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진창욱이 수인을 챙기고 있어서 시후는 술이 더 빨리 넘어갔다. 잔을 마주칠 시간도 필요 없는 사람처럼 제 잔을 혼자 채워가며 시후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천천히 마셔요.”
해장국집에 들어와서 소주 4병이 빌 동안 수인이 시후에게 한 첫말이었다. 시후는 수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인이 걱정하는 것 같아서 술잔을 내려놓았다.
“밥 안 먹어요?”
“다 먹었어.”
반 공기도 채 먹지 않은 밥그릇이 보였다. 오늘 하루만 수술이 3건이었다. 오전부터 내리 수술이었기에 점심도 거르고 저녁도 거른 채 이 식사가 유일한 식사일 게 뻔했다.
요즘은 의사 휴게실에도 잘 올라오지 않는 시후였다. 응급실 콜을 받으면 응급실에, 입원 환자 회진을 돌 때만 의료원 안을 걸어 다닐 뿐 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고 진료실에 있는 듯했다.
수인은 한숨이 나왔다. 그간 자신은 갑이 아니었다. 물론 을도 아니었다. 병도 아니고 겨우 정 정도 되려나. 시후에게 자신은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무뎌서 모르고 있었던 게 팩트라 해도 12년을 한 결 같이 시후 옆에 있던 자신도 몰라봤을 거였다. 그런 관계였는데, 그 하룻밤을 기점으로 시후가 마치 을인 양 자꾸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더더구나 한 달 전쯤부터는 아예 꼬리 빠진 강아지같이 수인을 피하고 있었다. 에이즈 환자 종기 수술이 있던 그 날부터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지금까지, 시후가 그랬다.
어쩌면 자신의 말대로 시후 인생을 살아가겠다 생각을 먹었기에 그런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식사마저 챙기지 못하고 얼굴 가득 어둡기만 한 이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만 했다.
수인은 괜히 화가 나서 또 한 번 한숨을 지었다.
“과장님, 속 불편하세요?”
친절한 진창욱이 고개까지 기울여 수인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살짝 민망해진 수인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진창욱도 제법 술에 취했던지 슬그머니 옆에 앉은 수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좀 놀라서 수인이 몸을 피하기는 하였으나 진창욱은 자꾸만 그녀에게 몸을 붙여대고 있었다.
“나는요. 우리 의료원 사람들 너무 좋아요. 현 과장님은 나를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나기는 하지만, 실력 짱 좋으시니까 일단 패스.”
진창욱이 술에 취해 취중 진담을 하려 들었다. 수인은 꾹 집고 있는 허벅지 위에서 진창욱의 손을 밀어내었다. 그 모습을 봐버린 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인도 괜히 민망하여 목을 긁어댔다. 그러자 진창욱이 수인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주며 기웃거렸다.
“어디 봐요. 뭐 들어갔어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수인은 진저리치는 사람처럼 진창욱 옆에서 뚝 떨어져 앉았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숨을 내쉬는 시후의 모습에 괜히 수인의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우리 의료원에서 제일 좋은 사람. 김수인 과장님. 과장님 정말 짱 인거 알아요? 예쁘고 친절하고.”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진창욱이 말이 꼬이는지 낄낄 웃었다. 수인이 좋다는 그 말인데 그녀는 듣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후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사이 또 한 병의 소주가 비어서 이제 빈 병이 5병이 되었다. 마신 양으로 보면 시후가 2병쯤 마셨고, 진창욱이 2병쯤, 그리고 수인이 1병을 마셨을 텐데 진창욱이 제일 취한 것 같았다.
“진창욱 쌤. 그만 마시죠?”
수인이 고개를 처박을 듯이 까딱거리는 진창욱에게 말했다. 들리지 않는지 혼자 리듬을 타며 흔들거리기에 더는 앉아 있기 싫은 시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식당을 나와서가 문제가 되어 버렸다. 식당 벽에 기대 주저앉아 있던 진창욱을 시후가 일으켰다. 힘없이 달려 일어나던 진창욱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극구 부축하는 시후를 마다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김수인 과장님 집에 바래다줘야 합니다.”
“취했습니다. 먼저 집에 가시죠.”
시후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진창욱은 시후의 부축을 거부했다. 그리고 대 놓고 이제는 시후 더러 가라고 했다.
“아닙니다. 현 과장님 먼저 가세요. 저는 수인씨하고 갈 테니까.”
넘어질 듯 걷기 시작하는 그의 팔뚝을 시후가 다시 잡으니 무슨 액션영화를 찍는 듯 진창욱은 팔을 펄럭이며 돌려 빼버렸다. 그의 목소리가 꽤 높아져 있었다. 술의 힘을 빌려 남자 대 남자의 기 싸움을 하려 드는 것 같았다.
“현 과장님 먼저 가십시오. 아, 제발 먼저 가십시오. 오늘 제가 수인 씨와 같이 왔습니다.”
