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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30)화 (30/88)

30화

도희는 자기 마음대로 다 해버리고 싶지만 시후의 불같은 성격도 이미 아는지라 간신히 조절하며 입을 열었다, 

“결혼을 못 해? 아니 안 해? 왜? 왜?”

애가 타는 것이 아니지만 화가 나는 걸 억지로 눌러 내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도희였다. 시후가 꽤 매력적인 오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굴하지 않는 당당함, 미모의 여자인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친절했던 적이 없던 모습, 누구에게도 털어 놓은 적 없었지만 도희는 시후의 그런 모습에 가끔 끌리기는 했다. 

지금도 딱 그 모습이기는 했으나, 문제의 사안이 너무 심각하기에 도희는 일단 날을 세웠다. 

“누가 남의 인생을 마음대로 정하는데? 난 동의한 적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이상하게 만들지 말자.”

“오빠!”

“아. 왜?”

시후도 조용조용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빽빽 날카롭게 질러대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 이런 실랑이를 봐줄 수 없을 만큼 이도희를 상대하기 싫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야? 지금 장난치는 거지?”

“속고만 살았냐? 나 리바이벌 하는 거 딱 질색인데. 다시 한 번만 더 말해줘? 결혼할 생각 없다. 특히 너하고는 더더욱!”

두 번 이야기 안 해준다고 엄포를 놓고도 하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도희에게 귀에 딱지가 앉게 해주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이런 귀찮은 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렇게 무작정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 버릇없이 구는 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러다 만에 하나 수인에게 오해받을까 덜컥 겁이 나는 시후였다. 

“설마, 지금 나 까는 거야?”

깐다. 시후는 잠시 생각했다. 서로 합의한 적도 없지만 어른들의 욕심으로 여기까지 흘러왔다면 한쪽의 거절 의사를 밝힌다 한들 시후의 입장에선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자꾸 이렇게 질척댈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깐다는 표현, 괜찮아 보였다. 

시후는 눈을 크게 뜨고 도희를 똑바로 보았다. 이런 말 두 번 세 번 하면 모양새도 빠질 뿐 아니라 이렇게 한 번에 적을 쓰러뜨리는 게 오히려 신사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나 너 까는 거야. 너희 집에도 그렇게 전달 드려라.”

충격에 빠진 도희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눈에는 불똥이 튀어나올 듯 표독한 드라마 주인공 같은 얼굴이었다. 

“현시후. 말 똑바로 해.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어?”

도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도희는 어려서부터 손만 뻗으면 다 제 것이 되었다. 늙은 아버지는 그런 딸의 든든한 화수분이었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 셋은 그런 여동생의 지원군이었다. 가질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이도희의 소유욕은 비상식적으로 몸집을 키워갔다.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책임질 수 있겠냐 물었어.”

“책임? 내 인생 책임을 왜 네가 묻는데? 주제 넘는다는 생각 안 하냐?”

시후는 부모님이 어떤 꿈을 꾸던 사실 그에 호응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시후가 의사가 된 이유는 중학교 시절 읽었던 한 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모아둔 전 재산을 털어 자선 의원을 운영 중이라는 김정수 원장이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는 기사였다. 

시후도 대대로 의사 집안이라는 분위기 속에 자신도 직업을 선택한다면 별 무리 없이 의사가 될 거라고 듣고 자랐다. 

그런데 정치인에 가까운 할아버지, 사업가에 가까운 아버지를 보며 진짜 의사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에 김정수 원장의 기사는 시후의 뜨거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더구나 아버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김정수 원장이었기에 시후의 가슴엔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인연이 얽혀가더니 김정수 원장의 딸이 수인이라는 사실을 레지던트 치프이던 시절에 알게 되었고, 그래서 여느 후배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가던 수인이었다. 

그런 수인이 시후를 그 긴 세월 짝사랑했던 걸 좀 빨리 알지 못한 게 지금은 후회가 되는 단 한 가지였다. 수인이 말고는 시후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에 후회라는 감정이 생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책임을 운운한다면 그 책임에 대한 부분도 수인이를 두고 할 이야기이지 이도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후의 이런 솔직한 표현이 도희를 꽤 많이 자극하고 있었다. 

“나를 깐다? 그 이유가 뭐야?”

“어. 리얼로 너 까는 거야. 이유를 굳이 너한테 말할 의무는 없는 것 같은데.”

시후가 한숨을 훅하고 내쉬었다. 굳이 이유를 이도희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기는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진창욱과 수인이 함께 있는 모습조차 볼 수 없이 애가 닳아버린 남자의 가슴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저 김수인의 생각만으로 가득 차버려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인 생각뿐인 시후였다. 그러다 보니 제집에 무턱대고 처 들어 와 제 앞에 도끼눈을 뜨고 있는 도희는 존재만으로도 매우 거슬렸다.

“야. 할 말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좀 나가줄래?”

“뭐? 뭐라고?”

“나가달라고. 너 한국말 언제부터 그렇게 못 알아들었냐?”

시후라는 남자, 도희에게 냉정하고 한겨울 시린 눈발처럼 대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온통 수인 생각이 가득 차 버린 시후는 수인에게 오해받을까 겁이 나서 1분 1초라도 빨리 집에서 내쫓고 싶었다. 

