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인근 지역에 거주 중인 이번 봉사를 주최했던 원장팀이 도착하였고, 그분들이 대부분의 의료 장비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세팅을 도와주면 되었다.
어젯밤 막걸리 한 항아리를 비워대느라 피곤할 만도 한데 다들 재빠른 동작으로 의료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삐 돌아가느라 두루뭉술 넘어가서 좋아라 하고 있는데, 밤사이 연락이 안 돼 걱정했던 진창욱이 수인에게 다가왔다. 진창욱은 꽤 굳은 얼굴로 수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수인은 얼른 시선을 피해 이것저것 챙기는 손길이 바쁜척했다.
“네? 아니요. 가긴 어딜 가요. 술에 취해서 일찍 잤어요.”
자긴 뭘 잤담. 고양이에 홀려서. 그러고 보니 고양이라는 동물이 참으로 영물이긴 했다. 어떻게 그 바닷가에 있는 줄 알고 자신을 그리 유인했던 건지. 말도 안 되게 이어 붙이고는 있지만 어젯밤 일로 수인도 시후도 기분이 좋아진 건 틀림없었다.
아직 마음에 쇳덩이를 단 듯 무거웠지만 적어도 선배 후배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억지 합의를 보고 나니 한결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랬어요? 전화 여러 번 했는데.”
진창욱도 수액들을 목록과 비교해보며 계속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 배터리가 없었나 봐요.”
어쩜 못된 아이처럼 거짓말도 술술 나와서 수인은 더는 마주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질투의 화신이자 그 덕분에 전투력도 강인해지는 북극곰 시후가 어느새 옆에 와 서 있었다. 수인은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빨리 좀 합시다. 벌써 대기 줄이 십 리나 되는데.”
수인은 풋, 하고 웃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후의 문자를 받아보고 배꼽을 잡았다.
『네 제안에 동의해. 선배, 후배 좋다. 대신 나 질투의 화신인 선배고, 그 때문에 전투력이 강해지는 선배라서 그건 좀 조심하자. 유노댓?』
그는 지금 질투의 화신이자 전투력도 강해진 선배의 얼굴로 지금 수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빨리 합시다. 저는 아버지 진료 준비 좀 도와드리고 올게요.”
시후가 싫다고 하니 조심하는 수밖에, 수인 역시도 시후 옆에 꼭 붙어 다니는 나리가 싫으니 이 감정은 서로 맞먹는 것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진창욱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미 마을 회관에는 한 달 전부터 광고를 한 덕분에 꽤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김정수 원장이 박 간호사와 짝을 맞추어 내과 쪽을 맡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 은근슬쩍 마음대로 파트너가 정해지려 하는 순간 시후가 교통정리를 하고 나섰다.
“진창욱 간호사하고 나하고 외과 1 맡고, 김수인 과장하고 최나리 간호사가 외과 2 맡자. 오케이?”
공포처럼 말을 해버리는 시후를 진창욱이 눈썹을 우그러트리고 쳐다보았다.
“예? 왜요? 제가 과장님 파트너 할 건데.”
역시 나리는 신세대답게 제 의견을 아주 정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후는 일언 지하에 거절했다.
“여자 환자는 외과 2로 몰아. 그게 환자들도 편할 거야. 산부인과 관련 환자도 있을 거니까.”
그렇게 쫙 잘라버리니 할 말이 없어질 것 같았다. 수인은 시후의 검은 흑심이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참고 동의했다.
“그래요. 그게 좋겠다. 갑시다. 최나리 쌤.”
무언가 찝찝한 표정의 진창욱에, 대놓고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최나리였지만 이미 긴 줄로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때문에도 더는 왈가불가할 수 없었다. 억지로 나눠진 파트너들과 각자의 자리로 찾아들었다.
시후는 진료 책상에 앉아서 진료 시작 전 수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잘했지?』
시후가 보낸 문자를 보고 수인은 피식 웃었다. 덩치는 북극곰 같은 시후가 그저 귀여운 강아지 같이 느껴지는 건 마법이었던가. 수인은 뾰로통한 얼굴로 진료 준비를 하고있는 나리를 보며 조심스레 문자를 보냈다.
『여차하면 파트너 바꿔요.』
시후가 문자를 확인하고 책상 위에 소리 나게 엎어 버리는 게 보였다. 수인은 일단 웃음이 나는 데 억지로 참고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네 번째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함께 온 여자 환자의 상태가 좋아 보이질 않았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는 질문에도 자꾸만 머뭇거리기만 해서 수인이 안쪽 커튼이 쳐진 베드로 데려갔다.
“어디가 불편한지 말씀을 하세요.”
“성생님. 우리 며늘애가 자꾸 여가 아프다는데 도무지 병원을 가자케도 안가고, 아들놈도 그냥 냅두라고만 하고. 애는 기어다녔쌌고. 내 답답해서 이리 끌고 왔소.”
쪼글쪼글 할머니는 풍이 와서 떨리는 손으로 며느리라고 했던 여자의 아랫배 쪽을 가리켰다. 수인은 풍성한 치마를 입기는 하였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이상하고 들어올 때부터 식은땀을 흘려대는 여자의 모습이 이상했다.
