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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2)화 (22/88)

22화

너는 너, 나는 나? 우리가 아니고? 왜 자꾸 우리가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시후의 흐뭇했던 얼굴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어떻게 이리도 한결같은지, 시후는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다. 

“뭐?”

“아. 진짜! 한 번에 딱 좀 알아들으라고요. 몇 번을 말해? 모양 빠지게.”

취기가 올라오긴 했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려 얼마나 두 눈 부릅뜨고 한 이야기인데 시후는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토를 달았다. 

“또 내 갈 길 가라는 그 말이야 지금?”

“다 들었으면서.”

듣기평가도 청력 테스트도 아니지 않은가. 누가 말소리를 못 알아들었을까. 시후는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렇게도 자신의 마음을 진정 알아주지 않으려는가. 시후는 요즘 반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12년 동안이나 수인을 그저 공기처럼 존재하는 후배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아둔함을 반성하고, 수인이 질려 버릴 동안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의 미련함도 반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은데,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은데 자꾸만 수인은 멀어질 궁리만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지난 주말 서울에 간 일이 이렇게 후회막급이 될 줄 몰랐다. 그저 수인을 보기 위해 갔던 서울인데, 부모님에게 결혼 독촉을 받아버렸다. 무턱대고 지금까지 버티듯 결혼에 뜻이 없다는 말로는 이번엔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주말 내내 부모님과도 감정 다툼을 하고 도망치듯 내려온 의료원이었다. 수인을 만나면 망가져 버린 감정이 그래도 위안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인은 망가진 감정을 아예 소생 불가로 만들어 버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김수인. 나도 분명하게 말하는데.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그렇게 딱 이분법으로 절대 나뉠 수가 없어졌다고. 알아들어?”

억지라면 질리게 들었다. 하다하다 금쪽같은 제 새끼 임신해서 튀면 어쩌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수인은 술기운이 올라오는 데다 입안이 말라 물 잔을 미친 듯이 들이켰다. 큰 잔으로 가득했던 물을 시원하게 다 비운 수인이 소리 나게 테이블 위로 물 잔을 내려놓았다.

“와. 진짜 이기적인 남자 여기 또 있네. 우리 아버지만 이기적인 줄 알았는데 현시후도 장난 아니다. 이봐요. 현시후 선배님. 그럼 결혼은 이도희와 하고 나는 뭐 불륜녀로 있어라 뭐, 그런 말입니까? 예?”

수인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이런 추잡한 단어까지 들먹이며 말하기 싫었는데, 자꾸 말귀를 못 알아듣는 시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게 어디 우긴다고 될 일이냐고. 

현시후의 모친이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수인이 아는 그라면 길길이 날뛰며 모친 정민선에게 따지려 들것이고, 중간에 끼어 버린 자신은 그야말로 사면초가가 될게 뻔했다.

그러다 시후가 수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잘못 발설이라도 한다면 자신은 아주 시궁창에 처박힌 꼴이 될테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서 수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시후도 이젠 옆 테이블에 민폐를 끼쳐 미안하지만 할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야 인마!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누가 결혼한대? 하면 너랑 하지 내가 왜 이도희와 결혼을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결혼 얘기도 쉽게 꺼내고 있는 시후였고, 수인은 그런 시후가 대 놓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미쳤어!”

모든 일들이 말처럼 쉬우면 왜 다들 부자가 안 되냐고. 왜 다들 대학 수석 합격을 못하냐고. 말은 쉽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인생이란 걸 시후는 진정 모르는 걸까. 하도 곱게만 자라온 왕자님이기에 세상 무서운 걸 모르는 걸까. 속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수인은 이도희의 얼굴과 정민선의 얼굴이 떠올라서 고개를 세차게 저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시후의 감정에 불을 탁 붙여 버렸다. 

“뭐가 미쳤어? 그럼 내가 너하고 막 그래놓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걸 진짜 바란다는 거야 뭐야?”

적나라하게 그 단어를 막 끄집어내서 말하고 싶었으나 시후는 맨 정신이었고, 옆 테이블 노부부가 하도 조용히 식사를 하시니 이쯤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좀 해요.”

“누가 시작했는데?”

시후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마침 옆 테이블 노부부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후는 목 인사를 하며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다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수인을 향해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었다.

“야. 김수인. 너 오늘 안 되겠다. 이래저래 힘든 거 알겠는데 말 나온 김에 그냥 속 시원하게 다 하자. 이렇게 네 눈치만 보고 있는 나도 미치겠고. 나가자. 나가서 오늘 끝장을 내자.”

참고 또 참고 있지만, 주말 내내 부모님께 볶이고, 오늘 오전 모친까지 의료원에 찾아와 이도희와의 결혼을 밀어붙이니 시후도 이젠 숨 쉴 틈조차 없어진 것 같았다. 그나마 수인을 보며 천천히 라도 진전 있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 나가서 끝장을 내자!”

시후는 시후대로, 수인은 수인대로 다른 입장만이 존재하기에 평행선을 내리긋고 있지만 수인은 제법 용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휘청하며 테이블에 손을 짚는 수인을 보고 시후는 한숨이 팍하고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주량을 훨씬 웃도는 양을 혼자 마셨으니 안 취한 척 하고 있지만 취해가고 있었다. 시후는 다시 수인을 의자에 눌러 앉히고 얼른 계산을 하고 돌아왔다. 술의 알코올 성분을 날리듯 날숨을 연신 쉬어대는 수인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날 수 있겠어?”

“당연하죠.”

수인이 일어나 멀쩡하게 섰는데도 시후는 수인의 허리를 감싸 잡았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가느다란 허리를 하고 오늘 하루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생각하니 짠해졌다. 그런데 허리를 비틀며 수인이 거부를 해댔다. 

