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무더웠던 여름날도 이제 사람들의 차림새로 보아 지나간 것 같았다. 가을에 어울리는 색감들의 옷을 입은 환자들을 보며 계절이 바뀌고 있음이 느껴지는 병원 생활이었다. 강원도 어촌마을로 떠났던 의료봉사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 사이 수인과 시후는 억지로 선후배 사이를 유지한 채 오늘도 수술 방에서 함께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손을 세척하던 수인이 먼저 시후에게 말을 걸었다.
“라면 먹을래요? 아님 자장면 시킬까요?”
“알아서.”
시후가 오늘 꽤 힘든 수술이었던지 목덜미를 연신 주무르며 피로한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했다.
“그럼 자장면에 탕수육 시킬게요.”
“응.”
시후는 목덜미를 문지르다 땀에 젖은 수술복 상의를 훌쩍 벗어내었다. 땀이 배어 나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그의 근육들은 언제 봐도 강렬한 자극이었지만 수인은 눈을 흘겼다.
“옷 좀 들어가서 벗어요.”
“나 등 뒤에 뭐가 있나 봐. 좀 봐봐.”
굵은 팔뚝을 제아무리 어깨 뒤로 돌려도 닫지 않는지 시후가 몸을 비비 꼬며 다가왔다. 순간 멈칫거리다가 수인은 시후가 내민 등짝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요? 뭐 없는데?”
“T3.”
척추 부위를 말하는데, 아무리 봐도 뭐가 없어 보여서 수인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살폈다. 그러고 보니 하얗고 널찍한 시후의 등짝에 좁쌀만큼 작게 모기 물린 자국이 보였다.
“모기 물렸네.”
“아. 가려워.”
몸을 비비 꼬며 긁어보려 애를 쓰지만 긁어질 리 없고 모기 물린 곳을 긁어봐야 염증만 생길 뿐이었다.
“아. 저기 김쌤, 알콜 솜 하나 만요.”
가렵다고 하니 모른 척하긴 그래서 정리 중인 수술 방 간호사에게 수인이 알콜 솜을 하나 부탁했다.
“어디 쓰시게요?”
“현 과장님 모기 물렸다고 우시네요.”
수인의 말에 시후가 팩하고 돌아섰다. 사나이 체면이 있지, 지금 이 상황이라면 말라리아모기에게 물려도 끄떡없다는 자신감을 보여야 했다.
“나 참! 손이 안 닿을 뿐이라고. 내가.”
“김쌤. 전 자장면 주문 좀.”
수인이 얼른 내빼버리고, 알콜 솜을 들고 온 수술방 간호사가 괜히 얼굴까지 붉히며 시후의 등짝으로 다가왔다. 넓고 넓은 등짝에 근육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른 남자의 상체는 무척이나 원색적이었다. 간호사가 얼굴을 바짝 붙이고 시후의 등짝에 알코올을 문질러댔다.
“아 따가워!”
호, 하며 입김을 불어주는데 시후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화들짝 놀랐다.
“아. 감사합니다.”
얼른 벗었던 수술복을 다시 주워 입고 시후는 수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수인은 웃음이 나는 얼굴을 얼른 가리고 의사 휴게실로 향했다.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이 상황에 어쩌겠는가.
수인은 또 다시 시후가 암울한 얼굴로 세상 다 산 것처럼 땅만 훑고 다닐까 봐 정말 간격 유지 잘하며 하루하루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심정을 시후는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수인은 하루하루가 사실 무척 힘이 들었다.
자장면과 탕수육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려다가 수인이 생수를 챙겨오는 동안 시후는 큼직한 손으로 수인의 자장면을 맛깔스럽게 비벼 놓았다. 나무젓가락까지 쫙 쪼개서 자신 앞에 대령하는 시후를 보고 수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늦은 점심 식사도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몇 젓가락 넘기고 있는데, 수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수인은 전화를 얼른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은밀한 대화를 하듯 입가를 가렸다.
