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도희는 앞에 놓인 물 잔의 물을 홀짝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정민선이 대답을 재촉했다. 도희는 상대하고 있는 이가 예비 시어머니임을 잊은 듯 한 얼굴로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오빠 관리 좀 해보려고요.”
당돌한 신세대라 하여도 예비 시어머니 면전에서 귀하디귀한 아들을 관리해 보겠다는 막말은 도희가 아니면 감히 누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침착하자며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애써 누르고 정민선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한 그대로예요. 오빠, 제가 직접 관리해 본다고요.”
그 관리라는 것이 결혼식장까지 감시를 하며 잡아끌겠다는 뜻인지, 연애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다가가 보겠다는 뜻인지 정민선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 말에 잘 생각했다며 찬성을 표할 수도,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며 어깃장을 놓을 수도 없었다.
“도희야. 네가 우리 시후를 잘 다독여 보겠다는 그 말인 거지?”
몸에 사리가 생기는 일이라면 도가 튼 정민선이었기에 도희가 한 말에도 꾹 참아 넘기며 좋게 재해석을 해보았다. 그런 정민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희는 또 제멋대로 말을 꺼냈다.
“데이트하자는 말도 없이 이대로 결혼하는 건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요.”
딴에는 이 결혼을 잘해보자는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만 듣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당최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민선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맞장구를 쳤다.
“그래, 맞아. 결혼하고 물론 연애하는 사람들도 있기야 하지만 결혼 전에 데이트도 좀 하고 추억도 좀 쌓아야지.”
오늘 도희를 보자고 한 정민선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눈에서 연분이 시작된다고 하니 자주 보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정민선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반하면 잠을 포기하고라도 몇 시간을 달려와 겨우 몇 분 얼굴 보는 장거리 연애도 하기 마련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기에 정민선은 도희의 생각에도 숟가락을 얹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쌀쌀맞아 보이는 도희가 시후를 마음에 두기는 했던지 제법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오빠 서울에 언제, 언제 오죠?”
필시 따지는 말투같이 들렸지만 정민선은 또 한 번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아들 현시후가 엄마인 정민선이 그렇게 보고 싶다고 노래를 해도 덥석 얼굴 보여주러 서울로 오는 말 잘 듣는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결혼 생각도 없는 시후가 결혼상대자라고 하여 도희를 보러 서울에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며 사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들의 허물이라면 엄마는 덮어야 할 테니까.
“우리 시후가 응급실 커버도 해서 말이야. 서울 오는 날이 대중이 없어. 지난달에는 이틀 연속 집에 왔는데, 이번 달에는 바쁜지 아직 안 왔구나.”
아들이 서울에 오지 않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보니 괜히 거짓말을 둘러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민선은 옅은 한숨이 나왔다.
“너도 알잖니. 시후가 워낙 여자에 관심도 없고 일밖에 몰라서 그래.”
“시후 오빠는 왜 일만 해요? 그리고 왜 그런 시골에 가서 일을 하죠? 서울에 병원도 많고 또 우리 병원에 자리가 없어요?”
그야 물론 시후를 오라 하는 병원이 많지만 그게 시후의 선택인 것을 뭐라 하겠는가. 어쨌든 이리도 생각이 다른 두 남녀가 맞춰가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해 보이기는 했다.
“뭐 결혼하면 당연히 기산 대학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야겠지. 그건 걱정하지 마.”
“그럼 내가 내려가 봐야겠네요.”
당돌한 신세대면서 세상천지 무서움도, 어려움도 없는 이도희다웠다. 정민선은 그래 주면 고맙기는 한데 먼저 적극적으로 나와 주니 어른으로서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럴래? 우리 시후도 아마 속으로 엄청 좋아할 거야.”
“가봐야겠네요.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긴 하니까.”
이건 뭐 시찰이라도 행차하려는 윗사람같이 말하고 있었다. 정민선은 시후와 도희를 결혼시키고 나면 상전을 또 하나 모셔야 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도희가 시후와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설 기미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남녀란 자주 보고 자주 만나야 정분이 나는 법이니까. 이렇게 둘이 눈이 맞아준다면 정민선의 시름도 한결 줄어들 테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럼 언제 가볼래? 같이 갈까?”
초행길이기도 하고 서울을 벗어나 지방으로 가는 일이기에 정민선은 함께 가준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하지만 당돌한 예비 며느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니요. 아줌마 계시면 더 어색할 것 같아요.”
“그렇겠구나. 그래. 그럼.”
알아서 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정민선은 그 말까지는 도저히 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이 저절로 자꾸 나오는 건 기분 탓이라고 믿었다.
정민선은 도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들 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답답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 네.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는 시후의 목소리에 정민선은 다짜고짜 속을 풀어댔다.
“시후야. 너 어쩜 그러니? 이번 주에는 꼭 올라오라고 몇 번을 말했어?”
- 못 올라가요. 계속 당직이에요.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오라는 성화가 계속되기에 시후는 일부러 남의 당직도 대신 서주고 있었다. 그 속사정을 알 수 없는 정민선의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아우, 그래도 그렇지. 이사장님이 이제나 만나려나 저제나 만나려나 기다리시는데.”
