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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5)화 (25/88)

25화

얼렀다 달래었다 하소연을 하였다 결국 화를 내며 모친 정민선이 전화를 끊었다. 시후는 따끔거리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시계는 벌써 출근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지만 수인이 숙취에 괴로워하는 건 아닌지 그게 더 걱정이 되었다.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숙취 해소 음료와 따끈한 두유를 두 병 사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시후는 수인의 진료실에 노크를 하였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수인이 입원실 회진을 돌 테니 비어 있을 게 분명했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수인의 진료 책상 위에 숙취 해소 음료와 두유를 놓고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중환자실로 향했다. 

그렇게 2주가 무심하게 흘러갔다. 시후는 수인에게 다가가기를 멈춘 사람처럼 적정한 위치에 딱 멈춘 상태였다. 마주쳐도 업무와 관련한 대화 이상을 하지 않았고, 일부러 찾아다니는 짓도, 일부러 장난을 치는 짓도 딱 멈추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시후를 수인은 이 상태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아프게 말을 했던 게 도움이 되었던지, 아니면 시후가 마음을 바꿔 먹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대로 지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는 거다. 

그 밤이 있기 전 예전으로는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이 슬프기는 했지만 이렇게 조금씩 서로 냉정을 찾아간다면 그가 이도희와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가도 수인은 하객 석에서 박수를 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극단으로 치닫는다면 이 의료원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던 수인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찾으려면 오지로 떠나야 할 테지만, 수술을 꺼려하는 현실에서 전천후 수술을 할 수 있는 일반외과 의사는 일자리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했던 수인이라 시후와 냉전처럼 지내는 지금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래도 시후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보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 중에 하나였다. 수술실에서 서로 보조를 맞춰 갈 때가 제일 곤욕이었다. 

눈빛으로 서로에게 사인을 주고받을 때가 많은데, 시후의 눈을 보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마구 밀려들어 수인이 늘 먼저 피하곤 했다. 그렇게 오전 수술 한 건을 끝내고 오후 진료 시작이어서 수인은 달달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진료실에 있었다. 

이제 막 오후 진료를 시작하려는데, 입원실에서 여러 번 호출이 왔다. 어제 치질 수술을 한 아주머니 환자가 아주 극심한 불편을 호소하기에 수인은 오후 진료를 살짝 미루고 입원실부터 찾아갔다. 

“오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남자 간호사 진창욱도 어깨를 들썩이며 원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원실엔 환자 보호자인 남편이 대단히 화가 난 얼굴로 수인을 쳐다보았다.

“김남순 님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다 불편해요. 다요! 왜 이렇게 아픈 거예요? 수술 잘못된 거 아니에요?”

수인이 의사로서 평이한 질문을 시작하는데 날이 설대로 선 환자가 보호자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잘못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환자의 액션은 비정상적인 것 같았다. 그래도 수인은 친절한 의료진이기 때문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제 수술하셨으니 적응이 아직 안 되실 거예요.”

수인이 친절한 미소를 잔뜩 지은 채 말하는데, 환자 보호자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이 비싼 무통 주사는 뭐 하러 맞으라고 해서는. 다 수술하면 불편하고 그런 거지.”

“무통 주사에 대해서 설명 들으셨지요?”

수인은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는 환자 보호자에게도 애써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환자 보호자는 빤히 수인의 얼굴을 보며 피식 비웃어 보이더니 다짜고짜 고함을 내질렀다.

“그까짓 설명이 대수야? 이 비싼 걸 계속 처 맞고 있으라니. 당신들 돈 벌려고 환장 병들었어? 어? 이게 다 얼마야? 어?”

환자 보호자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수인에게 바짝 다가왔다.

“보호자 분. 무통 주사가 보험은 안 되지만, 환자의 통증을 완화해 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좀 참아도 될 일을 이렇게 무식한 환자 살살 꼬드겨서 돈 뜯어내려는 수작이지 뭐냐고!”

어디서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던지 환자 보호자는 고함을 질러대며 수인을 위협해왔다. 의사 생활 하다 보면 몇 백 원짜리 알약도 비싸다며 항의를 받곤 하지만 이 경우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충분히 설명을 했고, 조금의 통증도 참을 수 없는 환자가 여러 번 요청하여 재차 투여된 주사였다. 

“김남순 보호자 분. 다른 환자들도 계시니 나가서 이야기를 하시는 게 어떨까요?”

오고 가는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목소리도 높아지니 8명이 함께 쓰는 입원실임을 생각해서 수인이 한 말이었다. 지금 이 환자보다 심신을 편하게 해야 하는 환자가 더 많은 입원실이었다. 

“뭐야?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의사면 다야? 뭐 내가 무식해? 어?”

무식의 무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자격지심이 들었던지 환자 보호자는 갑자기 격분하여 입원실 비품들을 발로 걷어차고 포악스럽게 난리를 쳐댔다. 순식간에 입원실의 분위기는 공포로 가득 들어찼다. 