아예 휴게실 밖으로 나가는 수인을 보고 시후는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체면 따위 안중에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수인이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출입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네. 지금 통화 괜찮습니다. 네. 네. 아, 그럼 제가 다음 주 토요일에 학회가 있어서 서울 올라가는데 그때 찾아뵈어도 될까요? 아, 네. 네.”
뭐라고 하는 말인지 전부 들리지는 않지만 마음이 간절하면 닫힌 귀도 열리는지 핵심은 쏙쏙 시후의 귀에 들어왔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 4시 정도에 서울 도착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럼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네.”
병원에서 누굴 만난다는 건지? 병원? 어느 병원? 시후는 전화 통화가 끝난 것 같아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수인은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쓱 집어넣고는 아무 일 없는 듯 휴게실로 들어섰다. 그러나 시후는 이미 다 들었다.
“다음 주 학회지?”
“네? 아. 다음 주 학회 맞죠.”
화들짝 놀라는 수인의 표정만 봐도 그날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시후는 또다시 슬쩍 간을 떠보았다.
“같이 출발해.”
“예? 아. 저는 따로 갈게요. 볼일이 있어서.”
딱 걸려 들은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시후는 눈을 느른하게 뜨고서 수인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려 작정을 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어디 가는데?”
“아니에요. 선배 먼저 가요. 아. 오늘따라 탕수육 맛있네요.”
이봐라. 딴소리 삑삑해대는 김수인. 시후는 촉이 왔다. 김수인이 시후 몰래 대단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남자의 육감으로 확실히 느껴졌다. ‘설마, 이 녀석 이렇게 나를 목이 빠지게 해 놓고 선 같은 거 보러 가는 건 아니겠지?’ 강한 의심이 들면서 시후의 몸이 끓어 올랐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차를 뭐 하러 두 대나 굴려? 어차피 같은 학회, 같은 정회원끼리?”
일반외과 학회가 있는 날이라 같은 전공을 하는 의사들끼리 죄다 모이게 되어 있었다. 시후의 절친 재건과 그의 와이프이자 수인의 절친 희윤은 그날을 위해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했다고 자랑 질을 하는데, 알콩달콩 데이트는 못할망정 다른 놈하고 선을 보러 나간다는 그런 역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아. 안 돼. 내가 데려다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뭐가 안 돼요? 아, 또 이 선배 선 넘네?”
자장면을 둘둘 말아 한입에 물며 수인이 눈을 치켜떴다.
“선? 누가 그으랬어? 왜 다 지 맘대로야?”
시후는 마치 삐진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불만이 가득한 입술은 가만히 있지도 못했다.
“사람 사이에 선이 어디 있어? 누가 정한 건대?”
수인은 기가 막혀왔다. 또 유치찬란한 대화를 할 것 같아서 콧방귀를 끼었다.
“선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수학 파트가 뭔 줄 알아요?”
“뭐?”
난데없는 수학 파트 타령이라니, 시후는 우물거리는 수인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꿀꺽 삼킨 수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요. 수열이 제일 싫어. 피보나치수열, 등차수열, 등비수열, 그딴 거 중에 제일 싫은 게 김수열이라고요.”
“뭐? 김수열? 네 오빠 아니냐?”
갑자기 수인의 친오빠가 여기서 왜 등장하는지 시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아주 애석하게도 내 친오빠 김수열이요. 나는요. 유치한 말싸움, 아집 고집 그 아우. 김수열하고 매 순간이 전쟁이었거든요. 딱 지금 선배가 김수열 같이 느껴지네요.”
이제야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현시후가 김수열로 둔갑을 했건 어쨌건 시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주 학회 날, 김수인이 누굴 만나러 가는지 그게 제일 궁금할 뿐이었다.
