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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9)화 (29/88)

29화

수인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시후는 수인의 머리부터 등줄기를 쉼 없이 쓸어내렸다. 보호자에게 떠밀려 다친 걸 알면서도 끌어안아 주지 못했던 그 날까지 마음의 빚을 털어내듯 그랬다. 

“숨 막혀요.”

“아. 그래.”

숨이 막힌다는 수인의 말소리에 시후는 몸을 떼어 내었다. 아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눈으로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반짝였다. 

시후는 조심스레 손을 올려 수인의 얼굴을 감쌌고,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을 닦아 내렸다. 울어 촉촉해진 눈동자하며, 빨개진 코,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까지, 고개가 들린 수인의 얼굴은 너무도 예뻤다. 그의 정신을 온통 빼앗기 충분했다. 

시후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번뇌의 시간 속에 허우적거렸다. 그의 거칠어진 숨이 수인의 얼굴에 홀연히 퍼져갔다. 

이성을 빨리 되찾은 건 역시 수인이었다. 시후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또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지키고 있는 선인데, 아슬아슬해져 버리면 다시 또 서로에서 깊은 상처를 내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수인을 사로잡았다.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기는 했으나 서로의 땀인지 눈물인지로 온몸이 끈적끈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땀을 식혀줄 반가운 밤바람이 지나갔다. 

“다음 주 봉사 어떻게 할 거예요?”

“어? 가야지. 넌 안가?”

이성을 되찾은 수인이 휴대전화로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러면서 슬쩍 물어보는 말에 시후는 무슨 날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냉큼 대답했다. 

“월차 냈어요.”

“어. 나는 휴가 냈어.”

겨우 토요일 오전을 비우는 일이었지만, 이 하루를 위해서 거의 한 달을 쉬지 않고 일했던 수인과 시후였다. 그렇게 월차를 내고 휴가를 썼지만 봉사를 가는 건 놀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시후는 수인과 같은 곳에 간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

은색의 컨버터블 카는 산등성이를 돌아가는 국도를 시원하게 달려 나갔다. 가을이 오기 직전의 산과 들에는 아직 찐 초록이 가득하기만 했다. 에어컨 바람보다 자연의 바람이 지금은 더 시원한 느낌이 들어 운전하는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도희는 묶었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풀어 버렸다. 어느새 산등성이를 지나니 보이기 시작하는 의료원. 도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진짜 여길 다 왔네.”

도희의 컨버터블이 사택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재활용 쓰레기를 비우던 왕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항상 눈여겨 봐왔던 로망의 차인데다 그 안에 타고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은 중년의 왕 부장을 당황하게 만들 만했다. 도희는 그런 왕 부장의 시선 따위는 지나가는 개미 취급이었고, 곧장 사택 공동 현관으로 직진해 버렸다.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가 사택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재활용 쓰레기를 다 버린 왕 부장이 뒤따라가다 2층으로 향하는 도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지금까지 2층과 3층에 저런 손님이 찾아올 일이 있었던가. 

도대체 누굴 찾아왔는지 궁금증이 폭발한 왕 부장은 자기 집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도희의 발소리를 가만히 쫓았다. 올라가던 구두 소리가 멈춘 것으로 봐서는 분명 2층, 현시후를 찾아온 게 틀림없어 보였다. 

딩동!

일요일 11시, 출근을 할 시간도 아니고, 점심을 먹으러 나갈 시간도 아니고, 늦잠을 잔다 해도 일어날 시간 11시. 도희는 초인종 소리에 기척이 없기에 또 한 번 벨을 눌렀다. 

딩동!

안에서 굵직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방문한 사람치곤 꽤나 예의 없이 묵묵부답으로 버티고 선 도희 앞에 문이 철컥 열렸다. 도희임을 확인한 시후의 표정에 당혹감이 잔뜩 드러났다. 

“이도희?”

“보시다시피.”

도희는 문을 잡고 선 시후의 팔을 툭 밀어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당황한 시후는 눈썹에 힘을 줘가며 도희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뭐냐?”

“여전하네.”

허락도 없이 집안을 휘 둘러보는 도희였다. 시후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 도희가 방을 향해 방향을 잡아대는 그 앞에 딱 가서 멈췄다.

“뭐냐고?”

“확인. 왜?”

“뭐?”

시후가 되묻는 찰나 도희는 시후를 쓱 비켜 지나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휑한 침실, 깔끔하게 이부자리는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말끔했고, 옷 하나 나뒹구는 것이 없이 거의 빈집 같아 보였다.

“뭐 하는 짓이야? 버릇없이?”

“오빠하고 나 사이에 버릇은 무슨. 우리 어릴 때부터 서로의 방 정도는 계속 드나든 사이 아니야?”

무엇을 확인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 확인이라는 절차가 끝난 듯 도희가 다시 거실로 향했다. 또 다른 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도저히 참아줄 수 없던 시후가 손목을 끌어 잡았다.

“야. 나가.”

“이건 사전 방지 차원이라고.”

“이도희. 나가라 했다.”

마치 10년도 더 전에 사춘기 시절의 도희가 무턱대고 시후의 방을 들어왔을 때와 같았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방에 불쑥 들어와서는 제 맘대로 구경을 하던 도희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시후는 다짜고짜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뭐 숨겨 둔 거라도 있어?”

“너 대체 뭐야? 주거침입으로 끌려 나갈래?”

