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진료실에 문을 닫아 놓은 시후의 마음은 벌써 수인을 MRI 기계에 넣고 정밀 검사하듯 전부 세세하게 살피고 싶었다. 그렇지만 적당한 거리를 원하는 수인을 존중하기로 작정한 터라 그럴 수 없어서 속은 숯덩이가 되어 갔다. 슬그머니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네. 과장님.”
“그 보호자 경찰서에서 어떻게 되었답니까?”
그냥 대 놓고 수인이 어떠냐고 묻고 싶지만, 그것도 그럴 수가 없어서 빙빙 둘러 이야기를 했다.
“그 김남순님도 퇴원해달라고 했대요. 보호자는 병원에 다시 오진 않았다고 하고요.”
시후의 마음을 알 턱없는 간호사는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우. 근데 과장님 오늘 정말 멋있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네요.”
뭐 쑥스러운 이야기는 왜 하는지, 시후는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때마침 입원실 회진 돌려고 가신 게 아주 안성맞춤이었어요. 그죠?”
“네.”
점심시간 전후로 수술 환자가 있어 회진을 늦게 하러 간 것이 도움이 되었을 줄이야. 만에 하나 그 시간에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수인은 더 많이 다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그 보호자 칼 들고 다니는 사람이래요. 오늘 누구든 크게 다쳤다면 어쨌을지 너무 끔찍해요.”
“뭐 김 과장은 다친 거 같던데.”
슬그머니 수인을 언급했는데 담당 간호사는 천사처럼 예쁜 목소리로 상황을 들려주었다.
“김 과장님 입술이 터지고 뺨 안쪽도 좀 터졌대요. 그것 말고는 괜찮다고는 하는데, 원래 하룻밤 잠을 자봐야 아는 거잖아요. 교통사고도 그 즉시에는 모르듯 이요.”
시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었다. 입술만 터진 게 아니고 뺨 안쪽도 터졌고, 목이나 다른 부위도 타박상이 있을지 모른다니 순간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누구는 아까워서 근처도 못가고 만져보지도 못하는데. 그냥 아까 그 황소 같은 놈 손목을 더 꺾었어야 직성이 풀렸을 텐데, 그 생각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꽤 심하게 떠밀렸어요. 그 순간에.”
“그래요? 어쩐지 좀 전에 양 간호사가 엑스레이라도 찍어 보라 그러던데. 많이 다쳤나?”
시후의 눈동자가 바짝 얼어붙었다. 몸이라고 바람에 날아갈 것같이 연약한 수인인데, 그런 수인을 우악스러운 황소 같은 놈이 멱살을 잡아 내리 꽂았다니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뼈라도 다쳤으면 어쩌려고 저리 미련하게 가만있는 건지.
“환자 없죠?”
“네. 끝날 시간 다 됐잖아요.”
환자도 없는데 제 몸 관리나 하지 왜 가만히 있는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들고 글자를 썼다 지웠다만 벌써 열 번이 넘었다. 그러다 겨우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다친 데 없어?」
수인은 시후에게서 온 문자를 받아들고 망설였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끝도 없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던 시후가 딱 멈춘 지 2주 만에 온 첫 문자였다. 겨우 문장부호까지 여섯 자 달랑 온 문자인데 수인의 심장이 파르르 떨려왔다. 답장을 쓰는 손도 떨렸다.
「없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선배도 다친 데 없는지 잘 살펴봐요.」
띠링!
곧장 날아온 답장 문자를 보고 시후는 피식 웃었다. 관심 전혀 없는 것 같더니 그래도 수인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래서 희망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마치 마주 보고 말을 하듯 문자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박수 소리와 함께 공연은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향했다. 복잡한 발소리가 한동안 이어졌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사람들이 다 나간 공연장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정민선은 아직 끝나지 않은 옆 공연장의 실황을 보여주는 모니터 앞쪽으로 이동을 했다. 그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아줌마!”
“어머. 도희야.”
이미 꽃다발을 여러 개 끌어안고 있던 도희에게 정민선은 준비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공연 잘 봤어.”
“감사합니다. 잠깐 협연이었는데요. 뭐.”
제 단독 공연이 아니고 스승의 공연에 찬조 출연이었던 터라 새치름한 얼굴로 도희가 말했다. 정민선은 도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쁘기는 참 예쁜데 항상 가시가 한가득 돋아있는 장미 같은 느낌의 도희였다. 하나뿐인 아들 시후의 짝으로 생각하면서도 저 가시에 시후가 여기저기 상처를 입을까 참 씁쓸할 때가 있었다.
“다 끝난 거니?”
“네. 선생님들끼리 따로 모이신다 그래서요.”
쌀쌀맞은 표정으로 대답해 놓고 아차 싶은 도희가 갑자기 정민선의 팔짱을 끼었다.
“맛있는 저녁 사 주세요.”
“아. 그래. 그러자.”
어색하게 두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예술회관 외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로 정답게 나눌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오늘 정민선이 따로 도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온 길이었다.
그렇게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왔는데, 도희가 먼저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민선은 도희를 한번 쳐다보고 도희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어머, 재건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술회관을 들어서던 재건과 희윤 커플과 마주쳤다. 도희는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재건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곤 입가에 억지 미소를 살포시 얹은 모습으로 희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좀 일찍 오지. 선생님 기다리시는데.”
“병원 일이 원래 그래.”
대답을 하며 희윤이 재건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봐서 재건의 일이 늦어져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도희는 정민선을 돌아보며 필요하지도 않은 설명을 곁들였다.
