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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3)화 (23/88)

23화

의료원을 그만둔다고? 분명 또렷하게 들려왔으니 잘못 들었다고 의심할 수 없었다.

“뭐? 뭐라고?”

충격과 공포를 한순간에 느낀 시후가 턱이 빠진 듯 입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수인은 매정하기만 했다. 

“선배하고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오늘은 충격의 연타였다. 수인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다리면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수인이 지금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김수인. 의료원을 그만둔다고? 설마 나 때문에?”

“네. 그게 서로에게 맞는 것 같아요.”

수인은 건조해진 눈을 억지로 비벼댔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러나 벼락을 맞은 시후는 다급했다.

“아니. 이게 무슨. 수인아. 갑자기 의료원을 왜 그만둔다고.”

“진작 정리를 했다면 서로 덜 힘들었겠죠. 선배한테 미안해지기 싫고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뭐가 미안해지기 싫다는 뜻일까. 시후는 속이 꽉 막혀서 금방이라도 식도가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무슨 말이야. 수인아.”

“선배, 나는요. 내 주제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선배 싫다고요. 너무너무 높은 곳에 있는 선배가 싫어요.”

좋다고 붙어 다닌 지 12년, 물론 시후가 허락해 준적도 없고, 알아봐 준적도 없지만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싫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너 혹시 누구 만났어?”

수인이 하는 말들에서 느껴지는 위기감에 시후가 확인할 것이 있었다. 오전 의료원에 찾아왔던 모친 정민선이 혹여 수인을 만나고 갔던 걸까. 있는 말 없는 말 다 붙여서 수인을 위축시켰던 건 아닐까. 

확인하고 싶은 시후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싶은 수인은 창밖을 보며 턱을 괴고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선배는 그냥 멋진 선배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

시후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그 표현이 수인은 너무 좋았다. 아무 여자에게나 친절하지 않고, 아무 여자에게나 환심을 표현하지 않으며, 아무 여자에게나 뜨거운 시선을 주지 않는 멋진 선배 현시후. 

그를 짝사랑했던 12년을 마무리하며 처음 그에게 안겼던 밤을 수인은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거였다. 누군가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더라도 수인의 영원한 첫 남자는 현시후니까. 

무척이나 후회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한 선택 같기도 했다. 그렇게 시후를 오랫동안 새길 수 있을 테니. 

“수인아. 나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수인이 얼른 말을 잘랐다. 상대방을 배려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선배가 누구와 결혼을 하던 난 상관없어. 그런데 자꾸 선배가 이러니까 내가 힘들잖아요.”

하려던 말도 가로채이고, 더구나 내놓은 말이 힘들어? 누구는 안 힘들어서 이렇게 조그만 여자 앞에서 설설 기는 줄 아나. 시후는 순간 머리에서 팍하고 스팀이 터졌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산하는지 좀 알고 싶었다. 

여자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속했지만, 김수인 하나만큼은 탈탈 털어 다 알아내고 싶은 시후였다. 그리고 좀 알려주고 싶었다. 

복잡하게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없고, 이미 자신의 마음 가득 김수인이 들어 차 버렸으니 내뺄 생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싶었다. 

“왜 힘들어? 그냥 나한테 오면 되잖아. 왜 자꾸 힘들어 하는데?”

남녀 사이에 복잡할 것이 무엇일까. 나이와 인종,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는 게 남녀 사이였다. 서로에게 사랑하는 감정 그 하나만 있으면 단 하룻밤의 인연이었더라도 평생을 사랑하며 사는 게 남녀 사이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인간사에 존재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집안의 반대나 엇갈린 운명, 이따위 것들이 사랑을 갈라놓곤 했다. 수인은 좀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냥 어떻게 가는데?”

아주 함축적이고도 직설적인 대꾸였기에 시후의 가슴팍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수인은 아주 버릇없는 사람처럼 내뱉어 놓고 고개를 쌩하고 돌려버렸다. 

하늘 같은 선배한테 큰소리엔 큰소리로 언제부터인가 대응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하지 않았다.

“수인아.”

다시금 차분해진 어투로 수인의 이름을 부르는데, 수인은 신경질이 일어서 그의 팔뚝을 사정없이 찰싹거리며 때려버렸다. 그 목소리에 아주 환장할 것처럼 수인은 이상 반응을 해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수인아.”

“아. 왜?”

수인은 있는 대로 눈 꼬리를 찢어 올리고는 시후를 째려보다가 멈칫했다. 시후의 눈빛이 변해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시후는 가슴 저 깊숙한 곳에 고이 보관하던 말을 당당하게 말했다. 

“수인아. 결혼하자.”

맥이 확 풀렸다. 지금까지 창자가 다 녹아나도록 말했다. 아. 진짜! 이런 경우로 설명하면 들어맞을까? 학교 가는 버스를 탔다. 어라? 이놈의 버스가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딱 그 느낌이었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그런데 깊숙한 곳에 고이 보관하던 말을 방출해 버린 남자는 진지해도 너무도 진지했다. 