“애도 들어선 게 아니라는데 왜 이런 거래요? 성생님.”
할머니의 근심이 깊어 보였고, 아기 이야기에 며느리라는 환자의 얼굴빛이 더 어둡게 느껴졌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이기에 수인은 할머니와 환자를 떼어 놓으려 했다.
“할머니, 잠깐 나가 계세요. 제가 며느리 진료 한번 해볼게요.”
“내 여 앞에 있을게요.”
할머니를 내보내고도 며느리라는 여자가 도통 입을 열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저, 성함이 이지은 씨?”
“네.”
겨우 대답하는 목소리에 불안이 잔뜩 느껴졌다. 대체 이 환자는 어디가 아프기에 아프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할까. 수인은 친절이라면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의료진이기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을 해보세요.”
무언가 통증이 밀려오는지 환자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더니 땀이 얼굴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떨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려 했는데, 그녀가 몸서리치듯 떨어대기에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많이 불편하세요?”
“저. 사실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또 통증이 밀려오는지 억지로 참아보더니 이내 덜덜 떨어댔다. 심각한 통증인 것 같아 침대로 일단 그녀를 보내려 했는데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수인의 손을 뿌리쳤다.
“좀 누워보시겠어요? 아랫배가 아프세요?”
“저. 트랜스……젠더예요.”
수인은 속으로 놀랐지만 일부러 태연하게 그녀를 대했다.
“네.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게요.”
놀라지 않는 수인의 태도에 마음이 좀 열렸던지 환자는 주저하며 통이 풍성한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겉보기에도 모양이 너무 이상하고 비정상적이었다. 마치 아랫부분이 통째로 빠진 모양 같았다.
“이렇게 되신 게 언제부터였어요?”
“올 봄부터요.”
벌써 가을에 접어 들어가는 계절이니 아픈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수술은 언제 하신 거예요?”
“수술한 지는 3 년 되었어요. 한국 말고요.”
외국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부작용이 발생한 것 같았다. 수인도 이런 경우는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수술 케이스로 공부를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탈출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없던 질을 인위적으로 만들다 보니 그러했고 수술 경험이 많지 않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복막조직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질이 제 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이물질로 인식되어 밀려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환자분. 제일 불편하신 건 통증입니까?”
“아프기도 한데, 자꾸 오줌이 다른 데로 세서요. 근데 저희 어머니께는 말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어머니는 모르세요.”
간절한 눈빛이었다.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남편 분은 아시는 거죠?”
“네. 알고 있어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데, 돈이 많이 드니까.”
뒷말은 생략했지만 알 것 같았다. 시어머니는 해녀라고 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물질을 해서 세 식구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배를 타기는 했는데 워낙 배 타는 걸 무서워해서 자주는 못 탄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했다.
지금 당장 임시로 차려진 이곳에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치료는 없었다. 다만 진통제를 처방해주었고, 의뢰서를 하나 적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오전 진료가 끝났다. 동네 부녀회에서 솜씨를 발휘하여 강원도 토속 음식인 감자옹심이를 끓여 내왔다. 쫀득한 식감에 떡처럼 맛이 좋았고, 감자를 듬뿍 갈아 넣어 끓인 국물이 기가 막혔다. 다들 웃는 얼굴로 점심을 먹고, 수인이 슬그머니 시후에게 다가섰다. 믹스커피를 한잔씩 들고 섰는데, 김정수 원장까지 합류를 하였다.
“저기 있잖아요. 오전에 내 환자 중에 트랜스젠더가 있었어요.”
“그래?”
시후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미 김정수 원장에게 의논을 마친 일이라 수인은 시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분 재수술을 자선의원에서 진행할까 하는데 선배 의견은 어때요? 선배 경험 있으시잖아요.”
김정수 원장은 수인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다 쓱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후를 압박해왔다.
“너무 부담 갖지는 말게. 쉬운 수술이 아니라는 거 우리 다 알고 있기는 해.”
자꾸 부담은 갖지 말라며 말은 그리 하였다.
“두 번 다 어시스트만 했습니다.”
“그래. 너무 부담 갖지는 마. 그분이 돈이 없는 게 참 흠이기는 해.”
뱅뱅 돌려가며 자꾸 추임새를 넣는 김정수 원장의 뜻이 보이는 것 같아서 시후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시후도 사실 그리 경험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수인과 김정수 원장을 번갈아 보았다.
“유린이 세서 피부 괴사도 좀 일어나고 있어서요.”
결국 수인이 결정했다면 시후야 죽어도 살아도 오케이지만 그는 자신의 사인을 바라는 수인의 그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시후는 김정수 원장이 보지 못하는 사이 수인에게 윙크를 날렸다.
“네. 시간 내 보겠습니다.”
“고마워 현 선생.”
“아닙니다. 어차피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후는 고맙다고 악수를 청하는 김정수 원장의 손을 잡고 웃어 보였다. 김정수 원장의 이런 편견 없는 태도가 너무 좋았다.
돈도 없고, 남에게 드러낼 수도 없는 사람들을 전부 똑같이 대할 수 있는 이 넉넉한 태도, 시후가 김정수 원장에게 반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