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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40)화 (40/88)

40화

도희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저를 그렇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줄 몰랐다. 아무리 현시후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란 건 알지만 모르는 사람 앞에서 서슴없이 정신 이상자로 만들어 버린 건 정말 도희를 바짝 독기를 올리게 했다. 

“아우 씨! 너 뭐냐고? 왜 자꾸 사람 곤란하게 만들어? 어?”

“곤란한 건 나야. 이렇게 숨기만 하면 어쩌자는 건데? 아버지가 더는 못 참으시겠대.”

도희는 시후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악을 써댔다. 그러나 시후를 더 엇나가게 만들 뿐이었다.

“그게 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오빠 때문이잖아. 상관이 없다니?”

“그래? 나 때문이다, 이거지? 알았다. 그럼 내가 이사장님 찾아뵙고 말씀드리면 되는 거냐? 그럼 됐지?”

눈빛부터가 살벌해진 시후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도희는 시후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막 질렀다. 교양있는 척 도도한 척 30년을 살아온 이도희였지만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기엔 지금 너무 벅찬 상황이었다. 

“야! 현시후! 야 내 말 다 안 끝났어!”

이도희의 찢어져 올라가는 소리를 뒤로 하고 시후는 화가 난 걸음으로 걸을 뿐이었다. 

도희에게서 달아나듯 화가 난 걸음으로 걸어온 시후가 청해반점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왕 부장이 보이기에 시후는 화가 난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 여기야.”

“네.”

시후는 빠른 걸음으로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왕 부장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의료원의 촉새 왕 부장은 궁금증을 막 쏟아내었다.

“그 아가씨 말이야. 전에 우리 사택에 온 적 있는데. 맞지?”

“그, 글쎄요.”

이도희가 벌써 두 번째 방문인 건 맞지만 굳이 확인해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러다 수인의 귀에 들어가면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할 게 분명했다.

“맞아. 내가 그 차 유심히 봤다고. 저거 1년에 한대 만든다는 그 차 맞잖아. 미하일 캘던. 맞지?”

그런 게 눈에 들어 올 리 없는 시후를 앉혀 놓고 왕 부장은 자꾸만 떠들어댔다. 시후는 공부가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저런 스포츠카 타고 다닐 정도면 재력가 아가씨인가 보네.”

“부장님. 저. 오늘 있었던 일은 안 보신 걸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왜? 정혼자라고 하던데.”

왕 부장은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야 쓸 수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씩 웃었다. 그럴수록 의연해야 하는데 시후는 의연할 수 없었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일념만 살아 있었다.

“부장님. 저 정혼자 없어요. 요즘 세상에 무슨 정혼자요. 결혼 약속을 왜 그런 애랑 하겠어요?”

“아니 왜? 엄청난 미인이던데.”

겉보기에는 그래 보였을 것이었다. 인물이야 이도희도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이 아닌데다가 하늘하늘 여성스러운 외모였기에 그래 보였다. 

그러나 시후 눈에는 그저 눈 코 입 달린 사람이었지 어느 한순간도 여자였던 적은 없었다. 수인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지만 맹세컨대 이도희에게 어떤 감정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니라니까요. 절대로 무슨 관련이 있는 여자가 아니니까 부장님 그냥 잊으시면 됩니다.”

“워낙 현 과장이 인기가 많으니 따라붙는 여자 중에 하나야?”

“전혀 상관도 없는 애예요. 그러니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못 본 걸로 해주십시오.”

시후가 왕 부장에게 이리도 애걸복걸하니 일단은 알았다고 하겠지만 이상하기는 매우 이상했다. 

“엄청 미인이던데 잘해 보지 그래? 현 과장도 이제 슬슬 결혼할 나이도 됐지 안 그래?”

미인.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 여자에 미쳐 있는 시후 눈에는 수인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미인 다 죽었습니다.”

한잔 술을 확 털어 넣고 시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연예인인 줄 알았는데. 근데 어떻게 아는 여자 분이야?”

여자 분은 무슨, 왕 부장도 남자 아니랄까 봐 새로운 얼굴의 여자에 호기심이 마구 이는 모양이었지만 시후에게는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이야기였다.

“부장님. 그냥 잊으시라니까요. 잘 모르는 여자입니다.”

분명 도희의 컴버터블 외제 차를 오늘 두 번째 보았고, 이제야 의문이 스르륵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후는 아니라고 딱 잡아떼고 있으니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시후는 촉새 왕 부장을 겨우 달래가며 술자리를 이어나갔다. 그 사이 도희는 잠깐 만난 시후로 인해 약이 바짝 오른 채 시후의 모친 정민선을 만나러 갔다. 

“아줌마. 저 정말 자존심이 너무 상해요.”

“에구. 시후가 왜 그런지 모르겠구나.”

도희가 너무도 씩씩거리기에 정민선은 안 봐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들 시후는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골이 오싹하게 차가울 때가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정민선이었기에 도희가 상처받았을까 노심초사가 되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도희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듯 했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지금까지 거의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을 끝낸 마당에 신랑 될 사람이 이리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게다가 도희가 이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김수인 때문이었다. 

