래 여자 같았나? 오늘은 엄청 여자 같지 않아?”

재건의 눈에도 그래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장 스커트를 차려입은 데다 굽 있는 슈즈까지 신은 모습이 날씬하면서도 지적이고 긴 생머리를 풀어 헤쳐 놓으니 천생 시후의 눈에는 여신으로 보였다. 유부남이고, 수인을 막 남동생 대하듯 했던 직속 선배 재건의 눈에도 오늘 수인의 모습이 달라 보였다.

“저 옆에 있는 놈 뭐야?”

“그러게. 꼭 말라비틀어진 멸치 대가리 같이 생겼네. 아? 혹시 김수인 선봤나?”

안 그래도 수인이 오늘 학회 직전에 선이라도 보나 싶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던 시후였다. 

“그래 보이지?”

“응. 저 가식적인 웃음도 딱 그렇잖아.”

재건의 의견이 더해지니 시후의 가슴에 폭약이 팡팡 터졌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 나가 수인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 싶었다. 

“어라? 저것들 왜 저리로 들어가지?”

분명 학회가 있는 강의 장소는 이쪽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곧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되었다. 그런데 저 둘은 호텔 본관 본 출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객실 올라가는 거야? 설마? 와! 김수인.”

재건의 중계에 시후는 완전히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미친놈.”

시후가 재건을 한 대 날릴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았으나 눈치 없는 재건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오. 김수인. 그렇게 안 봤는데.”

“뭘 그렇게 안 봤는데?”

으르렁거리는 시후의 목소리도 분간 못 하고 재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하긴 김수인도 남자 만날 나이 됐지.”

“미친놈.”

“하긴 미친놈이네. 학회까지 따라올 건 뭐냐?”

재건이 혀를 톡톡 차댔다. 대체 미친놈은 누굴 뜻하는 걸까. 시후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 내렸다. 

호텔 본관 본 출입구를 선택한 건 수인의 의도였다. 멀리서 시후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은근슬쩍 우회할 목적이었다. 

결국 다 통하게 되어 있는 터라 옆에 걷던 나 원장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수인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시후가 보지 않는 사이, 수인은 얼른 나 원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강의 잘하세요. 원장님.”

“그래요. 그럼.”

그렇게 인사는 심플했고, 나원장은 학회 관계자를 만나러 산뜻하게 자리를 이동했다. 수인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며 학회가 열리는 3층을 찾아갔다. 등록을 마치고 안내 책자를 받아들고 얼른 사람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400명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커다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내 책자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수인의 오른쪽 옆에 누군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애써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익숙한 향기, 수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전화도 안 받고.”

“아. 선배.”

화를 억지로 꾹 참은 얼굴로 시후가 겁먹고 있는 수인을 쳐다보았다. 

“가방 좀 치워봐.”

긴 팔 하나가 수인의 핸드백을 쓱 밀어내기에 수인은 얼른 왼쪽을 돌아보았다. 하! 이재건 선배까지. 완벽하게 두 남자 사이에 포위당한 수인은 고개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야. 근데.”

재건이 주책을 떨어대며 궁금증을 풀려고 하는데, 시후가 얼른 입을 막았다.

“어디 갔다 오냐?”

“네? 어. 볼일이요.”

“볼일?”

양옆에 두 선배가 수인을 탁구공 취급하듯 이리저리로 마구 받아 쳐댔다. 정신이 혼미했다. 학회를 오늘 끝까지 잘 들을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눈치를 살피며 수인은 강의에 초 집중을 하는 척했다. 

시후의 따가운 시선이 자꾸 느껴지기는 했으나 참을 만 한것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강의가 중간 브레이크 타임이 되었다. 수인은 양 옆에 선배들이 취조를 시작하기 전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재건 선배가 도망치듯 일어나는 수인에게 물었다. 수인은 감시를 당하는 죄수의 느낌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화장실이요.”

“빨리 갔다 와.”

왜 갑자기 재건 선배까지 나서서 수인을 단속하려 드는지 의문이었지만 허락을 받은 사람처럼 고개까지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삼엄한 선배들의 감시 속에 수인은 또 중간에 꼭 끼어 앉아서 마지막 강의를 듣고 있었다. 마지막 연좌로 등장한 나 원장을 보고 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재건의 눈도 가늘어진 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시후는 단상에 선 나 원장을 보는 게 아니라 대놓고 수인을 쳐다보며 강의 시간을 다 보냈다. 수인의 오른쪽 얼굴이 시후의 따가운 시선에 반쯤 익었다. 

거의 타 죽기 일보 직전에 오늘의 학회가 끝이 났다. 400명의 열기가 열린 출입문으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듯 했으나 수인의 멘탈은 바사삭 타 버릴 것 같았다. 

“가자. 밥 먹으러.”

“예? 어.”

이 자리를 빨리 달아나고 싶은 수인이 주저하자 시후가 수인의 핸드백을 낚아챘다.

“들어줄게.”

“예?”

무거울 게 없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토트백이었다. 이건 필시 인질 삼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언제 왔는지 수인의 절친 희윤이 두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자. 배고프다.”

