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토요일 일정이 끝났고, 함께 일했던 봉사자들에게 강원도 원장님이 융숭한 대접을 해주고 싶다며 바닷가 횟집으로 이끌었다.
“우와. 바닷가에서 바로 먹는 회, 너무 좋아요.”
나리가 애교를 살살 떨어대며 시후의 오른쪽에 바짝 다가섰다. 그때, 강원도 팀에서 합류했던 대학생 딸 은지도 시후의 왼쪽에 슬쩍 붙었다.
“선생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훅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시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쪼그만 키의 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넌 몇 살인데?”
어이가 없다는 표현이었는데 은지는 너무도 활짝 웃으며 대답을 하였다.
“전 23살이요. 선생님은요?”
나리보다 더 어리고 나리보다 더 당돌한 표정으로 시후의 턱밑까지 들이밀었다. 시후는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경우를 하루 이틀 겪는 건 아닌데 이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자들까지 집적거리니 그저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어린애들과 노닥거릴 여유가 없는 시후였다. 자꾸만 수인이 곁에 알짱거리는 진창욱도 신경 쓰이고, 수인이 얼굴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시선을 가리는 이 두 어린 애들 때문에 살짝 짜증이 일었다.
“야. 인마. 대학생이라며? 뭔 질문을 유치원생 같이 하고 있어? 내 나이 알아서 뭐하게?”
“치! 내 나이는 말했는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쫑알거리며 섣불리 시후를 놓아줄 것 같지 않은데 오른쪽에 있던 나리가 이번엔 혼자 비틀하더니 시후의 팔뚝을 꼭 잡았다.
“어머! 넘어질 뻔했네. 어머.”
나리가 잡았던 팔을 시후가 쓱 빼더니 반대로 그녀의 팔뚝을 힘주어 꽉 잡는 바람에 나리는 깜짝 놀랐다. 꽤 세게 잡았기에 아프기까지 했다.
그 꼴을 한 열 발짝 뒤에서 보고 있던 수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디를 가도 늘 저런 모양새이기는 했고 워낙 시후가 철벽남이기에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도 아는데,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같이 뛰어들어 자리다툼을 할 수도 없고, 시후에게 달라붙는 여자들의 연령이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기에 쓸데없이 혼자 비교도 되어 자괴감이 일었다.
갑자기 수인이 옆에서 걷고 있는 진창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쌤. 나 몇 살로 보여요?”
수인의 질문을 파악 중인 진창욱은 난처한 표정을 금세 감추고 성의껏 대답했다.
“과장님은 제 나이로 안 보여요. 지금 한 스물아홉쯤 보이죠.”
스물아홉이나 서른하나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분에 7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기에 수인의 나이 서른 하나였지만 제 동기들은 서른 둘, 완연하게 삼십 대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수인은 서른 살이라는 나이 대에 발을 슬쩍 걸쳤지만 아닌 척 하고 싶은데, 시후 양옆에 생기발랄한 20대 여자들을 보니 자신이 꽤 늙어 보였다.
“난 이십 대에 뭘 했을까.”
“예? 뭐. 공부 열심히 한 거 아니에요?”
진창욱은 수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수인은 옅은 한숨을 내어 쉬고는 넘실거리는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목적지인 횟집에 도착해서도 시후의 양옆에는 아리따운 아가씨 둘이서 쟁탈전이었다. 시후는 귀찮기도 하고 지금 이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김정수 원장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아쉬움 가득한 두 아가씨 중에 그래도 좀 더 패기 있는 은지가 냉큼 시후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은지가 이 테이블로 왔어?”
제 동기이자 친한 친구의 딸이니 김정수 원장은 은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삼촌. 저 있잖아요. 의료봉사에 저도 계속 끼워 주세요.”
“그럴래? 그러면 우리야 고맙지.”
김정수 원장이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은지는 의기양양해서는 한술 더 떴다.
“저 내년이면 임용고시 볼 때까지 시간 많아요.”
“요새 임용고시가 엄청 경쟁률도 세다고 하던데 자신 있어?”
교육대학을 다닌다는 은지는 배시시 웃으며 테이블 위에 수저를 열심히 세팅했다. 물론 시후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임이 보여서 그게 좀 어색하다 할까.
물론 어리고 발랄한 은지에게는 그런 부끄러움 따위는 없기에 시후의 얼굴이 닳아 버릴 지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푸짐하게 회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술잔이 채워졌다.
“오늘 다들 열심히 임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내일 하루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정수 원장이 선창을 했고,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그는 이 자리를 마련한 제 동기를 치켜세웠다.
“자자. 한마디 해봐.”
“그럴까?”
멍석을 깔아주니 강원도 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둘레둘레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입을 뗐다.
“나는 겨우 이렇게 1년에 한두 번 하는 것도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든 일이 생기더군요. 벌써 10년이 넘도록 자선의원 원장 자리 지키는 이 친구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친구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이 친구를 지켜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김정수 원장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시고, 많이 어려울 텐데 힘을 많이 못 보태줘서 미안하고.”
이 대목에서 중년의 남자는 친구에 대한 미안함으로 목이 메었다. 함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고, 환자에게 도움을 주며 살자 함께 다짐을 하였지만 진정한 의사의 길을 가고 있는 건 김정수 원장이라고 생각했다.
자선의원에 다 쏟아 부은탓에 모아둔 재산도 없을 테고, 이리저리 구걸하듯 지원을 받으러 다니는 고단한 신세겠지만 김정수 원장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부자처럼 보였다.