“아이고. 여보, 그만 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그냥 죽었어야 하는데. 아이고. 미안해요.”

환자는 환자대로 서러워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더 자극을 받았던지 보호자는 눈을 하얗게 뒤집었다. 

“하는 게 뭐 있다고 이까짓 수술에다 돈을 쳐 낭비하냔 말이야? 어? 돈도 십 원 못 버는 주제에!”

보호자는 환자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 흔들었고, 수인은 그런 상황을 보고 말리고자 달려들었다.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어제 수술한 환자입니다.”

“내 마누라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야! 네가 의사면 다야?”

요즘도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남자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힘은 또 얼마나 좋은지 다들 말리느라 들러붙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고 환자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칠 것처럼 들어 올렸다. 수인은 더는 안 되겠단 생각에 환자 보호자의 팔뚝을 내리쳤다. 그러자 더욱 격분한 보호자가 수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 지금 나 때렸냐? 어? 이게 그냥!”

“이거 놓고 말해요! 어서 놓으라고요!”

휘청이며 수인의 몸이 종이 장처럼 나부꼈다. 옆에 있던 남자 간호사 진창욱이 수인의 멱살을 잡은 보호자의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이고. 여보, 그만 해요.”

“이정도면 경찰에 신고합시다!”

같은 병실을 쓰는 다른 환자들의 말에 더 격분한 보호자는 수인의 멱살을 잡은 채 자꾸 달려드는 진창욱은 발로 걷어차 버렸다. 순식간에 폭력사건의 현장이 되어 버린 입원실로 간호사들이 몰려왔다. 

덩치가 황소만한 남자 보호자를 어찌하지 못해 다들 소리만 질러대고 있을 때, 갑자기 보호자의 손목이 등 뒤로 꺾였고, 몸이 앞으로 구부러졌다. 그 반동에 수인이 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뭐야! 아! 아!”

시후에 의해 비틀린 손목이 아픈지 보호자는 악 소리를 내었다. 수인은 겨우 진창욱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황소만한 보호자를 단박에 제압한 시후는 걱정스런 눈으로 수인을 훑었다. 

괜찮냐고 묻고 싶은데 말을 삼키는 것 같았다. 수인은 험악한 보호자를 상대로 시후가 다칠까 봐 조마조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 새끼 뭐야? 죽여 버리겠어. 이거 안 놔?”

몸이 구부러진 채 보호자는 살벌한 말로 저항 중이었다. 시후는 오른손으로는 보호자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고, 또 한 손으로는 뒷목을 아래로 누르고 있었다. 진창욱도 힘을 보태어 보호자를 붙들었다. 

“과장님, 조금만 버텨주세요. 경찰 불렀어요.”

간호 부장이 다급한 소리로 상황을 알려왔다. 

“안돼요! 경찰이라니요.”

환자는 결박당한 보호자를 대신해 소리를 질러댔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아수라장 같던 입원실은 경찰이 출동하면서 잠잠해졌다. 경찰에 인계된 보호자는 억울하다며 끝까지 소란을 피워댔다. 

수인은 바닥에 처박히면서 입술 언저리가 부딪혀 상처가 났다. 간호 데스크에서 연고를 바르고 있는 게 보였다. 시후는 안쓰러워 죽을 것 같은 눈으로 보면서 목소리엔 최대한 절제한 티가 났다.

“괜찮아?”

“선배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데 없어요?”

수인은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시후를 살폈다. 시후는 얼굴에도 절제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 사람 가정 폭력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래요.”

간호 부장이 호들갑을 떨며 소식통을 자처했다. 

“과장님 짱 멋졌어요.”

간호사들이 입을 모아 시후를 칭찬했다. 머쓱해진 시후는 그저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돌아섰다. 수인은 시후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섭섭함이 느껴졌다. 

밀어낼 땐 언제고 시후가 좀 식은 온도로 대하니 섭섭함이 느껴지는 이 이상한 심리를 어쩌면 좋을까. 그건 수인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후를 지켜봤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현 과장님,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그러게. 요샌 웃지도 않잖아.”

“무슨 일 있으신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기 거북해진 수인은 상처 난 입가에 조심스레 밴드를 붙이고 데스크에서 일어났다. 간호 부장이 연신 호들갑을 떨어대며 말을 붙여왔다.

“현 과장님 아니었으면 오늘 완전 큰일 날 뻔했어요. 그 사람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데요.”

“진짜요? 하. 진짜.”

수인은 이럴 때마다 정이 뚝뚝 떨어졌다. 아프다고 하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도 부족한 시간인데,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진료실에 내려와 있는데 입원실에서의 그 일이 진료실 주변에서도 회자되고 있었다. 상황을 살피러 자신을 찾아온 간호사들과 말을 주고받으면서 수인은 굳게 닫혀있는 시후의 진료실에 자꾸만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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