아주 자연스럽고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희윤까지 합체가 완벽해진 네 사람이었다. 

“레스토랑 예약했어.”

희윤까지 수인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희윤이 오늘 호캉스 제대로 할 거라며 하도 자랑을 하던 지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넷이서 함께 할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하지 않은 수인이었다.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여기 맥주가 무한이래.”

“잘됐네. 어차피 여기서 잘 거니까 아주 딱이다.”

재건과 희윤은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에 반해 수인은 시후의 시선을 피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아. 나는 운전해야 해서.”

“자고 가. 방이 3개야.”

“뭐?”

“스위트룸 예약했어.”

미치겠다. 왜 이렇게 도움이 안 되는지, 수인은 웃으며 말하는 희윤의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억지로 현시후를 밀어내 보려고, 버티느라 죽을 것 같은데 뭐라고? 술을 먹고 같이 호텔에서 자고 가라고? 아. 빨리 달아나는 게 최상인데 이를 어떡해. 주도면밀한 시후가 수인의 자동차 키가 든 핸드백을 손수 들고 있으니. 

“야. 서울 살면서 호텔은 뭐 하러 예약했어? 얼른 먹고 집에 가면 되지.”

“이렇게 나의 넓은 배려를 몰라주네? 우리 오랜만에 뭉치는 거잖아. 너랑 시후 선배 때문에 일부러 여기 잡은 거야.”

“그래. 희윤이가 신경 많이 썼다.”

남편 재건은 제 아내 희윤을 아주 칭찬해 주고 싶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울고 싶은 건 수인뿐인가. 절친을 위한 배려. 그 배려가 이리도 방해만 될 줄이야.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너의 배려가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수인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방 3개짜리 잡느라고 내 거금 들었어야. 오늘 수영장도 가고, 사우나도 가고 할 거 많아.”

암튼 이제 달아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그래. 빨리 움직이자. 밤에 수영장에서 근사한 파티도 가고 싶다고 우리 희윤이가 노래를 한다. 노래를.”

그 노래 혼자 하면 될 것을. 수인은 한숨을 내어 쉬며 레스토랑에 발을 디뎠다. 밥이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여유는 마음이 편해야 즐겁지, 마음이 불안에 휩싸인 수인은 지금 뭘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시후가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가슴이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아까 그놈 누구냐?”

올 것이 왔다. 예리하다 못해 눈에서 레이저를 뿜고 있는 시후. 수인은 저에게 온 질문이 아닌 척하려고 희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번엔 재건의 공격이었다.

“그래. 그 멸치 대가리 같은 놈 누구야?”

“멸치 대가리? 그게 누군데?”

총공격이었다. 표적이 된 수인은 피할 구멍이 없었다. 휴, 한숨이 나왔고, 뭐라고 말을 둘러대나 하고 있는데 희윤이 초를 쳤다.

“너 면접 본건 잘됐어?”

“뭐?”

시후가 어찌나 크게 놀라는 지 저 멀리에 있는 테이블 손님들도 돌아볼 지경이었다.

“김수인 면접 봤어? 왜? 무슨 면접인데?”

“음. 그냥 면접이요.”

수인이 눈을 지그시 내리깔자 그제야 희윤이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절친이라고 희윤을 믿고 산지가 어느새 시후를 짝사랑하던 연수만큼 되었다. 

“어머, 어머. 우리 빨리 수영장 가자. 파티 할 시간 다 됐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화제를 돌려보려 희윤이 애를 썼지만 시후는 금방이라도 수인을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무슨 면접?”

“음. 병원 옮겨 볼까 하고요.”

그래 언제라도 알게 될 일, 그리 비밀일 수도 없었다. 아직 의료원에 그만둔다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월요일에 가서 말을 할 생각이 굳어졌기에 수인은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듣고 있던 시후는 한숨이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인생사 속고 속이며 사는 거라 하지만 이건 너무했다. 

풍성해진 가을 하늘 아래 흐뭇하게 상수리나무를 바라보던 수컷 다람쥐가 한 마리 있었다. 이웃에 사는 암컷 다람쥐가 어느 날 작정하고 유혹해 오기에 수컷 다람쥐는 홀라당 넘어갔다. 그 다람쥐는 비바람 태풍을 아주 잘 견뎌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바심 내지 않고 제 볼따구니 만큼씩 차근차근 겨울날 준비를 했다. 

추운 겨울을 암컷 다람쥐를 꼭 끌어안고 보낼 수 있다며 희망에 부풀어 갔다. 아직 제게 완벽하게 오지 않은 암컷 다람쥐지만 언젠가는 기다리는 그의 품속으로 올 거라 그렇게 굳건하게 믿으며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도토리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할머니 부대가 나타났고, 한순간 그 많던 도토리를 죄다 도둑을 맞아버렸다. 없어진 도토리처럼 어여쁜 암컷 다람쥐조차 돌변을 하여 저 멀리 이사를 간다 했다. 다람쥐는 충격에 휩싸여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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