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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34)화 (34/88)

34화

마지막으로 무딘 시선 하나가 날아와 시후의 얼굴에 꽂혔다. 김정수 원장이 꽤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나도 모르는 내 딸의 연애사를 알고 있어? 말해봐. 궁금하다.”

“예? 뭐. 원장님 아시는 그대롭니다.”

알쏭달쏭하게 패스를 해버리고 시후는 만족한 듯 웃어 보였다. 다들 그 말이 뭔가 궁금해서 수인과 김정수 원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지나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에 수인은 현기증이 일었다. 

“그래요. 맞아요. 나 모쏠. 됐죠?”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수인이 자폭하고 술 항아리에 고개를 처박을 듯 술을 퍼 올렸다.

“에이.”

“내 그럴 줄 알았다.”

김정수 원장과 박 간호사, 양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탄식을 내놓았지만, 진창욱과 나리의 표정은 영 색깔부터가 달랐다. 진창욱은 뭘 기대하는지 말랑한 복숭아빛으로 변했고, 최나리의 표정은 새파란 바닷물에 빠졌다 나온 뜨악한 표정이었다.

“말도 안 돼.”

나리가 중얼거렸다. 서른이 넘은 여자가 아직 모쏠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나리는 술잔을 들이마시다가 시후를 얼핏 보았다. 왜 자꾸 혼자 웃고 있는지 저 웃음의 저의가 대체 뭘까 매우 궁금했다.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던 막걸리 한 항아리가 거의 비워졌다. 다들 고주망태가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기분도 좋아졌고, 내일부터 이틀을 함께 일할 사람들로서 조금이나마 서로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어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 같았다. 

그러나 수인은 꽤 들이켰던 막걸리가 뒤늦게 발동을 거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을 자면 속이 매우 불편할 것 같아서 펜션 앞마당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만월이었던 달이 아직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미소 짓던 수인이 무언가 움직임에 놀라 시선을 쫓았다. 

“어? 고양아~”

집고양이인지 길고양인지 모르지만 어느 녀석 하나가 수인을 보고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그러려니 하면 될 일인데 술이라는 기폭제가 들어가 있어 그런지 수인은 고양이를 따라나섰다. 한가한 해안도로가 바로 이어져 있고, 저 멀리 방파제, 등대하며 멋진 풍경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수인은 고양이를 놓쳤지만 이왕 나온 길에 바닷바람을 쐬며 술을 깨고 싶었다. 잘 닦인 해안도로는 다니는 차가 없고, 드문드문 집들의 불빛만 보일 뿐 고요했다. 저 멀리 바다에는 오징어잡이 배인지 깜깜한 바다 위 별이 떨어진 것처럼 예뻐 보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자신, 고스란히 셋밖에 없는 세상처럼 느껴졌다. 모래사장이 쭉 이어지기에 수인은 모래를 좀 밟아보고자 해안도로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자연인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한 10분쯤 걸었을까. 앞쪽에서 검은 물체가 서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수인은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앞에 누군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걷다가 멈추어섰다. 그림자에선 빨간 불빛이 뻐끔거렸다. 그림자가 이번엔 수인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것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화들짝 놀란 수인이 외마디를 지르며 풀썩 주저앉았다.

“꺅!”

“김수인.”

주저앉아 위를 쳐다보니 시후가 수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원망하듯 눈을 흘기며 일어나 시후의 가슴팍을 냅다 쳤다.

“놀랐잖아요.”

“놀랐어?”

“그럼 안 놀래요?”

“겁도 많은 게 이런데 혼자 왜 걸어?”

달빛에 비춰보니 시후가 맞았다. 그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에 수인이 째려보았다.

“담배 계속 피울 거예요?”

“어? 어. 아니.”

계속 피울 거냐는 말에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수인은 시후가 얄미워 걷던 대로 다시 휘적거리며 모래를 밟고 걸었다. 시후는 얼른 수인을 따라잡고는 함께 걸었다.

“내가 담배 피워서 싫어?”

그가 피우는 담배의 의미를 알아서 더 그랬다. 그동안 그에게 닥쳤던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환자 때문에, 환자 보호자 때문에, 이리저리 사람에 상처받고 사람에 아파하며 사회생활을 해온 그였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일로 담배를 찾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수인은 시후가 피우는 담배에 좀 예민해졌다. 

“싫어요. 왜 담배를 피워? 왜? 나보라고? 나 때문에?”

더한 말도 하고 싶었으나 수인은 그만두었다. 이러다 행여 눈물이 터질까 싶어 기분이 착 가라앉아 버렸다.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피워. 미안해. 안 피울게.”

“싫어. 정말 싫어 죽겠어.”

화를 내려던 건 아닌데, 화가 나와 버렸다. 

“미안해. 담배 다신 안 펴. 정말이야. 약속해.”

수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과를 받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납작 엎드리듯 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아련했는지 보는 시후의 가슴을 방망이질 치게 했다. 억지로 눌렀던 심장이 다시금 펄떡 뛰기에 시후는 수인의 손을 잡았다. 가시 돋친 장미처럼 굴었던 수인이 웬일인지 손을 빼내지 않았다. 

“수인아.”

“네?”

반짝이는 눈으로, 촉촉한 입술로 대답하는 수인에게 달려들고 싶은 시후는 지금 마음이 활화산처럼 펑펑 터지기 직전이었다. 

