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정민선은 도희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집안에 듣는 귀가 있음을 항상 주의하는 정민선이었기에 안 좋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갈 것 같아서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서재 문을 닫자마자 정민선이 도희에게 다급히 물었다.
“도희야. 그게 무슨 말이니?”
도희는 서재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오빠가 결혼 안 하겠대요. 아줌마 모르셨어요?”
“어?”
기어이 터진 걸까. 정민선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 일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순간 당황한 정민선은 도희에게 이렇다 할 변명을 꺼내놓지 못했다.
깜짝 놀라는 정민선의 얼굴을 보고 도희는 그녀 또한 시후의 마음을 몰랐던 것으로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끼리 결혼 이야기가 오간 후로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도희 역시 시후에게 관심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다.
그게 여자와 남자로서의 관심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마주칠 때마다 시후 아버지 현진권이 ‘우리 며느리 왔어?’ 하면 웃으며 대답을 하던 도희였다. 어른들이 억지로 맺어준 관계로 단 한 번도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한 적 없이 지내온 둘 사이였지만 이 시점까지 오게 되었다.
그 사이 시후는 시후대로 의사로서 수련을 받느라 바빴고, 도희는 도희대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유학을 다녀와서 자리 잡느라 바빴다.
그건 두 집안에서 서로 이해해 주는 부분이었다. 요새 젊은 남녀가 자신의 스펙을 쌓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 때가 무르익어 결혼이란 걸 해야 할 시기가 되면 당연히 하는 걸로 그렇게 묵시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도희의 아버지의 지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나 남은 자식이자 애지중지 아끼던 막내딸 결혼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가 추진하는 일이었다. 감히 누가 토를 달고 거부를 한단 말인가.
도희조차도 이제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도대체 시후가 이리 거부할 거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정민선의 반응에 도희의 안색이 살짝 변하기 시작하였다.
“모르셨군요. 이 일을 어떻게 해요? 오빠가 정색을 하면서 결혼 안 한대요. 아니, 결혼할 마음이 없대요.”
도희는 꼭 찍어서 특히 ‘너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 했던 시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들었던 순간부터 도희는 그 부분은 말끔하게 도려내 버렸다. 어머니인 정민선조차 시후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 도희야. 우리 시후가 왜 그럴까.”
정민선은 도희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시후한테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그 충격이 얼마만큼인지 궁금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하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다시는 이런 일로 복잡하게 만들지 말래요. 이게 말이 돼요? 저희 아빠 당장 다음 달이라도 날 잡자고 하시는데. 신랑 될 사람이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면 전 어떻게 해요?”
도희는 곧장 제집을 찾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생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면 다 통하고 다 해주는 부모님과 오빠들이지만 오랫동안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에게 까인 건 사실, 수치심이 이는 일이었다. 물론 도희가 징징거리면 나서서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아니, 어쩌면 시후 를 반신불수를 만들어서라도 결혼식장에 세워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희 자존심에 크나큰 스크래치를 남겨 버렸다.
이 모습을 절대로 제 부모님이나 오빠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결혼해 달라고 시후가 간청을 하고 무릎을 수십 번 꿇어도 눈 내리깔고 겨우 승낙을 해줄 만큼 시원치 않을 판에 이게 무슨 가당치 않은 일인지 도희의 가슴에 화가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아우. 도희야. 시후가 미쳤나보다. 얘가 왜 이러니. 어머어머. 얘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저 어떡해요?”
“아이고. 도희야. 뭘 어떻게 하니. 내가 혼쭐을 내서라도 마음먹게 할 테니 다른 생각은 말아. 응?”
일단 도희가 마음 없다고 내뺀 게 아니라면 다행이다 싶었다. 도희 정도라면 인물도 출중하고 집안 배경도 좋고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일등 신부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하필 아들 시후 눈에 도희가 들어가지 않는 걸까. 제 아들이지만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대는 시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민선이었다.
“혼낸다고 오빠가 달라질까요? 저 정말 실망했어요.”
“아우. 그렇지. 실망스럽지. 왜 아니겠니. 시후가 내 아들이지만 도희야. 시후가 그래. 하나 하면 하나밖에 신경을 못써. 지금은 일에 미쳐 있어서 그런 거야. 네가 조금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
액면 그대로 아들 시후를 그렇게 믿는 정민선이었다. 아들 시후가 대학 시절 연애를 하는 걸 알았다. 너무 깊게 사귀는 것 같아 정민선이 걱정을 하며 단속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어릴 때 연애란 단단해지기 전에 허물어지기 일쑤이듯 시후도 그렇게 2년여 사귀다 헤어졌다.
그 뒤로 여자를 만나지 않았고, 그 뒤로 연애 비슷한 것도 하지 않던 시후였다. 줄곧 외과 의사로서 수술에 매진하며 살던 시후였다. 그런 시후가 나이를 먹어가고, 제 일에서 자리를 잡아가면 당연히 도희와 결혼을 할 거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때가 되어 결혼이 임박해진 이제야 결혼할 마음이 없다며 이리 일을 비틀고 있을 줄이야. 정민선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런 정민선에게 도희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툭 던졌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겠죠?”
