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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4)화 (24/88)

24화

새벽 공기가 차가운지 수인이 몸을 뒤척였다. 시후는 흘러내린 얇은 담요를 다시 수인의 어깨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시후는 밤이 새도록 생각에 빠져 있었다. 

수인이 어젯밤 했던 말들은 위기감을 느껴서 하는 말일 테고, 의료원에 찾아왔던 모친 정민선이 수인을 만난 게 분명해 보였다. 혹여 수인에게 상처 되는 말이라도 했으면 어째야 할지 그 생각에 머물다 보니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다. 

“수인아.”

잠이든지 2시간, 그사이 뒤척이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만취했던 것 같았다. 출근하려면 이제 3시간이 남아 있으니 남들 눈에 띄기 전에 집에 들여보내려 했다.

“수인아.”

제 이름에 반응하듯 몸을 다시 뒤척이며 돌아눕는 수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눈을 감고 있는 수인의 얼굴을 이렇게 세세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자그마한 얼굴에 웃는 인상일 수밖에 없는 동그스름한 눈매, 앙증맞게 세워진 콧날, 한여름의 싱그러운 자두처럼 탱글탱글한 입술하며, 웃을 때마다 솟아오르는 광대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수인이었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수인을 처음 봤던 그때가 떠올랐다. 

본과 3학년 PK 실습이라 하여 병원실습을 두 학기 내내 돌았다. 학교를 떠나 병원에서 생활하던 시후에게 마침 학교 축제가 있으니 놀러 가보자는 동기들의 제안에 학교를 오랜만에 간 날이었다. 

의학관 앞에 마련된 조그만 무대 위에서 조그만 여자애가 우렁찬 목소리로 「she is gone」을 열창하기에 이리 오래된 노래를 다 아는 게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고음도 무난하게 훅 끌어 올리며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아서 시후는 피식 웃었다. 그게 시후가 본 수인의 첫 모습이었다. 자그만 등치에 폭발하듯 내지르는 음색이 청아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후가 레지던트 1년 차가 되었을 때 본과 3학년이던 수인이 PK 실습을 나왔고, 시후가 일반외과 레지던트 치프가 되었을 때 수인이 레지던트 1년 차로 들어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12년의 세월이 수인과 시후 사이에 흘러있었다. 첫인상도 지금처럼 예쁘기는 했다. 무대매너도 좋고 가창력이 시원시원했고, PK 실습 나왔을 때도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열심히 일했고, 여자는 안 받는다는 일반외과 레지던트에 1번으로 지원을 했다. 

결국 지원자가 없어 수인이 당당하게 합격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여자라서 열외를 시켜달라거나 봐달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수인이었다. 

늘 시후의 머리에는 성실하고 착한 여자 후배로 있던 수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고, 이 어여쁜 얼굴 못 보게 될까 봐 불안에 떠는 시후가 되어 버렸다. 

시후는 수인과의 첫 만남부터 굵직한 추억에 잠겨 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수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자그마한 얼굴, 사랑스러운 웃는 눈매, 키스 중독을 일으키는 도톰한 입술. 또 다시 슬그머니 뽀뽀를 해주고 싶은데, 시후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수인에게 이끌리는 이 감정이 그저 몸에 끌려서가 아니었다. 이 만큼 잘 맞는 여자를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지금 수인은 시후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날 밤 이후 수인에게 눈을 뜬 건 맞지만 오로지 몸 때문만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것마저 쉽지 않아서 시후는 한숨이 나왔다. 

“수인아.”

“흐응~”

잠꼬대 같은 소리도 예뻐 죽겠다. 왜 이리 늦게 알게 되었을까. 수인이 했던 말대로 참 무디고 아둔한 남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알아봤으면 얼마나 더 많이 행복했을까. 

조금 더 빨리 불붙었다면 지금쯤 이렇게 차 안에서 애가 타게 자는 모습 훔쳐보는 게 아니고 자신의 넓은 품 안에 꼭 끌어안고 따뜻하게 재웠을 텐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아둔하고 무뎠던 자신 본인 탓인걸. 

“수인아. 그만 일어나. 집에 가서 자야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한여름 동은 일찍 터오니, 이제 머지않아 세상이 밝아질 시간이었다. 

어색하게 차에서 내려 사택 계단에 올라섰다. 수인은 인사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갔고, 시후는 중간쯤 따라가다 그냥 되돌아 왔다. 수인이 원하는 거리라면 기꺼이 지켜 주리라.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다가가는 만큼 멀어질까 두려운 시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다가 꼬박 밤을 새워버렸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6시가 넘어있었다. 시후는 휴대전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머나. 시후야. 이 새벽에 웬일이니? 혹시 당직이었어?

모친 정민선은 새벽부터 전화를 한 시후가 이상했지만 일단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아니요. 지금 집이에요.”

- 출근 준비하니?-

병원 생활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듯 전부 아는 정민선이었다. 시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아버지는 출근하셨겠네요.”

- 그럼, 출근하셨지. 누가 아버지를 말리겠니. 새벽 6시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하시잖아.

