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32)화 (32/88)

32화

이번 봉사에 처음 참여하는 나리이기에 분위기를 모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그전에는 종종 함께 이동할 때면 거의 지정석 같은 분위기였다. 보통은 시후의 차량으로 움직이는데, 운전은 시후가 하고 조수석엔 수인이, 뒷자리엔 그날그날 참여하는 다른 분들이 앉았다. 

그런데 오늘 분위기는 나리가 주도하는 것 같았다. 딱히 정했다고 말하기도 우스워진 상황이라 진창욱은 피식 웃으며 뒷자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수인에게 타라고 사인을 주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시후의 얼굴표정이 굳어졌다. 

시후는 후진 기어를 넣고 천천히 후진을 하였다. 뭐 요새야 모니터 화면으로 주차라인이라던지 후방 카메라의 상황이 다 보이므로 멋진 어깨 근육과 팔뚝 근육을 자랑하며 후진할 일이 없지만, 나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노골적이었다. 

시후는 백미러를 보다가 눈이 마주친 나리를 피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강원도 의료봉사를 하기 위한 출발이 이루어졌다. 아직 고속도로 위에 안착하기도 전인데 나리가 조수석에서 수선을 떨어댔다.

“과장님, 우리 노래 들어요.”

“내 블루투스 연결된 건 클래식밖에 없는데.”

시후가 한 템포 느리게 시큰둥한 대답을 했다. 운전을 시작한 이래로 룸미러를 흘깃거리느라 운전에 집중이 안 될 지경이었다. 나리는 조수석에 앉은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려는 듯 이것저것 컨트롤러를 눌러댔다. 

“과장님, 제 휴대전화 연결하면 안 돼요? 내 거에는 노래 엄청 많은데.”

“주행 중에는 안 돼요.”

아주 쌀쌀맞은 말투는 아니었지만 기가 딱 꺾일 만도 할 것 같은데 나리는 포기하지 않고 연신 제 차처럼 조작을 해 댔다. 시후가 마음만 있었다면 다른 방법 다 동원해서 해줬을 테지만, 지금은 옆자리 나리가 문제가 아니고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수인과 진창욱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나리는 그러다가 라디오 버튼을 이미 누르고 말했다. 

“그냥 라디오 들을까요?”

마치 연인에게 말하듯 얼굴을 확 돌려 들이미는 통에 시후는 멈칫하고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네 사람 다 어색하게 앉아있기는 해서 나리가 라디오라도 틀지 않았더라면 숨이 막혀 누구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두 곡 정도 지나가고 있을 때 진창욱이 수인에게 슬며시 대화를 시도했다.

“저희 숙소에서 바닷가가 가깝데요.”

“네. 바다 바로 앞이라고 하더라고요.”

뭐 색다른 정보가 있는 대화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창욱은 또 한 번 말을 이었다.

“원장님 쪽은 출발하셨대요?”

꽤나 친근하게 물어보기에 수인은 대답에 앞서 운전 중인 시후의 뒤통수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가 아니긴 해도 그의 따가운 시선이 내내 느껴지기에 수인도 신경이 쓰였다. 

“이미 출발하셨어요.”

“아. 그렇구나. 저희 네 명, 원장님 쪽 세 명 그리고 강원도 원장님 쪽 네 명 이렇게 맞죠?”

한번 터진 입을 닫기 싫은지 다 아는 내용을 진창욱은 자꾸만 읊어댔다. 

수인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신나서 이야기를 할 마음이 없기도 했고, 이 어색한 공기가 수인은 답답했다.

그때, 진창욱이 가방에서 커피 캔을 꺼내 돌렸다. 

“나리 쌤. 이거 받아요.”

“어머. 커피!”

앞가슴이 출렁이도록 몸을 반쯤 돌려 나리가 커피를 받아들었다. 수인은 은근히 신경이 쓰여서 딱 짜증이 일어날 것 같았다. 시후에게도 관심을 끄겠다고 수천 번 수만 번 다짐을 하였다. 

