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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33)화 (33/88)

33화

수인은 일부러 음악을 켜 버렸다. 시후의 휴대전화와 연결된 음악 파일에서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시후는 애써 어두워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듯 마음을 다스리는 듯 그렇게 빨리 목적지에 닿기를 기다렸다. 

달이 아주 만월인 듯 환하게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수인은 네비게이션 대로 어촌마을로 접어들었다. 부스스 잠에서 깬 나리가 기지개를 켜며 밖을 내다보았다.

“다 왔어요?”

“거의 다 온 것 같네요.”

“와! 바다예요?”

나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밤바다의 시원하고 짭조름한 바람이 차 안으로 가득 몰려 들어왔다. 살짝 잠이 들었던 시후가 그 때문에 잠이 깨어 일어났다. 간신히 잠이 든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던 수인은 성질이 좀 났다. 

그러나 이미 도착 직전인데 더 자게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까 어쩔 수 없기는 했다. 숙박 장소로 알려준 곳은 이름은 파라다이스 펜션인데 아무리 보아도 파라다이스 같지도 펜션 같지도 않았다. 80년대 오래된 여관에 바다와 어울리는 민트색 색칠만 한 것 같은 분위기의 숙소 앞에 차를 주차했다. 

주차장에는 자선 의원 병원차가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차 소리에 수인의 아버지 김정수 원장과 방사선사 양 선생이 나와서 이들을 반겨주었다. 

“어서 와라. 어서 와.”

“아버지. 양쌤 안녕하세요.”

수인은 얼른 아버지 김정수의 손을 잡았다. 김정수는 딸과 잡았던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시후의 손도 잡았다.

“어서 와. 길이 멀었지?”

“아닙니다. 수인이가 운전을 해서 전 편하게 왔어요.”

시후는 김정수를, 그리고 수인을 쳐다보며 웃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짐을 챙겨 들었다.

“저희 여기 1층은 쓰기로 했어요. 빈방이 저기 끝부터 8호, 7호, 이렇게 2방 있으니까 딱 남녀로 나누면 되겠네요.”

의료봉사를 나오면 총무 겸 모든 살림살이를 방사선사 양쌤이 자처했다. 양쌤의 지시에 따라 서로를 쳐다보던 네 사람은 성별에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이런 데는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까칠하게 코를 킁킁거리며 나리가 방 구경을 먼저 나섰다. 똑같은 방이라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나리가 먼저 7호로 냉큼 들어섰다. 

“그럼, 선배하고 진창욱쌤이 8호 쓰시면 되겠네요.”

수인의 말에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각자 나눠 들어갔던 사람들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는 동안 수인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제일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김정수 원장의 방이 임시 베이스캠프였기에 들여다보던 수인이 박 간호사에게 인사를 했다. 

“박쌤, 제가 뭐 도와드려요?”

먹이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자선 의원 박 간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보따리를 내놓았다.

“안 그래도 여기 펜션 주인 할머니께서 막걸리를 항아리 채로 주셨어.”

인심도 넉넉하기도 하지, 정말 항아리 가득 뽀얀 막걸리가 보였다. 수인은 괜히 웃음이 났다. 의대생일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런 외지로 의료봉사를 나오게 되면 아직 살아있는 인간미를 이렇게 느끼곤 하였다.

“주인 할머니 통 크시다.”

“이거 볼래? 이건 더 어마어마해.”

커다란 대나무 광주리에 잔칫날에나 쓸 만큼인 부침개가 그득 담겨 있었다. 

“이거 먹어야지, 어떡해.”

박 간호사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기에 수인도 따라 웃었다.

“그럼요. 먹어야지 어떡해. 할머니가 주셨는데. 그죠?”

“얼른 다른 쌤들 오라고 해.”

수인은 어깨를 들썩여 보이며 복도로 나갔다. 

환영의 의미로 마련해 주신 어른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엄밀히 하자면 의료봉사는 내일 오전 9시부터이기에 낯선 곳에 온 청춘들은 일단 친목의 자리가 필요했다.

“어서들 오세요.”

그리하여 7명이 모여 앉은 베이스캠프에 놓인 술 항아리에서 끝도 없이 막걸리가 퍼 올려졌다. 

“아우, 진하다. 이거 수제 막걸리라 그런지 엄청 진하네.”

박 간호사는 두 잔에 벌써 얼굴이 빨개져서는 맛있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리가 톡 껴들었다.

“박쌤은 그럼 완전 왕 선배님이시네요?”

“그렇겠지? 간호사 생활만 40년째니까.”

박 간호사보다 그의 남편 양쌤이 더 우쭐해진 어깨로 대답을 하였다.

“두 분, 볼 때마다 잉꼬부부 같으세요.”

수인이 거들었다. 그러자 양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는 우리 박태순 씨 없음 못살지.”

“두 분 결혼하신 지 얼마나 되신 거예요?”

진창욱이 김치부침개를 그득 배어 물으며 물었다. 박 간호사와 양쌤이 얼굴을 마주 보고 피시식 웃어 보이더니 양쌤이 먼저 대답했다.

“우리. 45년째지.”

“에? 박쌤 64살이시라면서요?”

나리가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환갑을 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활기차 보이는 데다 45년째 결혼생활을 한다는 게 다들 놀랍기는 했다.

“실례지만 선생님, 언제 결혼하신 겁니까?”

진창욱마저 놀라며 질문을 하고 나섰다. 계산상으로는 20 살도 안 되어 결혼한 게 분명하니 더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18살에 했지. 둘 다 뭣도 모를 때.”