그러나 약이 바짝 오른 도희는 이 상황에 적응을 못 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신을 차려볼 틈도 없이 시후는 단숨에 도희를 집 밖으로 떠밀어 버렸다. 

철컥 닫히는 문 앞에서 도희는 기가 막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현실인 건지 꿈인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이도희에게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했던 사람이 여자 남자, 어른 아이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도희의 비위를 맞춰주기 급급했는데, 설마 이렇게 내쫓긴 게 실화인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뱀처럼 싸늘해진 눈빛에, 독이 저 아래에서 스멀스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도희는 사택 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왔다. 온갖 열이 뻗쳐 온몸을 달구었다. 차 시동을 걸고 거칠게 사택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수인은 사택에서 나오는 은색의 스포츠카를 보았다. 이 동네에 저런 차가 있을 리 만무하고, 사택에서 나오는 거라면 누구인지 살짝 궁금하긴 했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기에 운전이 매우 거칠다는 생각을 하며 수인은 사택에 들어섰다. 

두 손엔 콩나물 해장국이 들려 있었다. 어젯밤 술만 마셔대던 시후가 걱정이 되어 시내까지 나가서 사 오는 길이었다. 

그 밤이 있기 전에는 이런 일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챙겨주고 싶으면 마음껏 챙겨주었고,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남들 시선이 살짝 불편하기는 하였으나 줄곧 시후와 수인이 그렇게 지내오는 걸 알기에 주변 사람들도 그러려니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주말에 해장국을 사다 주는 일 정도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수인은 시후의 집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 해장국 하나로 또 어색해지고 이상해질까 봐 싫었다. 그렇지만 밥도 안 먹고 있을 게 뻔 한 시후를 빨리 먹이고 싶은 마음이 수인을 재촉하였다. 수인은 고개를 푹 떨 구고 한숨을 내 쉬었다. 

마음이 자꾸 가서 그런 게 아니다, 어차피 자신도 먹으려고 사던 김에 쫄쫄 굶고 있을 직속 선배에게 한 그릇 사다 줄 뿐이다, 그동안 시후에게 얻어먹는 밥공기가 몇 개냐, 참 구질구질하게도 이렇게 이유를 덧대고 있는 꼴이라니. 씩씩하고 용감하던 김수인 다 죽었나. 

수인은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분명 시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나갔을 것 같지 않은데 기척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꾹 눌러본 수인은 조금 전 건널목 앞에서 본 은색 스포츠카가 떠올라 누군지 모르지만 시후와 함께 나간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돌아서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아. 수인아.”

“누구 있어요?”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시후에게 수인이 물었다. 그 당황한 눈빛에 수인도 이미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입을 꼭 다물었다. 누가 있으면 어쩌고 없으면 어쩔 건데. 자꾸 선을 넘는 게 이제 보니 자신인 것 같아서 수인도 당황하였다. 

“아니. 없어. 들어와.”

집안에 누가 있냐는 수인의 질문에 결백이라도 증명하고 싶은 시후가 현관문을 더 활짝 열었다. 수인은 되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요. 들어갈 건 아니고. 이거.”

수인은 정신을 차리고 딱 선을 지키고 섰다. 현관 안으로 해장국을 내밀며 시선을 피했다. 

“뭔데?”

“밥 먹으라고요. 집에 먹을 거 없잖아요.”

하얗고 가느다란 수인의 손목이 보였다. 시후는 얼른 받아들고 싶었지만 받는 순간 현관 안에 들어온 손목마저도 금세 빠져나갈 것 같아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수인은 다시 살짝 손을 움직였다. 어서 빨리 받으라는 사인이었고, 시후는 마지못해 해장국 포장 봉지를 받아 들었다. 

“같이 안 먹어? 들어와.”

“괜찮아요. 집에서 할 일도 있고요. 그럼.”

돌아서는 그녀를 얼른 잡아채고 싶었다. 이렇게 내 걱정할 거면서 아픈 내 마음은 왜 안 받아주려고 하는지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수인은 이미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버렸다. 

시후는 그녀의 다급한 발소리를 들으며 현관문을 닫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결국 수인이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소리를 다 듣고야 시후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 

한편, 그길로 미친 듯이 속력을 내어 서울로 향했던 도희는 정민선을 찾아갔다. 집에 들이닥친 도희를 보고 정민선이 두 손을 뻗어 환영하려 했지만 시선이 싸늘했다.

“도희야.”

“아줌마. 저 오빠 사택에 갔다 왔어요.”

시원시원하게 본론부터 말하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폭풍전야 같았다.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희를 보며 정민선은 마침 남편이 골프 라운딩을 나가고 없어 다행인 것 같았다.

“어머. 거길 다녀왔어? 언제?”

“지금이요.”

도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 기쁜 징조라고 믿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그렇지만 정민선은 최대한 감정을 넣지 않고 순리적으로 이도희를 대하고 싶었다. 

“그랬구나. 우리 시후가 좀 무뚝뚝하지?”

“아줌마.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내용을 몰라도 정민선의 가슴은 일단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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