“아. 아. 이 친구. 벌써 취했나? 아. 안 되겠어. 일어난 김에 노래나 한 자락 해보라고. 나 감동 먹인 벌이야.”
김정수 원장의 그 말에 모두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 댔다. 몹시 당황하는 듯하던 중년의 남자가 구수한 트로트 자락을 뽑았고 모두가 그의 음치 같은 노래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스타의 공연장에 온 것 같은 리액션을 마구 해주었다. 살아가는 건 사람들과 동행하는 일인 것 같았다. 함께 일하고 함께 웃는 삶. 수인은 문든 그런 생각에 빠져들면서 대각선쯤에 보이는 시후와 눈을 맞추었다.
다 같이 손뼉을 치고 흥겨워하는데 딱 둘이 마주친 시선, 시후의 눈은 어느새 둥글게 휘어져 딱 반할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남자, 정말 사람 미치게 한다. 이 타이밍에 저 눈빛,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진짜 나 모르겠다며 저 남자 손을 덥석 잡고 그냥 동행해 버리고 싶다.’
수인은 그런 생각을 술과 함께 꿀꺽 삼켰다.
한참 분위기는 뜨겁고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저, 화장실 좀.”
수인은 연신 들이켰던 맥주 때문에 화장실이 급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횟집을 나왔다.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가게 주인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고장이 나서요. 공중화장실까지 가셔야 해요. 저짝~”
고무장갑을 낀 채 팔을 쭉 뽑아 가리킨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해안 쪽이었다.
“멀어요?”
“그렇게 안 멀어요. 휴지 가져가세요.”
수인은 친절하게 손에 쥐어 주는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당황했다. 휴지를 둘둘 말아 바지에 꽂고 수인은 가게 주인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일단 걸었다. 휴양지나 관광지가 아닌 어촌마을이었기에 가로등 불빛은 뜨문뜨문 있었고, 해풍을 맞으며 자란 소나무는 꽤 우거져 보였다.
얼마 안 걸린다더니 도로를 따라 걷는데 화장실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되돌아가기에는 화장실이 급했고, 일단 묵직해져 오는 아랫배에 힘 조절을 해가며 다시 걸었다. 그때, 언제 뒤따라왔는지 시후가 숨을 헉헉거리며 다가왔다.
“엄마야. 깜짝이야.”
“누가 잡아가면 어쩌려고 혼가 가고 있어? 날 부르지.”
시후가 얼른 그녀를 따라잡았다. 수인은 시후의 등장이 너무 반갑기는 한데 이곳, 이 시간에 이 남자만큼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추종자들은 어쩌고 나왔어요?”
수인은 은근히 눈을 내리깔고 비아냥거렸다. 이게 어제오늘 겪었던 일은 아니지만 시후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경이 쓰였던지 얼른 대꾸했다.
“이놈의 인기 때문에 피곤하다.”
“즐기는 거 같던데?”
괜히 우쭐하듯 말하는 시후를 봐주기 싫어서 수인이 쓱 일침을 가했다. 그러자 시후가 난색을 표하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즐긴다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 피해 다니는 거 못 봤어?”
“못 봤어요. 아주 양옆에 끼고 있던데 뭘?”
시후가 변명을 하면 할수록 수인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방방 뛰는 시후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 너 진짜 사람 이상하게 만들래? 내 속 다 뒤집어 보여줘?”
“그래요. 보여줘. 치. 양옆에 아리따운 아가씨들과 즐거이 대화하는 거 내 두 눈으로 다 봤는데 뭔 시치미?”
이런 유의 말다툼이라면 수인 인생의 절반이라는 시간 동안 친오빠와 쌓아온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주고받는 유치찬란 대화가 또 은근히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 법이라 시후는 수인을 확 끌어당겨 어깨를 둘렀다.
“에효. 에효. 김수인. 질투 고맙다.”
“질투 아닌데요?”
아니라고 발뺌은 했지만 어깨를 두르고 걷는 이 순간 속사포처럼 나와야 하는 말이 딱 막혔다. 수인은 슬쩍 시후의 허리를 팔꿈치로 밀어내었다.
“스킨십 금지라고 했는데!”
“어 괜찮아. 나 술 취했고, 원래 술 취한 남자는 개와 동급이야.”
개라고 하기엔 너무 덩치가 크고 너무 잘생긴 게 문제지. 수인은 제 스스로 개와 동급이라는 시후의 말에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 아, 안 되는데. 아.”
웃다가 오금이 저린 사람 마냥 몸을 웅크리는 수인을 시후가 붙잡았다.
“왜?”
“쉬 마려운데.”
“아. 김수인. 넌 내 앞에서 너무 자연인 아니냐?”
말은 그리해도 화장실을 찾아 긴 목을 쭉 빼는 시후였다. 아련한 불빛이 보이는 화장실이 저 앞에 보이기는 했다. 그러자 시후가 이번엔 수인을 보쌈하듯 어깨에 훌쩍 둘러매었다.
“엄마야, 왜 이래요?”
“블레러얼 힘 꽉 줘. 김수인!”
“어머. 미쳤어. 미쳤어. 내려줘요.”
방광에 힘 꽉 주라더니 시후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 입으로 술에 취한 남자는 개와 동급이라더니 만월이 둥근 오늘, 이 남자는 마치 늑대인간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힘이 넘쳐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