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시후가 단숨에 날듯이 달려와 화장실 앞에 수인을 내려놓았다.
“미치겠다. 선배 왜 이래요? 이러다 허리라도 나가면?”
“왜? 스킨십 금지라더니 내 허리 걱정은 왜 하는데?”
말을 말아야지. 아무리 자신이 날씬하다 해도 50 킬로그램이 넘는 여자를 들쳐 매고 달리는데 무리가 되지 않을까, 오로지 그 생각으로 물었던 수인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휙 뒤로 날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런 곳의 공중화장실, 분위기가 무섭기도 하고 왜 불빛마저 어두침침하냐고. 화장실로 대피하듯 들어섰다가 수인이 다시금 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았다.
“왜?”
“어디 가지 마요.”
“김수인을 두고 내가 어디 갈 수나 있냐?”
그 말이 아닌데 왜 이리 심장이 벌렁대는지, 수인은 무섭다는 간질거리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억지로 두려움을 누르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시후는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이 적어도 12년 동안 여러 번 있었을 텐데 왜 그때는 수인의 저 귀여운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시후는 제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쳤다. 똑똑한 척할 줄만 알았지, 영 바보같이 살아온 게 확실한 순간이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볼일을 봤는지 시원한 얼굴로 수인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시후는 슬며시 장난이라도 걸어 볼 양으로 수인에게 바짝 다가섰다.
“사실대로 말해봐.”
“뭘요?”
“너 무서워서 나 어디 가지 말라고 한 거지?”
뭐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 반칙 아닌가. 수인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 쌩하니 앞서 걸었다. 그래봤자 시후의 큰 보폭 하나면 금세 좁혀질 거리였지만 수인은 또 모른 척하고 앞서 걸었다. 그러자 시후가 또 한 번 수인을 냉큼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뭐야, 왜 이러냐고요. 내려줘요. 어지러워. 확 등에다 토해 버릴거야.”
“어. 토해.”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어줄 것처럼 단단하게 수인의 허벅지를 긴 팔로 눌러 잡았다. 그리곤 또 달리기 시작했다. 필시 이 남자, 늑대인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왜 자꾸 여자를 들쳐업고 달리냐고, 그것도 둥근 보름달이 뜬 오늘 바닷가에서.
“아. 진짜 토할 것 같아! 나 술 많이 먹었다니까!”
“나는 취했어.”
“알았어요. 알았어. 이봐요 개 아저씨. 그만 내려달라고요.”
그 말이 웃겼는지 수인을 어깨에 멘 채로 시후가 막 웃었다. 그리곤 속도를 늦추어 수인을 내려놓았다.
“어머? 소나무 숲으로 들어오면 어떡해요? 길은 저쪽인데.”
“어? 나도 모르게 이쪽으로 들어왔네. 말했잖아. 술 취하면 남자는 개와 동급이라고.”
시후는 자신이 말해 놓고 그마저도 웃겼는지 막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시원하고 듣기 좋은지 수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한 달을 웃지 못하는 사람처럼 지낸 시후였다. 수인은 그런 시후가 짠하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한심하기도 하고 어쨌든 복잡한 심정이었다.
왜 이리로 들어왔냐고 타박을 해 놓고도 발아래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마른 소나무 숲이 좋기는 했다. 걸을 때마다 폭신한 느낌도 좋았고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다 바람도 시원했다. 그렇게 걷다 벤치가 하나 보였다.
“아. 허리야. 김수인 때문에 허리 나갔다. 큰일 났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엄살을 부리며 시후가 먼저 벤치에 턱 하니 앉았다. 수인이 버티듯 서 있는데 시후가 손을 잡아끌었다.
“앉았다 가자.”
그 말에 수인도 슬그머니 엉덩이를 벤치에 붙이려는 찰라, 시후가 얼른 수인의 골반을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왜? 왜 자꾸 이러냐고요. 스킨십 금지라고.”
몸을 홱 돌려서 시후를 한번 째려보고 일어나려 했지만 수인은 시후를 이길 수 없었다. 슬쩍 큰손으로 눌러 버리면 수인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의자가 차가워서. 여자는 차가운데 막 앉는 거 아니라며.”
“그렇다고 남자 허벅지 위에 앉는 거는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오리목을 비틀듯 수인의 볼멘소리가 소나무 숲을 퍼져나갔다.
“내가 남자기는 해?”
대체 무슨 말을 들으려고 수작질인지, 수인은 아랫입술을 앞니로 깨물고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아, 맞다 술에 취한 남자는 개와 동급이라 했지? 개 아저씨네. 남자 아니고.”
너무 전투력을 바짝 세웠던가. 수인의 눈앞에 갑자기 시후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재빠른 동작으로 수인을 회전의자 돌리듯 돌렸던지 그녀는 시후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시후는 아기를 안듯 수인의 등을 한 팔로 받치고 나머지 한 손으론 이미 수인의 얼굴을 감싸버렸다.
순식간이었다. 그의 입술이 수인의 입술을 덮쳤다. 그것도 아주 순식간에 깊이 박혀 들었다. 어제에 이어 깊고 뜨거운 키스는 목마른 시후의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다. 한번 동한 남자의 몸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시후의 키스에 수인의 정신 회로가 파닥파닥 먹통이 되어 가고 있었다. 멈춰야 하는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수인은 그만 정신 회로가 끊겨 버렸다. 그가 주는 뜨거운 호흡을 들이마시며 몽롱했다.