“너랑 연애부터 하고 싶었어. 그런데 기다리면 너 달아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너 나 좋아했다면서. 그럼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 하는 거잖아. 그동안 널 몰라봐서 정말 미안했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내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고 해 주면 안 될까. 너도 알잖아. 나 다른 여자 만나고 그런 적 없어. 그냥 일에 미쳐 있었다고 해 주면 안 될까.”

사실 이런 고백을 이런 멋없는 장소에서 하게 될 줄 몰랐고, 현시후 인생에 단 한 번도 이런 고백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역시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다 해낼 수 있었다. 수줍게 고백하는 시후만큼 그 고백 듣고 있는 수인도 묵직하기만 했다. 

진심만 가득 들어 있는 시후의 말이란 걸 수인은 너무 잘 알았다. 여자에게 도통 관심이 없었던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느라 수인을 못 알아본 게 아니란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저 여자에도, 결혼에도 관심이 없이 외과 의사로만 살아온 시후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수인이었다. 

“수인아. 더는 안 되겠어. 너 때문에 나 딱 미치겠다. 나 한 번만 살려주면 안 될까.”

목소리마저 애절했다. 

이 남자 이렇게 약하게 나오면 어떡하나. 해야 할 지독한 말이 남았는데, 꼭 오늘 해야만 하는데. 

수인은 눈물이 날까 봐 고개를 차창으로 돌려버렸다. 

“수인아. 나 받아줘 제발. 앞으로 120년 더 잘할게. 응? 우리 이렇게 정답게 살자. 매일 매일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해줘라. 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이 생겼어. 너하고 같이 살고 싶다. 너 닮은 아이도 갖고 싶고. 우리 수술 방에서도 환상이잖아. 이래도 나 안 될까?”

아, 딱 미칠 것 같았다.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현시후는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킨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드라마 대본에 있는 대사를 흉내 내란다고 이렇게 낼 수 있을까. 

시후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수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눈을 맞추고 싶었고, 그녀가 허락해 준다면 사랑의 맹세를 뜨거운 키스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인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시후를 보지 않았다. 

“수인아. 나 좀 봐. 응?”

애절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수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수인아. 사랑해.”

눈을 감고 있는 수인의 가슴이 떨리는 게 보였다. 억지로 울컥하는 감정을 참고 있는 것도 보였다. 시후는 정말 끝장을 내버리고 싶은 장수처럼 휘몰아쳤다.

“우리 결혼하자. 응?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넌 대답만 해. 내가 다 할게.”

“뭘 다할 수 있는데요?”

차분하고 냉랭한 말투로 꾹꾹 참아왔던 수인이 대꾸했다. 시후는 얼른 대답을 준비했지만, 수인이 한발 빨랐다.

“나하고 자고 싶어서 그래요? 나 안고 싶어 죽겠다면서요? 그럼 얼마든지 그렇게 해요.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할까요? 지금?”

화가 난 목소리는 차 안에 쨍쨍하게 울려 퍼졌다. 당황한 시후는 갑작스럽게 수인이 멋대로 몰고 가는 상황에 긴장을 했다. 날카롭게 말하던 걸로 모자랐는지 수인은 블라우스 단추를 성급하게 다 풀어내었다. 앞가슴을 다 풀어헤치고 이제 막 블라우스를 벗으려던 차인데 당황한 시후가 수인의 손을 움켜잡았다.

“왜 그래? 수인아.”

“책임지라면서요? 선배 덮친 건 나니까. 그 밤 이후에 내가 좋아졌다면서요? 하고 싶은 게 이거 아니에요? 해요. 얼마든지. 허락하니까 선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고요.”

수인이 자신의 손을 움켜잡았던 시후의 손을 제 가슴 제일 봉긋한 부분 위에 올려놓았다. 탱글탱글한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졌지만 시후는 손을 빼내었다. 

“너. 나를 그 정도로밖에 안 본 거니?”

시후의 말속에 실망감이 한가득 들어 있었지만 수인은 물러설 수 없었다. 시후가 받을 충격을 안쓰러워하면 할수록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만 길어진다고 생각했다. 

“결국 선배도 그냥 남자였어요. 내가 선배 먼저 건드렸으니까 선배도 나하고 자는 게 싫증날 때까지 우리 만나요.”

한숨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시후는 차에서 내렸다. 허리를 손에 올리고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분을 삭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인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막장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시후에게 바닥 같은 여자로 보이기 싫었다. 왜 이 지경까지 신파 놀이를 하게 되었는지 다 말해 버리고 싶었다. 

오늘 당신의 엄마가 나를 찾아와 시후와 도희가 결혼할 수 있게 옆에서 부추겨 달라 부탁했다는 말을 다 해버리고 싶었다. 이도희가 도도한 얼굴로 아버지를 언급하며 힘들게 하겠다는 폭언을 했던 것도 다 까발리고 싶었다. 

하지만 수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요령을 부려보아도 뚫을 수 없는 일이라면 단념하는 게 덜 아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인은 스르륵 잠이 들어 있었고, 시후는 이미 사택에 도착해 놓고도 수인을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자정을 훨씬 지나 새벽이 되어 가는데, 시후는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고, 잠이 든 수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김수인, 도대체 이렇게까지 피하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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