“어? 왜 이래요?”

다른 검은 뜻을 품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기에 시후는 당당하게 비틀어대는 수인의 허리를 당겨 잡았다.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어 주었으면 했고, 조금이라도 그녀의 지지대가 되어 주고 싶었다. 

“가자. 오늘 끝장내기로 했잖아. 가자고.”

“그래. 가자! 끝장내자고!”

이건 취한 게 맞는데 이상하게 아닌 것도 같고, 알쏭달쏭하지만 일단 수인을 부축해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휘청이면서도 시후의 손길을 막 밀어내며 수인이 걸었다. 시후가 얼른 차 문을 열어 수인을 태웠다. 그리고 뛰다시피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 시동을 걸었다. 

“일단 가자. 어디로든 가서. 오늘 아주!”

“그래! 가자고요!”

끝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 수인이 삿대질을 해대며 움찔거렸다. 시후는 쓱 돌아보며 차창 문에 머리를 처박으려 드는 수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눈만 깜빡이던 수인은 시후의 손바닥을 이마로 힘주어 밀어댔다. 

“아후! 이렇게 해봐. 벨트 매자.”

불 위에 오징어처럼 힘을 빡빡 줘가며 몸을 꼬아대는 수인을 의자에 눌러 앉히고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얇은 블라우스 위로 벨트가 당겨져서 정확하게 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며 도드라지게 만드니 시후는 순간 헛기침을 해댔다. 

“뭐. 안 예쁜 데가 없어?”

혼잣말처럼 하고는 이성을 찾으려 얼른 시선을 옮기는 시후였다. 고개가 비스듬하게 꺾여 가는 수인의 목을 보고 시후는 피식 웃었다. 눈은 스르륵 감겨 있고, 숨소리는 새근거리기에 똑바로 해주려다 촉촉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어 마른침을 삼키었다. 시후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도 아주 잠시, 다시 수인의 얼굴까지 다가왔다. 

시후는 수인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자기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망설였다. 남자의 자제심이 조금 더 벌어진 수인의 입술 사이 새빨간 색감에 그만 무너져 버렸다. 

시후는 살포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술 냄새가 풍겨 왔지만 뭐라도 미치게 좋았다. 이리 예쁠 줄 왜 몰랐을까. 

더 화끈하고 더 격렬하게 키스해대고 싶지만 시후는 살며시 입술 위에 입술을 지그시 붙였다가 떼어내었다. 너무 안고 싶어 죽겠지만 그만큼 또 아껴주고 싶은 시후였다. 

“예뻐 죽겠네.”

그때, 수인이 눈을 번쩍 떴다. 시후는 혹시 입맞춤을 몰래 했다고 혼이 날까 눈치를 살폈다. 

“갈까? 김수인 자는 거야?”

“나.”

수인이 휴, 하고 입안에서 바람을 만들어 내뱉었다. 시후는 출발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수인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왜?”

“나. 쉬 마려운데.”

만화영화에서 보면 유리창이 와장창 깨어지는 장면이 나오는 그 순간인 것 같았다. 시후는 고개가 툭하고 떨어졌다. 편하게 대하며 살아온 세월이 있었지만, 분명 시후와 수인은 더러운 꼴 여과 없이 보여주는 남매지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같이 사우나를 다니며 등을 밀어줄 수 있는 동료지간도 아니었다. 

“에효. 가자. 화장실.”

시후는 친절하게 수인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함께 걸었다. 그래, 생리 현상이 뭐 어때서.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이보다 더한 것도 많았다. 

시후는 인턴 시절 점잖은 할아버지가 고통을 호소하기에 원인을 몰라 당황하다가 관장을 해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수인이 세수까지 하였는지 말간 얼굴로 나왔다. 앞에 보초를 서 있던 시후가 다시 수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가자.”

“왜 손은 잡고 그래요?”

어? 술이 완전히 깬 목소리였다. 이미 밤은 깊어갔고, 주차장에 있는 차는 시후의 차뿐이라 볼 사람도 없는데 수인은 매몰차게 손을 빼내 버렸다. 

“손이라도 잡자.”

또 얼른 쫓아가서 시후가 손을 잡았다. 또 빼내 버린 수인이 살벌하게 시후를 째려보았다. 

“자꾸 질척거리지 말아요.”

“질척?”

생전 시후 인생에 질척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그러나 질척이건 찐득이건 무슨 말을 들어도 손을 꼭 잡고 싶었다. 

“그럼 키스해도 돼?”

“헛! 아까도 자기 맘대로 남의 입술에 키스 막 하고. 진짜 이 양반 신고를 당하고 싶지?”

“어? 내가 키스했었나?”

시후는 슬금 눈치를 보았다. 차 안에서 안전벨트 메어주다 살짝 입술에 뽀뽀만 했는데 알았던가. 거뜬했던 체면이 구겨지는 것 같았다. 

“아 몰라! 됐고요. 자꾸 선 넘지 마요. 경고야!”

“선은 누가 먼저 넘자고 했는데?”

수인은 걷다가 딱 멈추었다. 이 남자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절대로 제 갈 길로 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분명 오늘 끝장을 내버리자고 했다. 김수인과 현시후 사이에 끝장은 이 한 가지였다.

차 시동을 켜 놓고 출발하려는데 수인이 시후의 팔을 잡았다.

“이야기하고 가요.”

억지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 척하고 있지만 사실 수인은 취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신 줄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 말해.”

시후도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몸을 옆으로 돌려 수인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따뜻한 눈빛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수인이라 아무리 지금 억지로 정신 줄을 잡고 있는 중이라 해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선배, 나 의료원 그만둘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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