말소리가 또렷한 건 아닌데, 진창욱은 점점 더 큰 소리를 내어 말하며 거부의 의사 표현을 했다. 그의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다. 시후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진창욱은 비틀거리며 수인에게 다가갔다. 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수인을 챙기려 드는 꼴에 시후는 쓴웃음이 지어졌다.
비틀거리던 걸음이 수인에게 다가가서는 앞으로 쓰러질 듯하였다. 엉겁결에 수인은 진창욱을 받쳐 냈지만 어느 각도로 보아도 진창욱이 수인을 껴안은 것처럼 보였다.
시후의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수인이 버거운 몸짓으로 진창욱을 밀어내는 걸 보고 시후는 드디어 뚜껑이 열려버렸다. 성난 발걸음으로 걸어가 수인의 몸에 기대있는 진창욱을 확 잡아당겨 끌어내었다.
“아! 술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자라고.”
“어? 아씨. 이거 놔!”
두 남자가 몸으로 얽힐 것 같으니 불안해진 수인이 시후의 팔뚝을 잡았다.
“선배. 선배.”
수인이 잡은 시후의 팔뚝이 화가 나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수인은 이러다 서로 민망한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어 다시 한 번 시후를 말렸다. 때마침 지나가는 택시가 보여 수인은 얼른 불렀다.
“택시 왔어요. 진창욱 쌤. 어서 택시 타요.”
“아 싫어요. 수인씨하고 같이 갈 거라고요.”
아주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기에 바득바득 고집을 부리고 있는 진창욱을 시후가 냅다 끌어 택시에 밀어 넣었다. 수인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렇게 시끄러운 진창욱이 떠나고 덩그러니 수인과 시후가 남았다.
시후가 털썩 보도블록 턱 위에 다리를 벌려 앉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불을 붙이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넘겼다. 수인은 너무 놀라서 시후 앞으로 걸어갔다.
“선배. 담배 왜 피워요?”
대답도 없이 또 한 모금 빨아 넘기고 연기는 수인을 피해 옆으로 내뿜었다. 수인은 또 한걸음 시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끊었던 담배 다시 피우냐고요? 네?”
“너 때문에.”
수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시후 입에 물려 있는 담배를 툭 뽑아 땅에 던져버렸다. 순간 두 사람 다 얼음이 된 것처럼 굳었다.
“내가 뭐? 내가 선배한테 뭐라고 이래요?”
그 옛날, 시후가 전 여친 예원과 헤어지고 막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었다. 그게 한 1년쯤 지속되었고, 수인은 다른 건 다 해도 담배는 안 피웠으면 좋겠다며 시후에게 매일 잔소리를 해대며 겨우 담배를 끊게 만들었다.
그 후로 시후는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수인 때문에 괴로운 얼굴을 하고 끊었던 담배에 의지하고 있는 시후의 모습에 수인은 수인대로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시후가 보도블록에서 일어났다. 수인은 코끝이 빨개진 채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왜 혼자 일부러 몸을 혹사해서 힘든 일만 골라 하고, 밥도 안 먹고, 수척해진 얼굴로 담배까지 피우냐며 막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시후의 얼굴을 보니 그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핑 돌았다. 시후는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수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또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수인은 급기야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밥 왜 안 먹고 다녀요? 왜요? 누구 보여주려고?”
시후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놓을 대답이 없기도 했지만 수인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끌어안고 싶어 제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시후가 그렇게 죽을 듯 참아 내는지도 모르고 수인은 제 속에 담긴 말들을 쏟아내었다.
“왜 혼자 당직은 다 서는 거냐고요? 왜요? 일 못 해서 죽은 귀신 붙었어요? 왜 혼자 몇 날 며칠을 당직 다 서고, 수술 혼자 다 하고. 왜 그러냐고요? 왜요? 나 미치는 거 보려고 그래요?”
취기를 빌린 말이기는 했으나 한 달 가까이 시후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꺼번에 다 나와 버렸다. 듣고 있던 시후가 더는 견딜 수 없는지 고개를 돌려 수인을 보았다.
“내 걱정 하긴 했어?”
“선배 바보예요? 어린애야?”
수인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속상해서 울음이 막 터져버렸다. 엉엉 울고 싶었다. 혼자만 힘든 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울음 속에 그 말은 단단히 감추어 버렸다.
“하.”
제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수인을 어찌해야 할까. 다가가서 안아주고 위로해도 될까. 또 몸이 끌려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면 어쩌지. 속 좁은 남자처럼 시후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수인의 울음소리를 오래 견딜 수 없는 시후였다. 시후는 슬그머니 수인을 끌어안았다.
“네가 왜 우는데?”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수인은 시후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알싸하게 담배 냄새가 났지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를 꼭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의 몸을 꽉 잡을 수가 없어서 수인은 두 팔을 아래로 내려놓았다.
대신 시후가 수인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껴안아 주고 싶은 모든 순간을 다 보상받고 싶은 남자처럼 빈틈 하나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