좀 더 옥신각신해야 하는데 수인과 시후의 전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댔다. 그리고 원내 방송 알림이 들려왔다. 또 무슨 응급 환자가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수인과 시후는 온기가 채 식지도 않은 자장면 그릇을 내려놓고 달려 나갔다.
그렇게 또 하루가 빠르게 흘러갔다. 미쳐 가을을 준비하지 못한 건 병원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시후는 반 팔을 입은 채 퇴근을 하며 수인이 사택 3층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했다.
언제부터인지 위층에서 층간소음을 내어주어야 안심이 되었다. 수인이 집을 비우면 이상하게 불안증세가 시작되어서 안절부절못했다.
다음 날엔 마침 왕 부장님이 술 한 잔 하자기에 약속을 정하고 시후는 옷을 갈아입으러 사택에 들렀다. 전에 수인이 피자가게에서 입었던 검정색 셔츠를 찾아 꺼내는데 보기만 해도 아주 총각 가슴을 한없이 울렁이게 만들었다.
수인의 피부가 닿았을 옷감에 몸을 끼워 넣고 보니 좀체 진정이 안 될 정도로 심장이 방정을 떨어댔다. 저도 모르게 킥킥 웃음을 흘리며 집을 나섰다. 왕 부장이 기다리고 서 있다가 웃으며 내려오는 시후를 보았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어디로 갈까요. 부장님?”
“오랜만에 기름진 중식에 공부가주 한 잔 할까?”
“좋죠.”
남자 둘이 메뉴를 정하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사택 주차장을 걷는데, 은색의 스포츠카가 매끈하게 달려왔다. 시후와 왕 부장 옆에 멈춰 선 스포츠카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오빠!”
“오빠?”
왕 부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시후를 돌아보았다. 시후는 저를 부르는 이도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크게 인상이 구겨졌다. 대답도 없이 시선을 옮겨버리는 시후에게 도희는 애가 타는 사람처럼 다시 불렀다.
“오빠!”
“왜 자꾸 오는데?”
쌀쌀맞기가 오뉴월의 서릿발 같기에 괜히 왕 부장이 머쓱해져 헛기침을 해댔다.
“오빠 만나려고 왔지. 우리 얘기 좀 해.”
“나 약속 있어. 어이 돌아가라.”
시후의 그 말에 도희가 아예 차에서 내려버렸다. 그리고는 화가 난 얼굴로 진격해 왔다. 그 모습에 왕 부장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서울에 오지도 않고, 어쩌자는 거야?”
“너 뭐하냐? 아. 그만 돌아가. 나 약속 있어. 가시죠, 부장님.”
시후가 싹 무시하는 투로 왕 부장에게 가자고 독촉을 했다. 입장이 살짝 곤란해진 왕 부장이 되레 도희를 배려했다.
“나 먼저 가 있을게. 현 과장 천천히 이야기하고 오지 그래?”
“아닙니다.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현시후 씨.”
한 옥타브쯤 내린 도희의 목소리에 왕 부장이 슬슬 눈치를 보았다. 그런 왕 부장에게 도희가 새치름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시후 씨 정혼자예요.”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도희에게 시후가 펄쩍 뛰었다.
“미쳤어? 정혼자? 벼락 맞을 소리 하고 있네. 아닙니다. 아니에요. 얘가 살짝 정신이 이상한 애라서요.”
시후는 정말 목에 총 칼이 들이닥친 것처럼 질색을 하며 발뺌을 하느라 난리였다. 왕 부장은 더더욱 난처해진 상황에 놓인 것 같아서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저기. 나 먼저 가 있을게. 청해 반점으로 와.”
그리곤 냅다 도망치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시후는 더 펄쩍 뛰었다. 왕 부장을 붙잡고 같이 가자고 하기도, 이런 오해 싫다고 소리를 바락 지를 수도, 이도희를 때릴 수도 없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너 뭐냐?”
“나 살짝 정신이 이상한 애라며? 더 이상한 짓 해도 된다는 뜻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