시후는 잡았던 손을 휙 뿌리치듯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희는 이름처럼 도도하게 제집 인양 편안한 얼굴이었다.

“문 열어 준 게 누군데. 웬 주거침입?”

말을 얄밉게 하고선 끝끝내 나머지 방 하나도 문을 열어 재꼈다. 그래 봤자. 3개 벽면이 의학 서적으로 가득한 책장과 책상이 전부인 방이었다. 

“진짜 여전하네. 책 이거 다 읽는 건 아니지?”

딱 제 수준으로 말하는 도희이기에 시후는 기가 막혔다. 

“나가라. 좋은 말 다 했다.”

“싫어.”

지금 이 순간 제가 무슨 자격으로 단호한지 모르겠지만, 도희는 그렇게 말하고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대화 좀 할까?”

시후는 팔짱을 끼고 딱 대치하듯 서 있었다. 그런 시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도희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머리카락을 뒤로 팔랑 넘겼다.

“우리 대화해야 하잖아. 우리가 알고 지낸 건 아주 오래 된 일이지만 이제 남자 여자로 만나야 하니까.”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딱 도희가 그 짝이었다. 어디 해볼 테면 다 보라는 듯 시후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구기고 있었다.

“뭐. 나도 오빠를 처음부터 남자로 생각했던 건 아니야. 그런데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아. 아빠가 오빠하고 결혼하라고 하니까.”

“결국 그 소리 하러 온 거냐?”

도희가 집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직감은 하였으나, 혹여 자신과 같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들어주고 있는 참이었다.

“나쁠 게 뭐야? 집안도 서로 잘 알고, 오빤 의사고 난 바이올리니스트라 보기에도 잘 어울리잖아.”

한 결 같이 자기중심적인 여자였다. 도희를 알고 지낸 지난 20여 년 동안 하나도 변함이 없는 모습에 시후는 기가 질렸다. 

“왜 나쁠 게 없어? 난 널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머? 내가 여자가 아니야? 오빤 어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나 이도희야. 나 몰라?”

저 징그러운 자신감이 그녀에게 약점인 걸 여전히 모르고 있다니 한심한 생각까지 들었다. 시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딜 봐서 네가 여자라는 건지 조목조목 따져서 기겁하게 해주고 싶지만 일단 참았다. 

“그러니까 네가 뭔데?”

“말싸움하려 들지 마. 그러려고 온 거 아니니까.”

참 말도 예쁘게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얼마나 기가 막혀 하는지 도통 모르는 듯 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얼굴이 두꺼운 건지 시후는 그저 나오는 건 웃음밖에 없었다.

“난 길게 너하고 이야기할 게 없어. 그만 돌아가.”

“나 오빠한테 제의하러 온 거야.”

설마 내가 혹할까 봐? 천하의 현시후를 뭐로 본 건지, 시후는 여차하면 달랑 들어 문밖에 내쫓을 태세인데 도희는 여전히 제 할 말이 먼저였다.

“우리 결혼해도 서로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말자. 다만 결혼이라는 울타리는 지켜야겠지.”

“이도희.”

“응?”

이 표정, 다른 남자들이 본다면 귀엽다, 설렌다 할지 모르지만 시후 눈에는 그저 맹한 여자 같아 보였다.

“너 지금 헛 다리 제대로 짚었다.”

모든 게 결정 났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겠지만, 결혼이 기정사실이 된 다음에나 할 말을 도희가 주제넘게 하고 있었다.

지금 도희의 얼굴 표정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해를 전혀 못 하는 상황 같았다.

“하. 이도희. 너 여기까지 왜 왔는지 알겠는데. 제대로 헛 다리 짚었다고.”

“헛 다리?”

“그래 인마. 너하고 나, 결혼할 일 없다.”

시후 앞에 도희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저 사람, 그저 알기는 하지만 한팔 간격 이상으로 밀어내고 싶은, 그저 얼굴 정도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정도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 시후가 주방으로 향했다.

“뭐? 현시후!”

대단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희가 시후를 따라 왔다.

“이게 어딜 반말에다 이름까지?”

시후가 상체를 움찔했다. 여차하면 꿀밤이라도 한 대 줘 패버리고 싶은 마음 가득했지만 일단 참았다. 지금 자신은 목이 말랐으니까.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뚜껑을 와득 뜯는데 도희가 생수를 낚아채었다. 그리곤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야?”

어이없이 생수병을 빼앗긴 시후가 화를 낼까 하다가 다시 냉장고를 열어 한 병을 더 꺼내었다. 버릇없는 도희를 혼내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시후는 인류애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뭐?”

“뭐라고 했냐고?”

눈은 금세라도 찢어질 것같이 뜨고 시후를 노려보는 도희였다. 그런 것에 쫄 시후가 아니었지만 흠칫 놀라기는 했다.

“두 번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잘 들어라. 너하고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다.”

아주 친절한 선생님처럼 또박또박 천천히 가슴에 새길 시간을 줘가며 시후가 말했다.

“너 미쳤어?”

“너? 미쳤어? 나? 내가 뭐?”

반응이 참 신선하기는 했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시후의 발언에 다짜고짜 미쳤냐니. 그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반격인 건지. 시후는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돼? 뭐라고? 나하고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미친 거 맞지? 감히?”

하. 무례하고 위아래 없는 건 알았지만 감히, 라는 말에 시후는 더는 참을 인내심이 없었다. 

“뭐 감히?”

시후의 살벌해진 눈빛을 봐버린 도희가 얼른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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