시후가 몸을 혹사해 가며 일을 해도 어금니 꽉 깨물고 모른 척하며 지내자 다짐했던 수인이었다. 그런데 어리고 어여뿐 젊은 여자가 시후 옆자리에 앉아 저리 관능미를 줄줄 흘리고 있는 모습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게 했다. 수인은 진창욱에게 받아든 커피를 뚝 따서 벌컥 들이켰다. 

그때, 나리가 캔 커피를 따서 시후에게 들이밀었다.

“과장님, 여기요.”

“컵 홀더에 꽂아주세요.”

지금 당장 마시고 싶지도 않지만 나리에게 직접 받아 들기도 싫은 시후가 꽤 차갑게 말했다.

“그럼 여기 놓을 테니 드세요.”

대답도 생략하고 시후는 룸미러로 수인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저 표정은 화가 난 것 같은데 분명 화를 낼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진창욱과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누가 하고 있는데 저런 표정인지, 시후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런 시후의 속도 모르고 나리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과장님, 저 사실은요. IV 잡는 거 잘 못 해서 그런데 언제 한번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귀도 안 들리고 숨도 턱하고 막혀왔다. 

제아무리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험치가 부족한 신입 간호사라 하여도 주사 놓는 것을 시후에게 가르쳐 달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지. 듣고 있던 시후도 또 뒷자리 두 사람도 놀라워했다.

“가르쳐 주세요~ 네?”

“저. 나리 쌤. 그건 내가 가르쳐줄게요.”

듣다 못한 진창욱이 나섰다. 간호사 잡을 배우려면 간호사에게 배워야 맞았다. 이치에도 맞지 않게 졸라대고 있는 모습이 기가 차서 선배이자 간호사 경력 8년 차인 진창욱이 그렇게 나리의 입을 막았다.

“네.”

대답이 시큰둥한 게 누가 들어도 의도가 불순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나리는 중간 휴게소까지에 도착할 때까지 좀 조용해졌다. 

휴게소에 들어선 시후가 주차를 했다.

“저녁 여기서 먹고 갈까?”

이미 금요일 퇴근 후 출발이어서 목적지까지는 4시간 소요였고, 다들 배가 출출했다. 

“그래요.”

수인이 동의를 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어 그런지 식당은 꽤 한산했다. 수인은 주문을 위해 기계 앞에 섰다. 다들 마음에 드는 메뉴를 정했는지 수인에게 몰려들었다.

“저는요. 돈가스요.”

나리가 제일 먼저 씩씩하게 말했다. 수인이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치즈 돈가스랑 왕돈가스 있는데 뭐 먹을 거예요?”

“전 치즈요. 왕돈가스는 양이 많아서 다 못 먹어요.”

그래, 어차피 못 먹을 거 작은 것 시키는 게 지구를 위해서도 나은 일이지,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치즈 돈가스를 터치했다. 

“저는 순두부찌개요.”

진창욱도 주문을 하고 자리를 옮겼다. 이제 남은 사람이 시후여서 수인이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후는 미쳐 메뉴를 정하지 못하였는지 당황한 눈으로 얼른 메뉴를 훑었다. 

“나는 라면.”

시후가 겨우 라면 하나를 먹겠다며 말을 하는데 불쑥 수인의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밥 종류 먹어요. 점심도 못 먹었잖아요.”

“어? 아. 그래. 그럼 밥.”

시후는 얼굴을 보이며 말하는 건 아닌데 제 걱정을 해주는 수인이 좋아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냥 밥도 종류가 많았지만 수인은 제멋대로 돌솥비빔밥을 눌렀다. 

“선배 꺼 돌솥비빔밥 시켰어요.”

“그래. 넌 뭐 먹을 건데?”

겨우 말을 붙여 놓고 시후는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게 뭐라고 뭐 먹을 거냐고 묻고 긴장한 꼴이라니, 시후는 제 자신에 웃음이 났지만 웃음 대신 한숨이 옅게 나와 버렸다.