“아, 어머니도 아시겠네요. 시후 오빠랑 같은 동기 이재건 씨, 이쪽은 제가 사사 받는 선생님의 딸 김희윤.”
서로 서로가 다 아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기에 다들 머쓱한 채 들어주었다.
“어. 그래. 어머니께 공연 축하한다고 전해주고.”
“네. 그럼 살펴 가세요.”
희윤은 도희가 정민선의 팔짱을 착 끼고 매우 친한 척을 하기에 보기가 사실 그러했다. 아무리 속사정을 다 안다 하여도 희윤은 수인의 절친이라서 팔은 자꾸 안으로 굽으니 저렇게 두 여자가 붙어 다니면서 정을 들여가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걷는데, 희윤이 자꾸 뒤를 흘끔거렸다.
“왜?”
“어쩜. 자기야. 뭔가 쎄하지 않았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 재건에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희윤이 물었다. 둔하기로는 땅속 두더지와 친구 격인 재건이 여전히 멍한 눈으로 희윤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 저 여시 같은 도희하고 시후 선배 어머니 말이야.”
“시후하고 도희 결혼한다며?”
아주 속 터지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어 뱉는 재건 때문에 희윤은 지금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팔을 어깨까지 위로 치솟았다 내린 희윤이 재건을 째려보았다.
“자기는 시후 선배하고 수인이 안 보여?”
“어디?”
마치 눈앞에 있는데 못 봤냐고 묻는 줄 알고 두리번거리는 재건이었다.
“아. 속 터진다. 이러니까 둘이 예과 1학년 때부터 베프 였던 거지? 어쩜 이렇게 답답한 게 둘이 똑 같냐?”
“누구?”
한 번만 더 이야기하면 도합 천 번쯤 되는 이야기를 또 못 알아듣고 있었다.
“아우 저 여시 같은 도희랑 이렇게 얽히지만 않았어도. 아우~”
“도희하고 누구?”
“자기는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환자 진료는 어떻게 하는지 진짜 미스터리다.”
길길이 뛰고 싶은 희윤이었지만 엄마의 대기실 앞에 이미 도착해 버려서 더는 싸울 수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재건과 희윤을 마주치고 예술회관 밖을 나온 도희도 새치름한 눈을 내리깔고 표정 관리가 힘들어 보였다.
“뭐 먹고 싶어 도희야?”
“아줌마 뭐 드시고 싶어요?”
예쁜 얼굴을 십분 발휘하여 도희는 예쁘게 웃으며 정민선에게 의견을 물었다. 정민선은 도희의 눈치를 슬쩍 보며 대답을 했다. 어릴 때부터 봤던 아이였지만 남편 현진권이 절절매는 이사장의 고명딸이기도 하고, 워낙 붙임성이라곤 제로에 가깝고 도도했던 도희여서 아직까지 대면대면 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이제 곧 식구가 될 아이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어른으로서 자꾸만 틈을 채워 나가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글쎄. 저녁이라 뭘 먹으면 좋으려나.”
“저녁은 거의 안 먹기는 하는데.”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며 자리를 이동 중인데 도희의 말은 정민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맛있는 저녁을 사달라며 팔짱을 껴댄 것도 도희였다.
“아. 그러니? 그럼 우리 차나 마실까?”
“괜찮아요. 가볍게 샐러드 정도 먹으면 되니까. 그리고 저한테 하실 말씀이 뭐예요?”
성미가 급한 건지 예의를 차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정민선은 적당히 예술회관 앞 레스토랑으로 도희를 데려갔다.
자리에 앉은 정민선은 화장실을 다녀오는 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걸어오는 몸짓하며 생긴 외모하며 천생 여성스러운 도희였지만 도희를 보는 정민선의 시선엔 걱정이 어렸다.
고집이라면 한 고집하고, 뭐든 하겠다 하면 끝까지 해버리는 성격의 시후와 잘 어울릴지, 자신의 아들이 상전을 모시고 살 스타일이 아니란 걸 잘 아는 정민선이기에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너무도 탐스러운 포도였다.
“도희야. 우리 시후 말이야.”
정민선은 조심스럽게 아들 시후 이름을 내놓았다. 마주 앉아 있는 도희의 얼굴이 좀 긴장을 한 듯 보이기에 정민선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말하고 싶었다.
“우리 시후가 일만 하는 애야. 거의 일 중독자인 건 제 아버지와 붕어빵이지. 그러다 보니 별 생각이 없이 살고 있어.”
“알죠.”
시후라면 어릴 때부터 봤던 이웃집 오빠였다. 비록 옆에 사는 정말 이웃은 아니었지만 도희의 아버지가 늘 대 놓고 말하던 도희의 신랑감이었다. 도희는 가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마치 제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하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 그런지 시후와의 결혼에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다만 시후라는 남자가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살짝 걸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 너도 알잖니. 우리 시후가 일만 하다 보니 여자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결혼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네. 그것도 알죠.”
정민선은 속으로 한숨을 내어 쉬었다. 시후가 요란하게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단 한 번도 도희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에 서운하다 할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그래. 그래. 우리 시후가 그렇잖아.”
“그래서 저도 좀 생각을 해봤어요.”
입을 새치름하게 모아 버리는 도희를 보고 정민선은 좀 놀랐다. 대체 시후를 놓고, 아니 이 결혼을 놓고 도희는 무슨 생각을 했다는 것일까. 부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며 정민선은 도희의 입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