너무 좋다는 그 느낌, 그 감정 하나만이 수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농밀하고 깊은 키스가 꽤 길어졌고, 수인의 상체가 어느새 벗겨져 아닌 밤중에 노출 씬을 찍고 있었다.
어떻게 속옷으로 감추고 다녔냐며 궁금해서 며칠 밤을 못 잤다던 시후는 수인의 탱글하고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던 중 소나무 숲에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가 확성기를 틀어 놓은 듯 크게 들려왔다.
“선배, 선배.”
소리를 들은 수인이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아지경에 빠진 시후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그제야 시후가 입술을 떼고 숨을 헐떡헐떡 쉬었다.
“전화. 전화 왔어요.”
“어? 이 미친. 누구.”
시후는 끝말을 삼키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누구예요? 최나리예요?”
어제와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아 화들짝 놀라며 수인은 덜렁 드러난 상체를 여미었다.
“어. 아니.”
아니라며 전화를 거절해 버리는 시후의 동작이 좀 수상했다. 그녀는 옷을 다독인 손으로 시후의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시후는 빼앗긴 휴대전화를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수인은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 불빛을 밝히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발신자 이름 이도희, 그것도 오늘만 부재중 전화 7통이 찍혀 있었다. 수인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시후는 다급한 듯 수인의 이름을 불렀다.
“수인아.”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시후와 달리 수인은 할 말이 없었다. 이도희가 애타게 찾는 예비 신랑과 소나무 숲에서 미친듯이 키스를 하고, 반쯤 벗겨진 속살을 내어주고 있던 자신이 비참해질 뿐이었다.
수인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도로를 향해 걸었다. 뒤따라 다급하게 쫓아온 시후가 할 말은 겨우 변명뿐 일듯 했다.
“수인아. 오해하는 건 아니지?”
“오해가 문제예요? 나를 봐요. 이런데 숨어서 남의 남자와 키스나 하고 있는 이런 나를 봐요.”
수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울한 감정이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분명 수치심이었다.
“왜 그렇게 말해? 남의 남자 아니고. 네 남자야.”
시후가 수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세웠다. 그리고 어깨를 돌려 마주 보고 섰다. 수인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어 시후는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격양되지 않으려 억지로 참아 내리고 시후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를 이대로 울게 하는 게 싫었다.
“수인아. 날 봐.”
“싫어요. 이러지 마.”
“수인아. 나 보라고.”
수인의 얼굴을 감싼 그의 손이 뜨거웠다. 수인은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눈을 보기 싫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눈물이 자꾸 쏟아져 나왔다.
“나 너한테 간다고 했잖아.”
“이게 우리 맘대로 된다고 생각해요?”
취기가 확 깨어버렸다.
현시후가 아무리 뚝심 있고, 고집 또한 센 남자라 하여도 집안 대 집안이 얽힌 결혼문제였다. 그저 평범한 집안의 결혼이 아니고 뉴스에 날 만한 집안들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수인과 생각이 달랐다. 남들에게는 든든한 뒷배로 여겨질 환경을 가진 건 맞지만 시후는 그 덕을 보며 살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제 의지로 살고 있었다.
“내 인생이고, 네 인생인데 우리 맘대로지. 왜 휘둘려?”
진심으로 말하는 시후였지만 듣는 수인은 그렇게 들을 수 없었다.
“우리만의 인생이라고요? 우리 아버지 지난주에도 고소당했어요. 제약회사가 아버지 자선의원을 상대로 부당 처방한다고요. 이게 누가 하는 걸까요? 정말 제약회사가 하는 걸까요?”
이런 일은 부지기수였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각종 의사협회에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환자를 독식한다며 비난의 총 공격이 자선의원, 김정수 원장에게 쏟아졌다.
이런 이슈들이 터질 때마다 자선의원에 후원금을 보내오던 후원자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때로는 기선대학병원에서 대대적으로 자선의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를 재치료하며 언론플레이를 해댔다. 열악한 의료 장비로 더 나쁜 결과를 환자에게 떠안게 했다며 의사로의 책임감까지 운운하기 일쑤였다.
그 선봉에 기선대학병원장 현진권이 있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런데 현진권의 외동아들 현시후가 자선의원 김정수 원장의 딸 김수인에게 미친듯이 빠져 있다? 거기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현시후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이건 수인에게 불리한 일이었고, 더 나아가 수인도, 수인의 아버지 김정수 원장도 불행할 일이었다.
“수인아. 우리 같이 해결하자. 응? 우리 같이.”
그때, 다시 한 번 시후의 전화가 울렸다. 수인은 제 손에 들려 있던 시후의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무슨 심술이 발동하였는지 전화 연결 버튼을 누르고 시후에게 건넸다.
낭랑하게 소나무 숲에 울리는 이도희의 목소리.
- 여보세요? 오빠!
시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러자 다시 울리는 전화, 수인이 시후의 손을 잡은 채 다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아이참. 시후 오빠.
또다시 끊어 버린 시후는 더는 참지 못한다는 듯 수인을 다그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현실이라고요. 현시후 씨가 끌어안고 키스하고 그래야 할 여자는 이 여자라고요. 제발 나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수인은 돌아섰다. 이런 말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