아버지, 현진권은 내과 의사였다. 어릴 때부터 대대로 의사 집안에 태어난 대로 공부도 잘했고, 의사의 길에 단 한 번도 의심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 의사 생활 반평생을 해왔지만 단 하루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 

시후가 봐온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 저 물어볼 말이 있어요.”

- 응?

정민선은 혹시 수인이 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준 게 아닐까 한껏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시후의 목소리가 무척 딱딱하기에 일단 무엇을 물어볼지 들어보고자 했다.

“어제 의료원 오셨을 때 수인이 만나셨어요?”

- 응? 어. 그래. 수인가 뭐라고 하든?

“왜 수인이 만나셨어요?”

아들이 목소리가 차분하기는 했으나 분명 원망하는 말투였다.

- 응? 아니. 네가 하도 내 말을 듣지도 않으려 하니까. 내가 답답해서 그랬지. 그래도 수인이하고는 얘기 종종 할 거 아니니. 그래서 내가 너 결혼하라고 부추겨 달라고 했다.

변명처럼 말하면서 정민선은 속이 상했다. 그러나 정민선보다 더 속상한 건 시후였다. 그랬던 거구나. 그런 말을 들어야 했던 수인이 마음은 얼마나 속상했을까. 시후는 심장이 쪼여 오는 것 같았다. 하!

“어머니. 왜 그런 말을 수인이에게 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 수인이가 뭐라고 했어? 나는 그냥 너하고 친하게 지내니까.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 달라고 했던 건데. 왜 그리 화를 내니. 그리고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하니? 지금 중요한 건 네가 이 결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야.

시후의 깊은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정민선은 정민선대로 속에서 천 불이 끓었다. 

“어머니. 그만두세요.”

- 어머. 시후야.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올해 하나 내년에 하나 마찬가지 아니니. 그리고 말했잖아. 이사장님이 건강이 안 좋아져서 서두르신다고.

기선 대학재단 이사장이자 이도희의 아버지 이국남은 시후가 초등생일 때부터 사위 삼겠다고 노래를 했던 사람이었다. 위로 아들만 내리 셋, 귀하게 얻은 늦둥이이자 고명딸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이사장에게 사윗감 낙점이라면 시후를 얼마나 잘 보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왜 자꾸 똑같은 말씀만 하세요? 네?”

- 그러니까. 시후야. 나도 같은 말 계속하기 싫어. 그러니까 이제 받아들여. 이사장님이 너 어릴 때부터 그러지 않았니. 우리 사위 우리 사위, 하면서 널 좀 예뻐하셨어? 그리고 이때까지 참 많이 봐준 거잖아. 물론 도희도 결혼 빨리하기 싫다고 해서 지금까지 끌어 오긴 했지만, 어차피 할 결혼이었잖아. 안 그래?

시후를 붙잡고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었던 정민선은 때마침 기회를 잡은 사람 같았다.

“어머니. 저 이도희와 결혼 절대 안 합니다.”

- 어머어머, 얘가 왜 이래? 너희 둘 결혼은 20년 전부터 정해졌던 일이야.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아버지 아시면 큰일 날 소리구나.

목구멍까지 그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김수인과 하고 싶다는 그 말. 그러나 수인이 왜 이리 극구 달아나려고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섣불리 꺼내 놓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머니. 저 결혼 안 합니다. 해도 이도희와는 절대 안 한다고요.”

결혼할 상대가 김수인이 아니라서 못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지만, 시후는 애써 뱅뱅 돌려 말하고 있었다. 

- 도희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 예쁘지 능력 있지. 뭐가 부족해?

“여자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리고 자꾸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소문 좀 내지 마세요.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세요?”

이 말은 모친 정민선과 부친 현진권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시후는 죽어도 김수인과 해야 하는데, 나중에 수인이를 어찌 보려고 이리 일을 벌이시는지 답답한 시후였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정략결혼이 말이 됩니까?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삽니까? 어머니, 더는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마세요. 저는 결혼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고, 더더구나 이도희를 내 짝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 이쯤에서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 정리해주세요.”

조곤조곤하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통보였다. 이사장 멋대로 일방적으로 말을 꺼냈을 것이고, 시후의 부모는 나쁜 제안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시후에게 이리 된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에 얼렁뚱땅 시후를 결혼시키려는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시후가 수인이를 사랑하게 된 지금은 그렇게 얼렁뚱땅 흘러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내막을 소상히 밝힐 수 없는 사정은 시후만 아는 일이지만, 시후가 쏙 빠진 시후 인생을 타인들이 좌지우지하는 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 시후야. 그러지 말고 생각해봐. 그리고 그만한 조건이 또 어디 있니?

결국, 부모님이 나쁜 제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 속마음이 들어나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선 대학교 재단 안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5개의 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의좋은 아들들은 알아서 학교를 나눠 가졌고, 제일 덩치가 크면서 쉼 없이 황금 알을 낳아주는 병원을 운영할 의사 아들은 없었다. 

또한 이도희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전문 연주자가 되기 위해 자라왔기 때문에 병원을 운영할 인물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기선 대학병원 주인 자리에 시후를 밀어 넣으려는 게 아마도 시후 부모님의 생각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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