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술에 취한 개와 동급인 남자는 키 188센티에, 근육질의 남자였기에 가뿐하게 이 남자를 잡아 올릴 수가 없었다. 수인은 초 가을밤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면서 이 남자 현시후를 2층으로 끌고 갔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술에 만취한 걸 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시후가 제일 처음 집도한 날, 소위 머리를 올렸다고 한 날 이렇게 만취를 하고 그 이후론 처음이었다.
“하. 제발요. 선배. 현시후씨. 아. 다리에 힘 좀 줘보라니까요.”
수인은 거구의 남자를 다치게 할까 조심하며 힘은 힘대로 써서 겨우 시후의 현관에 진입했다.
“선배. 머리 조심. 아이참. 이렇게 좀 해봐요. 아, 힘들어 미치겠다. 선배. 덩치가 작아야 안아 올리지. 아~”
거구의 시후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본의 아니게 밀착을 해도 힘에 부쳤다.
마라톤을 뛰고 온 것처럼 온몸의 세포들이 힘들다며 아우성을 내 지를 정도였다. 간신히 질질 끌다시피 거실을 이동하여 침대에 겨우 시후를 눕혔다.
“하, 힘들어. 하~”
수인은 시후 옆에 그대로 널브러졌다. 미칠 듯이 숨이 차고, 온 땀구멍을 다 뚫고 나온 땀으로 샤워를 한 것 같았다. 한동안 온몸에 힘이 방전되어버린 수인은 그렇게 시후 옆에 누워있었다. 그러나 좀 살 것 같아져서 수인은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이렇게 퍼 마신 거야. 에휴.”
터져 나오는 수인의 한숨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시후는 푹 잠들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그의 가슴을 내려다보던 수인은 그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벗겨내었다.
검정색 셔츠에서 팔 한 짝을 꺼내는데도 어찌나 힘이든지 힘껏 잡아당겼더니 셔츠 소매가 푹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
그렇지만 이렇게 불편한 채 자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수인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양말까지 싹 벗기고 나니 그의 우람하고 튼실한 신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 몸매도 끝내준다. 부족한 게 뭐예요. 선배.”
수인은 따뜻하게 적셔 온 수건으로 시후의 얼굴부터 닦아 내렸다. 잠이든 그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내리다 수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생겼다. 눈도 코도 입술도. 그거 알아요. 선배? 난 지금도 선배 얼굴 보면 가슴이 뛰어요.”
12년이 흘렀지만 수인은 시후 얼굴만 봐도 처음처럼 설렜다. 그런 남자에게 하룻밤 유혹으로 도발했고, 그의 품에 안겨서도 미칠 듯이 행복했었다.
그 후로 시후가 더 남자로 느껴져서 미칠 것 같던 기억을 떠올리며 수인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몸을 닦아 내렸다.
“이젠, 정말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선배.”
그렇게 말하고 수인은 시후의 입술에 살포시 입술을 얹어 굿나잇 키스를 했다.
***
정장 재킷을 한 팔에 걸치고 핸드백을 어깨에 멨다. 화장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수인은 진료실 문을 나섰다. 그리곤 또각거리는 발걸음으로 주차장까지 쭉 이어갔다.
수인의 차가 주차된 곳까지 길어봤자 100미터, 그대로 직진해서 운전석에 오르면 되는 일이었다. 곧장 걸어가는 수인에게 더 빠른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존재, 수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조금 더 속도를 내었다.
“같이 가자!”
시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것처럼 앞만 보고 전진했다. 그러자 더욱 커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수인! 같이 가자니까!”
뭔 줄 알고 같이 가자고 극성인지, 걸음을 멈추지 않던 수인은 그만 팔까지 붙잡혀 버렸다.
“안 들려? 왜 못 들은 척 해?”
“예? 못 들었는데요.”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 잘하지, 수인처럼 얼굴에 모든 게 티가 나는 사람은 해봐야 소용없는 짓이었다. 시후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마치 잠복하고 있다 범인을 검거한 형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학회 가야지.”
“네? 학회 가야죠. 오후 7시잖아요. 7시.”
시후는 수인이 슬그머니 잡힌 팔을 빼내기에 일단 팔을 놓고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다. 시후를 의식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녀는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때마침 간호부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후를 불렀다.
“현 과장님~”
마치 산속에서 야호를 외치듯 우렁차게 메아리로 울려왔다. 돌아볼 수 없는 지경이라 시후는 수인을 시선 각도에 넣어둔 채 살짝만 몸을 비틀어 간호부장을 돌아보았다.
“현 과장님, 김진숙 환자요. 말씀 하신 대로 기선대학병원 가기로 했대요.”
“아. 네.”
그 잠깐 두 마디 주고받는 사이 수인은 냉큼 자기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시후는 놀란 눈으로 수인의 차에 한발 다가서는데, 간호부장이 또 말을 붙였다.
“현 과장님께서 연락을 취해줘서 그런지 바로 입원실 잡았대요. 감사하다고 오전에 전화 왔더라고요.”
“아. 그래요. 잘되었네요.”