부모님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시후는 기선대학 이사장을 만날 이유가 털끝만큼도 없었다. 괜히 가벼이 행동해서 부모님 얼굴에 먹칠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어찌 하여 시후가 이사장을 만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아마도 아버지가 부끄러워 병원을 그만두셔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시후는 이번만큼은 불효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님 마음대로 하게 할 수 없었다.
우주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최첨단 시대에 정략결혼이라는 말도 어이가 없고, 제아무리 체면이 중요한 부모님이라 해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막무가내로 코뚜레 끼워 시킬 수는 없으니 시후는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싫다고도 했고, 안 한다고도 했고, 할 수 없다고도 했다.
물론 그 이유를 아직 밝힐 수가 없다는 게 시후를 환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이유인 김수인이 틈조차 주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뛰겠는 시후였다. 그 미칠 것 같은 마음을 달래며 미친 듯이 일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한가하게 서울 나들이를 할 여력이 없었다.
- 어머니. 저 저녁 먹는 중입니다.
“아우,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 먹는 거야? 그래. 맛있게 먹어. 시후야. 그럼 다음 주는 올 거니?”
이렇게 애걸복걸이란 걸 하고 산지도 어느덧 30년이 넘어섰다. 현시후라는 아들이 남들 볼 땐 엄친아에 출중한 인물에, 월등한 신체에, 부러운 능력까지 죄다 겸비한 인물이었지만 엄마에게 고분고분한 아들이 아니었고, 죽어도 아닌 건 아닌 아들이라서 키우는 내내 벌을 서는 것처럼 정민선은 힘이 들었다. 서른이 넘은 현시후는 여전히 정민선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 다음 주는 봉사가 있어요.
“또 또! 자선의원 간다는 거니? 너 아버지 아시면 또 난리 나신다. 왜 그러니?”
늦은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아들에게 이쯤에서 양보하고 전화를 끊어주려 했는데 끝까지 속을 긁어 대니 정민선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 강원도 갑니다. 서울 갈 시간 안 될 것 같아요.-
야멸차기가 어찌 이리 한겨울 서릿발 같을까. 정민선은 더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닫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가 넘어 있는데, 이제야 저녁이라고 먹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괜히 목이 메었다.
“9시가 넘어서 이제 저녁을 먹어 어떡해? 그러니까 결혼을 해. 시후야. 남자는 여자가 챙겨줘야 편하지.”
엄마의 마음은 다 알겠는데, 시후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좋으니까 수인의 저녁밥을 챙겨주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도 아들은 엄마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하고 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었다.
전화를 끊고, 시후는 24시간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앞에 놓고 소주 한 병을 시킬까 지금 고민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응급 수술이 있어 내리 5시간을 수술하고 나니 녹초가 되기도 했고, 내일은 일요일이니 늦잠을 좀 자볼까도 싶어서 술이 살짝 생각났다.
“저. 소주 한 병 주세요.”
망설이다가 한 병을 주문하고 텅 빈 식당에 큰소리로 돌아가고 있는 티브이 뉴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무디게 살고 있는지라 뉴스마다 전부 새로웠다.
그렇게 뉴스를 보며 식어가는 해장국을 안주 삼아 한잔 들이키는데 식당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선 두 사람을 보고 시후는 술을 입안에 머금은 채 정지가 되었다.
“어? 현 과장님 계셨네요?”
진창욱이 반가운 얼굴을 해서는 다가왔다. 진창욱을 따라 들어온 수인도 시후를 보고 머뭇거렸다.
“과장님?”
“아. 네.”
멀뚱하니 서 있는 수인을 보고 진창욱이 불렀다.
“현 과장님도 계시니까 우리 합석해요.”
우리? 우리라고 표현하는 진창욱의 말에 시후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어딜 봐서 그렇게 둘이가 우리란 말인가. 현시후에게 우리란 시후와 수인을 묶어야 옳았다.
그런데 감히 누가 누굴 묶어 우리라는 건지. 이대로 멱살이라도 잡을 표정으로 시후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같이 앉아도 되죠. 과장님?”
자꾸 수인에게 의향을 물어보는 꼴이란. 대체 둘이 이 늦은 시간 함께 다니는 이유가 뭔지 시후는 궁금해서 딱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왜 같이 와?”
“아, 저희요? 저희 지난번 그 치질 환자 보호자 때문에 경찰서 다녀왔어요.”
그 일이라면 분명 시후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힘은 시후가 다 썼는데 왜 진창욱 간호사와 수인이 함께 움직였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수인에게 묻는데 자꾸 곁다리 진창욱이 톡톡 껴들어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 김 과장님이 경찰서 가신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대체 왜? 넌 뭔데 자꾸 수인에게 붙어 다니냐고 윽박지르고 싶었으나 시후는 일단 참았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꾹꾹 눌러 참아왔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어느새 술병이 늘어나고 있었다. 수인과 어색해진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수인도 많이 수척해져 보였고, 시후의 모습은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