선전포고하듯 김수인에게 현시후와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을 한다고 이미 말을 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도희의 속은 더 끓어 올랐다. 늘 화창한 날씨 같은 이도희 인생에 먹구름 같았던 딱 두 사람이 바로 김수인과 현시후였다. 

“도희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 시후에게도 시간이 좀 필요하고.”

아무리 도희가 시후로부터 상처받았고 위로를 해줘야 하는 대상이기는 했지만 정민선은 엄연히 현시후의 엄마였다. 

“언제까지요? 벌써 9월이에요.”

“도희야. 아직 시간 충분해. 그리고 막말로 시후 손발 다 묶어서라도 결혼식장에 세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응?”

정민선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자신에게도 미칠 듯이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한편 도희가 이리 적극적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어보려는 찰나 도희가 먼저 말했다.

“시후 오빠가 아줌마 전화도 안 받고 그래요?”

“응? 그렇지. 수술이 있거나 진료 중일 때는 절대 못 받지.”

“이건 버릇을 좀 고쳐야겠네요.”

정민선은 도희의 발언에 저 끝 창자에서 불이 치솟았다. 

“아니. 도희야. 의사는 그런 직업이야. 그 정도는 이해를 해줘야 사는 게 힘들지 않아.”

“근데 오빠는 왜 일반외과 전공하게 두셨어요? 성형외과나 피부과면 좀 좋아요?”

그야 말해 무엇 할까. 성적도 되고 손기술도 되고 안되는 게 없는 시후였지만 남들이 다 기피하는 외과, 그중에 제일 선호도가 낮은 일반외과를 전공하겠다 했을 때 현씨 집안에 또 한 번 대 혼란이 벌어졌었다. 장관 출신이자 시후의 할아버지인 현 박사도 펄쩍 뛰었다. 

그저 좀 특이한 전공을 하더라도 계속 공부를 해서 대학교수로 가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시후는 진정한 의사라면 수술하는 외과의사라고 굳게 믿고 있다며 고집을 부려댔다. 

이에 아버지 현진권은 시후가 레지던트 지원서를 내었던 일반외과에 압력을 가해 그 지원서를 빼돌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집안 가득 흙먼지가 일어났던 그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후는 제 고집대로 일반외과를 전공했고, 그 이후에 기선대학병원에 자리를 잡을 줄 알았던 모두를 보기 좋게 넉다운시켰다.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지방의 의료원으로 첫 직장을 잡았다. 

워낙 열악한 지역에 있었기에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던 의료원은 혜성같이 등장한 김수인과 현시후 덕분에 전천후 수술이 가능한 의료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시후가 그렇게 하고 싶은 전공이었으니 어쩌겠니.”

도희는 좀 빨리 시후를 관리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기선대학병원에 돌아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는 하더라고요.”

“그럼. 얼마든지 시후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지.”

시후를 서울로 데려올 생각까지 한 것으로 보여서 정민선은 더더욱 물어보고 싶었다.

“도희는 우리 시후 어디가 마음에 들어?”

“잘생겼어요.”

정민선의 질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냉큼 대답을 하는 도희의 얼굴에 미소가 스르륵 번졌다. 시후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시후의 인물이 출중함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민선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후가 잘생겼지. 도희도 워낙 미인이어서 이다음에 태어날 우리 손자들이 얼마나 예쁠지 기대가 커.”

“뭐. 예쁘기야 하겠죠. 근데 전 아이 생각 별로 없어요. 임신 기간 동안 쉬는 건 아무래도 제 커리에 오점이라.”

김칫국 사발로 들이키는 모습이란. 그렇지만 현시후와 이도희의 결혼을 믿어 의심치 않는 두 여자는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 나갔다.

“어머 얘. 그래도 아기는 낳아야지. 사랑의 결실이잖아. 내가 키워 줄 테니까 육아 걱정은 말고, 낳기만 해.”

“친구들 보니까 완전 망가지더라고요. 모르겠어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도희는 가끔 이럴 때 보면 푼수 같았다.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것처럼 제 속의 말을 여과 없이 해댔다.

“충분히 가치가 있지. 부부는 애가 있어야 완성되는 거야.”

“에이. 요새 누구 그래요. 다 딩크족 원해요. 저도 그럴 건데.”

도희는 시후와의 미래에 홀딱 빠져 있는 듯했다. 지금 시후가 어쩌고 있는지 안다면 아마 미친 듯이 드링킹 중인 김칫국물을 다 토해낼지도 몰랐다.

그 시각, 촉새 왕 부장의 기억을 지우려고 미친 듯이 달렸기에 워낙 술이 쎈 시후마저 만취 상태였다. 왕 부장과 시후가 어깨동무를 하고 형 동생이라 서로를 살갑게 부르며 사택으로 들어섰다. 

이에 왕 부장의 아내는 미쳤다고 욕을 해대면서도 제 남편을 1층 자신들의 집안으로 잡아채 갔다. 시후는 간신히 남아있는 정신으로 90도 인사를 하고는 거의 기어서 계단을 올랐다. 힘은 남고, 정신은 없던 시후는 제 집 2층을 지나쳐 3층으로 본능처럼 더 올라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다 우당탕 넘어졌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기에 수인이 불안해하며 현관 앞을 살폈다. 현관문이 무언가에 걸린 듯 잘 열리지 않아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보던 수인은 기절할 듯 놀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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