“볶음밥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 휴게실도 세어보질 않았지만 꽤 여러 번 들렀던 곳이고, 이곳이 아니더라도 시후는 열에 여덟은 돌솥비빔밥을 시켰고, 수인은 볶음밥을 시켰다. 

오늘도 특별히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그 둘은 12년간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은 메뉴를 골랐다. 

네 사람은 각자 시킨 메뉴를 앞에 두고 뜨문뜨문 대화를 섞어가며 저녁밥을 먹었다. 거의 다 먹고 일어서려고 할 때 수인이 넌지시 이야기를 했다.

“운전 내가 할까요?”

“괜찮아.”

오늘도 퇴근할 때까지 긴 수술이 있었다. 대단히 육중한 남자가 장 꼬임으로 장이 일부 괴사가 일어나 장 천공이 있었고, 그로 인해 복막 안쪽을 다 세척하느라 긴 시간이 들었다. 

고스란히 점심식사도 거르고 지금 운전 중인 사실을 알기에 수인이 그 대신 운전을 자처하고 나섰다.

“내가 할게요.”

수인은 손을 내밀었고 시후는 수인이 힘든 게 싫어서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수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기에 열쇠를 수인의 손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원래 마누라는 빌려줘도 차는 막 빌려주는 거 아니랬는데.”

듣고 있다가 수인이 화들짝 놀랐다. 물론 시후도 놀라서 눈이 똥그래졌다. 말을 한 당사자만 무표정인 게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나리 쌤은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요? 재미있네.”

분위기를 생각해서 수인이 말했고, 나리는 헤헤 웃었다. 순진한 얼굴로 웃는데 그저 같이 웃을 수밖에 없지만,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뭘까 궁금해졌다.

“과장님, 자기 차를 막 다른 사람이 운전하라고 줘도 돼요? 안되는 거 아닌가?”

시후는 대답은 안 했지만, 속으로 그랬다. ‘수인이가 달라 하면 신장도 하나 뚝 떼어줄 사람이 나거든? 이깟 자동차 하나 수인이 달라 한다고 고민씩이나 할 거 같아?’ 였다. 

그저 운전을 하겠다 자처하니 그게 안쓰러울 따름이었지만 수인의 마음이 불편한 것 같아 운전을 부탁하는 시후였다. 그리고 진창욱과 나란히 앉아 가는 걸 또 보고 싶지 않아 그런 것도 있었다.

아무튼 또 다시 어색해진 분위기와 자리 재배치로 목적지까지 절반쯤 남은 여정을 다시 시작하였다. 나리는 오른쪽 차 창문에 바짝 몸을 붙인 채 고개까지 처박고 잠이 들었다. 

시후가 운전을 할 때는 왼쪽으로 몸이 삐뚤어진 사람처럼 굴더니 이제는 창문이 깨지도록 머리를 콩콩 박아대고 있었다. 

진창욱도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잠이 든 것 같고, 말짱하게 깨어 있는 건 운전하는 수인과 그런 그녀가 불안한 시후였다. 시후는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졸리면 교대해.”

“안 졸려요. 선배도 그냥 한숨 자요.”

“잠 안 와.”

얼른 대답한 걸 시후는 후회했다. 이렇게 말이 빨리 끊어지면 싫었다. 좀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둘 말고 사람들이 더 있기도 하고 아무튼 어색해지는 게 너무 싫었다. 

“어제 재수술한 환자는 괜찮아?”

“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 탈 없네요.”

“내 수술 끝나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나도 오래 걸려서.”

수인이 수술했던 환자 중에 복막 협착이 일어나 재수술을 한 사람이 있었다. 장 괴사를 동반하고 있어 재수술은 처음보다 시간도 체력도 배로 필요로 하는 수술이었다. 

혼자 힘들었을 자신을 위해 어시스트를 해주려고 했던 시후의 마음이 전해져서 수인은 고마웠다. 

“선배도 계속 수술이었잖아요.”

시후와 룸미러로 눈이 마주치자 수인은 찌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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