“아직 생각 중이야?”

“무슨 생각이요?”

시후는 수인이 이대로 달아날까 봐 거리를 억지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멈춰만 있지 않고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뒤집어 생각하고, 거꾸로 생각해보아도 정답은 늘 하나였다. 

수인을 놓을 수 없다는 그 생각. 수인도 그사이에 생각을 해주었을 거라 믿기에 지금 물어보고 싶었다.

“우리 말이야.”

“치!”

“왜?”

수인이 술주정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가슴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시후였다. 긍정이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51%라도 좋았다. 자신이 노력할 기회만이라도 준다면 시후는 기쁠 것 같았다.

“선배는 왜 바보 같아요?”

시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피식 웃었다. 바보 맞으니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바보 같다, 정말. 내가 그렇게 좋아요?”

“응. 너무 좋아.”

떨리는 심정으로 재빨리 대답한 시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인을 돌려세웠다.

“넌 내가 안 좋아?”

마주 서 있는데, 고개만 들면 되는데 술기운이 도는데도 수인은 고개를 들어 시후를 보는 게 두려웠다. 마음 다 들킬 것 같고, 나도 역시 그렇다고 시인하게 될까 봐 주저했다. 그런 수인에게 시후는 다시 물었다.

“수인아. 나 이제 안 좋아해?”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까지 좋아하는 마음을 아무리 밀어내고 부서트리고 싶어도 그게 잘 안되니 수인도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끝을 맞추어 보아도 현시후와 김수인이 맞을 수 없다는 데이터뿐, 만에 하나라는 기적은 바라지 않았다. 마음이 냉정할 수 있는 숫자라면 좋을 텐데.

“수인아. 나 좀 봐.”

“보면요?”

수인은 시후의 가슴팍을 뚫어지게 볼뿐 차마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본다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인이 손을 빼내지도 않고 마주 세워뒀던 대로 있는지라 시후는 용기를 내어 수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수인의 두 뺨을 감싸 잡았다. 작고 예쁜 얼굴, 얼마나 만져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는지 이 자리에서 다 말하고 싶은 시후였다. 

시후는 조심스레 손목에 힘을 줘가며 수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아주 똑바로, 한 치의 각도도 어긋나지 않게 딱 바라보고 싶었다.

“수인아.”

시후가 수인의 이름을 불러 놓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었다. 수인도 긴장을 하여 손에 땀이 배어 나오는 그런 상태였다.

“수인아. 나 너한테 가고 싶어.”

“나한테 오면 뭐? 뭘 어쩌자고 그래요?”

“가게 해줘. 나 너한테 갈래. 가고 싶어 미치겠고.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다는 말까지 하지 말지 그랬어. 수인도 미칠 것 같았다. 이 남자의 한 달을 지켜보았다. 금방이라도 일하다 과로로 쓰러졌다 해도 하나 이상하지 않았다.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왜 저리 몸을 혹사하냐고 말려대느라 애를 쓸 지경이었다. 마치 시련을 당한 사람처럼 해쓱한 얼굴로 진료실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런 시후를 두고 보던 수인도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이건 불공평했다. 현시후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일이었다. 수인이 현시후를 버리고 결혼하려던 게 아니었다. 

이 남자 집안에서 그 잘난 이도희와 현시후를 정해져 있던 대로 결혼을 시키려는 일이었다. 

사실과는 정반대로 이 남자 하는 짓이 딱 수인에게 차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왜 이 남자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이 남자는 이리도 조금씩 죽어가는 것 같은지, 대체 자신에게 어쩌라고 자꾸만 이러는지, 수인도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어쩌자고요? 선배 가진 거 다 버리고, 부모님 다 버리고 나 하나 선택하라고 해요? 그러라고 하면 그럴 거예요?”

“응.”

정말 미치겠다. 왜 이 남자 현시후, 그렇게 똑똑하고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찔러도 찔러도 꿈쩍도 안 하던 철벽남 현시후가 이리 바보가 된 걸까. 

가진 걸 다 버리고라도 온다는 그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인은 억지로 감정을 참았다. 미쳤다. 돌았다. 진짜 미치고 돌은 건 현시후였다. 

“뭐가 응이야. 미쳤어요?”

“나 너한테 갈래. 가고 싶다 수인아. 나 받아주면 안 되겠어? 나 받아줘.”

이렇게 막무가내 불도저였나. 이 남자가 이리도 계산할 줄 모르는 바보 멍충이었나. 수인은 눈을 감아버렸다. 미치겠다. 아무리 머리로 궁리를 해보아도 이 남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고 속수무책이 되어 버렸다. 마치 자석 앞에 코드를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칩 같았다. 

눈을 감아버린 수인의 입술에 시후의 손가락 끝이 다가와 천천히 입술을 어루만졌다. 입술은 축축했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시후는 들어 올려진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여 다가갔다. 

그의 숨이 수인의 얼굴에 홀연히 퍼져나갔다. 시후의 간절함이 담긴 키스는 부드럽고 섬세했다. 입술 겉에서 시작한 키스는 점점 안으로 깊어졌다. 깊어진 키스는 수인의 입술 전체를 집어삼키듯 빠르고 속도감 있게 그녀를 밀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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