도희는 절대로 입 밖에 내놓기는 싫지만, ‘너와 결혼은 안 하겠다’고 했던 시후의 말을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냥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싫은 건지, 결혼 상대가 싫어서 결혼이 싫다고 하는 건지 알아야 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희를 보는 정민선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도희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서재에 걸려있는 시후의 가족사진을 보았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부자 사이에 어여쁘게 앉아있는 정민선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평온하기 이를 데 없고,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정민선의 사진 속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그녀의 낯빛이 어둡기만 했다. 그래서 도희는 시선을 또 한 번 돌려 넌지시 말했다.
“결혼 자체가 싫은 건지.”
“그렇지. 시후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는 다 그래 도희야. 내가 여자 선배로 말하는데. 여자한테 남자가 반해 있으면 딱 보기도 좋거든. 그런데 너희 둘 사이에 그럴 시간이 없었잖니. 도희는 작년까지 유학 생활을 했기도 했고 말이야.”
은근히 도희의 탓인 양 말을 하면서도 정민선은 완급 조절을 잘 하고 있었다.
“무엇인 든 투자를 해야 수확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니? 너도 그냥 이 감정으로 결혼하는 건 별로겠지. 안 그래? 너희 둘이 친해질 시간이 없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남자는 사실 겁쟁이란다. 자기 환경 바뀌는 걸 여자보다 두려워하지. 시후가 딱 그런 거야. 지금 병원 생활에 푹 빠져있어서 결혼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잖아. 너도 시후 잘 알지 않니? 시후가 좀 묵직한 남자니?”
정민선의 말을 듣고 있던 도희가 시선을 스르륵 굴려서 정민선을 빤히 보았다. 정민선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현시후라는 남자를 알기는 했지만 잘 몰랐고, 그를 내버려 두었던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았다.
정민선의 말이 맞는다면, 시후가 달라질 상황에 겁을 먹어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자신의 자존심에 걸맞는 이야기가 될 듯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도희가 웃으며 말했다.
“친해질 시간을 가져야겠네요.”
“그래 도희야. 자주 만나야 정이 들지.”
잘 어르고 달래면 될 것 같아 정민선은 눈치를 슬슬 보았다.
“이대로는 저도 자존심 상해서 안 되겠고요.”
자존심이 상하기는 할 터였지만 이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정민선은 도희가 아주 신경이 쓰였다.
“도희야. 내가 좀 시후한테 강력하게 어필할게. 너도 시후에게 연락도 자주하고 그런 건 어떻겠니?”
“이런 거 상상도 못 해봤지만. 오빠가 워낙 무뚝뚝한 거 모르지 않으니까 이해는 돼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도희의 마음을 정민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도희가 자신을 찾아온 걸로 봐서는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혼 전에 데이트 많이 해둬야 덜 억울한 거야. 결혼은 생활이야. 아줌마가 여자 선배로 하는 말이란다.”
예비 시어머니였다면 아들이 그리 관심이 없다면 네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말해주면 그뿐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예비 며느리 이도희는 되도록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선배들도 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구요.”
“그럼, 그럼. 결혼해봐. 그리고 바로 아기라도 생겨봐.”
갑작스럽게 나온 아기라는 말에 도희가 피식 웃었다.
“왜 웃니? 결혼하면 당연히 아기 생기고 그런 거 아니니?”
정민선은 도희가 웃기에 얼른 화젯거리를 그리로 몰고 갔다. 도희는 새치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글쎄요. 전 딩크족이 괜히 멋지던데.”
예비 시어머니의 표정이 일그러져 가는데도 도희의 새치름한 표정은 여전했다.
***
백팩에 갈아입을 여벌의 옷을 챙겨 넣은 수인이 힘없이 가방을 바닥에 탁 떨어뜨렸다. 매번 함께하던 봉사인데 출발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산뜻하고 즐겁게 임했던 봉사였는데 이번은 답답함이 앞섰다. 그렇지만 출발시간은 다 되었고 약속은 약속이기에 수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백팩을 메고 신발을 꿰어 신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데, 사택 주차장 앞에 이미 도착해 있는 진창욱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인은 가방을 한번 치켜 올리고 주차장으로 다가갔다.
“일찍 왔네요?”
“조금 전에 왔어요. 현 과장님은요?”
그러고 보니 시후의 차가 없어서 수인은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때 시후의 차가 사택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현 과장님 저기 오네요.”
“네.”
시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인과 진창욱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시후와 짧은 반바지에 탱크톱 같은 차림의 최나리 간호사가 함께 내렸다.
“아. 나리 쌤 데리러 가셨던 거구나.”
진창욱이 먼저 아는 체를 하니 이제 갓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전에 의료원에 들어온 최나리가 활짝 웃어 보였다.
“제가 과장님께 좀 와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출발하자.”
나리가 과장되게 웃으며 말을 하는데 시후가 딱 자르듯 정리를 해버렸다. 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팩을 시후의 차 트렁크에 넣었다.
차곡차곡 짐들을 실었고, 이제 차에 탑승하고 출발하면 되었다. 그런데 나리가 발랄한 걸음걸이로 조수석을 턱 하니 차지하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