대답을 해놓고도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박 간호사는 입을 가리고 호호거렸다. 

“와! 두 분 대단하시다. 그렇게 일찍 결혼을 하셨다고요? 고삐리 아니셨어요?”

나리의 표현에 다들 술을 뿜을 듯 웃어댔다. 그 나이라면 통상 고등학생이 맞을 테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세대와 윗세대는 좀 다른 것도 많으니 뭐가 옳고 뭐가 틀리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 우리 사연이 좀 복잡해. 그리고 그땐 그렇게 결혼 일찍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 시후는 은근히 이 둘이 부러웠다. 어떻게 그리 일찍 인연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빨리 서로를 알아보고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시후의 나이 벌써 서른하고도 넷, 열여덟에 결혼을 한 저 두 사람에 비해 배로 늦어진 지금, 백배 천배 더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살아도 따라잡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슬그머니 대각선에 앉은 수인을 쳐다보았다. 

그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수인은 왜 몰라볼까. 시후는 이제 확인을 넘어 확신이 들었다.

“최 간호사 무척 발랄하네. 마치 우리 며느리같이.”

김정수가 발랄하게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있는 나리를 향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나리는 헤헤거리며 웃었다.

“원장님도 벌써 며느리가 있으세요?”

“그렇지. 나 손자도 있는데. 2살.”

김정수는 마치 손자가 앞에 있는 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수인은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는 늘 환자가 먼저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친오빠 수열이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을 때도 아버지는 그저 좋다고만 하셨지 이렇게 남들 앞에서 자랑하시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나저나 우리 김수인 선생님도 얼른 결혼시켜야 우리 원장님이 두 다리 뻗으실 텐데.”

박 간호사가 배시시 웃으며 수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수인은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제게로 오자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수인만큼이나 당황한 남자가 적어도 이 자리에 둘이 되었다. 

“연애도 좀 하고 그러고 있는 거야?”

하도 오래 봐온 박 간호사라 엄마나 이모처럼 수인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수인은 얼른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어 쭉 들이켰다. 할 말이 없다는 표현인데 박쌤도 아버지 김정수도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 잔 더 줘? 그래야 말 할 거야?”

박 간호사가 얼른 한잔 가득 따라 주었다. 난처해진 수인이 엉뚱한 소리로 당혹스러운 이 순간을 모면하려고 했다.

“내일 몇 시에 나 원장님 오신 대요?”

“아. 웬 딴소리야. 그분이야 9시 되면 딱 오시겠지. 김수인. 아직도 모태쏠로야?”

박 간호사가 술이 취해 그런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 소리에 나리가 또 툭 끼어들었다.

“모태쏠로요? 왜요? 왜? 아니 김 과장님 외모에 말도 안 돼. 뻥!”

“진짜 모태쏠로에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진창욱마저 놀라서 2년 동안 알고 지냈던 수인과의 이야기를 다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아. 아닙니다. 모태쏠로라니요. 요새 그런 모지리가 있나요?”

수인은 냉큼 얼버무리고 제 앞에 놓인 그득한 술잔을 또 후루룩 마셔 비워냈다. 양쌤도 이 상황이 재미난 지 끼어들었다.

“수인이 그럼 만나던 사람이 몰래 있었는가 봐요. 원장님.”

“그랬어? 나 개방적인 아버지인데 왜 말을 안 했어? 이거 섭섭하다?”

섭섭하다니, 지금까지 수인이 모태쏠로였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시후는 막걸리와 함께 그 말을 꾹 눌러 내렸다. 

“진짜예요? 그 천연기념물 같은 모쏠이예요? 네?”

아주 턱밑까지 진격해 온 나리 때문에 수인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니라니까요. 나 만나던 남자 있었어.”

“있었어요?”

진창욱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사람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이 모든 궁금증의 여세를 쥐고 있는 시후는 그저 또 한잔 막걸리를 들이마셨다. 있었을 리가 없다. 왜냐면, 시후가 수인의 첫 남자인 건 둘만 아는 비밀이니까. 

플라토닉 러브를 했건 뭘 했건 그런 상대가 있었으면 어떠랴. 수인을 품에 안은 첫 남자는 변함없이 현시후인데. 시후는 한잔 들이마시고 스르륵 웃음이 나서 겨우 웃음을 참았다. 그러다가 김정수 원장의 눈에 딱 걸렸다.

“현시후. 왜 웃는데? 내 딸이 모쏠이라니까 그게 웃겨?”

“네? 아. 아닙니다. 제 후배잖아요. 제가 수인이 연애사를 다 알아서.”

날카로운 시선이 무려 세 개나 날아와 시후의 얼굴에 꽂혔다. 첫 번째 시선은 김수인이었다. 뭘 말하든 무엇이든 간에 위험 수준이 될 것 같아 불안을 동반한 반 협박성 시선이었다. 

두 번째 시선은 진창욱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근무하며 수인에 대한 좋은 감정을 차근차근 키우던 남자로서 시후라는 수컷은 매우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지금 이런 예민한 사안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수인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듯한 그 발언 자체에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 번째 시선은 최나리였다. 이제 의료원에 입사한 지 두어 달이었지만 시후가 여친이 없다는 사실에 대놓고 작업 거는 여자 중 하나로서 이 사안은 연결검색어 같은 것이었다. 

끈질긴 인연의 고리로 늘 한 세트처럼 거론되는 김수인이 제일 큰 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리였기에 그 시선이 아주 예리하고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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