굳이 이런 이야기를 이리 붙잡고 할 건 뭘까. 시후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서둘러 마무리를 하려 하는데, 스르륵 수인의 조그맣고 앙증맞은 차가 주차장을 크게 돌아 빠져나갔다. 시후는 급하게 간호부장에게 인사를 한 뒤 휴대전화를 꺼내서 전화 통화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그리고 잽싼 동작으로 자신의 차에 올라서 시동 버튼을 눌렀다. 필요하다면 추격전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수인이 진료실에서 나오면 바로 잡아채려고 10분 전부터 스텐바이 하고 있던 수고가 물거품이 되었지만 일단 이렇게 된 거 추격전도 불사할 수 있었다.
블루투스로 연결을 해 둔 전화는 도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시후의 전화를 안 받는 게 분명하지만, 서울로 향하는 길은 두 갈래 길이니 승산이 있어 보였다. 고속도로를 탔을 가능성이 제일 크니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신호등에 멈춰선 앞 차들을 아무리 훑어도 수인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정지 신호등 전에 벌써 멀찍이 달아난 것 같아 시후는 핸들을 손으로 탁탁 쳐대며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고속도로에서 잘하면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시후는 속력을 내어 달려 나갔다.
수인은 계속 걸려 오는 시후의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녀는 국도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애타게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며 달리는 내내 펼쳐진 경치에 가슴이 시렸다. 계절은 거짓말을 못 하고 여름에서 가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수인은 지금 변해가는 경치처럼 시후에게 가졌던 마음을 바꾸어야 했다. 그렇게 30분 넘게 주구장창 울리던 전화는 지쳤는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참으면, 이렇게 모른 척하면 그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처럼 함께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와 정리를 할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이제야 깨달았다.
의료봉사 갔던 그 날을 돌아보아도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증명되었다. 한번 넘어버린 남녀의 관계는 서로의 몸을 쉽게 자극했다. 억지로 참았던 키스가 더욱 뜨거웠고, 더욱 목마르게 만들어 버렸으니, 이러다 또 한 번 서로를 끌어 안아버릴까 두려웠다. 늦었지만 이제야 물리적인 거리를 두기로 결심을 하고 드디어 실행에 옮기는 날이 오늘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니 3시 50분, 수인은 콤팩트를 꺼내어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병원 현관문을 세차게 밀어 열었다. 지금 일하는 의료원보다 작은 규모의 2차 병원이었고, 주로 대장 항문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만나기로 한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수인입니다. 지금 병원에 들어왔어요.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수인은 주말이라 입원한 환자들이 로비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자그마한 병원인데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탓에 환자들이 산책을 하거나 운동 삼아 다닐 공간이 없어 보여 조금 답답해 보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자선 의원과 거리가 가깝고, 집에서 출퇴근을 고려해서 제일 나은 대안이라 생각하는 수인이었다. 역시 개인병원이라 이것저것 아기자기한 맛은 있다고 생각하며 수인이 원장실로 들어섰다.
나원장은 꽤 젊은 사람 같았다. 무테안경이 잘 어울렸고, 빼빼 마른 게 좀 예민한 성격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였으나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대연대 02학번 입니다.”
“아. 네. 대선배님이시네요.”
수인보다 8년 위였고, 개원한 지도 벌써 4년 차라고 했다. 수인에게 꽤 호감을 보이며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의료원에 사표를 내고 후임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출근을 하라는 호의도 보여주었다.
덜컥 나 원장이 면접 통과를 이야기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직장을 옮기기 위해 응했던 면접이고 채용해줄 사람이 예스를 말하는데, 기쁘다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새로운 사람들과 적응해야 할 걱정, 이 병원에 적응할 걱정, 등등 묘한 기분으로 수인이 앉아있었다.
“오늘 심포지엄 간다고 했나요?”
“네.”
“나 오늘 거기 강의하러 갑니다.”
나 원장의 말에 수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워낙 세부 학회로 자꾸 갈라지는 거 같은데 그래도 이번 학회는 들을 게 많을 겁니다.”
“네. 신청 인원이 많다고 들었어요.”
“아.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가 손목에 찬 명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면접이라고 연봉이나 근로 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 10여 분하고 전부 외과 의사로서의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5시가 훌쩍 넘어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럼 출발해 봅시다.”
“네.”
서로 미리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같은 일정이니 함께 움직이자는 제안을 해왔다. 수인은 갑작스러워서 제안을 거절할까 생각했지만, 나 원장이 매우 적극적이기에 애매하기만 했다.
“저도 차를 가져왔어요.”
“그래요. 그럼. 호텔에서 봅시다.”
하필 학회가 열리는 곳이 호텔이다 보니 어감이 이상하긴 했지만 엄연히 그곳엔 400명의 외과 의사들이 새로운 연구 논문을 들으러 모일 곳이었다.
나 원장이 운전하는 번쩍이는 네이비색의 외제 차가 앞서 달렸다. 수인은 그 뒤를 따라 운전하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쳤는지 삐졌는지 시후의 연락이 더는 없기에 수인은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에서 건물 앞 주차장이 만차이기에 안내받은 제법 먼 곳에 주차를 하고 호텔 본관을 향해 걸어 내려왔다. 따로 차를 몰고 오긴 했으나 나 원장과 수인은 호텔의 긴 길을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도 나 원장의 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이랄까, 경험담이랄까 그런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통에 수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듣고 있었다.
아는 사람 누구라도 나타나서 나 원장을 패스해 주고 싶은데, 그마저도 녹녹하지 않은 게 아주 불편했다. 그렇게 함께 호텔 출입구까지 왔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오던 시후와 재건이 한 눈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