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21)화 (21/88)

21화

세게 받아치는 수인이었지만, 시후는 헤벌쭉 웃기만 했다.

“우리 얼른 먹고 집에 갈까?”

언제부터 현시후라는 남자가 저리도 모지리가 되었을까. 대 놓고 까칠하게 구는데도 틈만 나면 선을 넘어오려 안달이 난 남자 같았다. 

“현시후 선배님.”

수인은 취가 올라와서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술을 배울 땐 즐거울 때 마시기로 했는데, 살다 보면 딱 그럴 수 없을 때도 많은 것 같았다. 지금이 그러한 순간이기는 했으나 술기운을 빌릴 수 있어서 수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선배님은 아빠가 좋아요? 엄마가 좋아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수인의 얼굴에 홍조가 띠어서 더 예뻐 보였다. 시후는 수인과 눈을 맞추며 함께 히죽 웃었다. 실없는 질문도 웃기고, 웃고 있는 수인도 웃기고. 사실은 대답하는 시후가 제일 웃겼다.

“난 김수인.”

“멍충이.”

진심인데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는 수인이 야속했다. 그렇다고 겨우 몇 주 전만 해도 선배님, 선배님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후배가 감히 하늘같은 직속 선배를 멍충이라니. 시후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눈이 동그래졌다.

“뭐?”

“아. 진짜.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 묻는데 왜 동문서답을 하고 난리래?”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딴 질문을 하는 넌 뭔데?”

치! 암튼 한마디도 안 져주지. 수인은 콸콸 따라 부었던 소주를 꿀꺽 넘겼다. 

“그러니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엄마 속을 썩이냐고요!”

“아주 사돈 남 말 한다. 너는 나이가 몇인데 선배 속을 이렇게 다 홀랑 뒤집어 놓는데?”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진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옆 테이블에 있던 노부부까지 깜짝 놀라서 시후와 수인을 힐끔거렸다. 그제야 시후가 머쓱한지 옆 테이블 노부부에게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엄마 말 잘 들으라고요. 다 자식 위해서 하는 소리니까.”

테이블에 두 팔을 교차해 올린 수인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했다. 시후는 얼른 소주병의 남은 술을 확인하였다. 벌써 2병을 혼자 마신 수인은 그녀의 주량대로라면 이대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취했을 텐데 이상하게 정신이 말짱해 보였다.

“수인아. 괜찮아?”

“아 쫌! 그렇게 부르지 마!”

고개를 번쩍 쳐들고 고함을 지르는 수인 때문에 시후는 화들짝 놀라서 자동적으로 옆 테이블에 시선이 갔다. 상황을 이해한 듯 노부부는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수인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징그럽게.”

수인은 툭 내뱉고는 남아있던 소주를 벌컥 들이켰다. 시후는 얼른 잔을 빼앗아 보았지만 정확하게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게 소주 2병이 몽땅 수인의 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징그러워? 야 인마. 내가 어딜 봐서 징그러워?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

“그렇겠지? 호호호 현시후 씨 너무 잘 생겼어요~ 현시후씨 미남이세요~ 요따위 말이 사람 다 버리게 만들었어. 다 버렸어!”

이번엔 고기를 한꺼번에 세 점을 집어 수인은 입안에 쳐 넣고 우물거렸다. 딱, 취해가는 1단계가 맞았다. 이상하게 마른 체형의 수인인데 술만 취하면 위장이 두 배는 늘어나는지 폭식에 가깝게 먹어댔다. 시후는 한숨을 훅하고 쉬었다. 제발, 그녀를 덮치지 않게 도와주소서. 

“그만 가자. 너 취했어.”

“아직 안 취했어요. 그리고 아직 할 말 남았다고요.”

수인이 손을 번쩍 들어 직원을 부르기에 시후는 수인의 손을 꼭 잡아 내렸다. 

“왜?”

“고기 더 안 먹어요?”

“너 많이 먹었어. 배 만져봐.”

술에 취하면 이상하게 폭식을 하는 수인을 잘 알기 때문에 시후는 말리고 싶었다. 저러고 2단계가 픽 쓰러지기 때문에 정신이 있을 때 얼른 집에 데려다 줘야 했다. 시후가 배를 만져보라니 수인은 술에 취해 동작이 어설퍼지면서 왜 가슴부터 더듬어 내리는지, 보고 있는 시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건 가슴이고.”

“하하하. 내가 체스트도 구분 못 할까. 하하하.”

웃으면서 여전히 탱탱한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어 대니 시후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체스트 라기 보다 브레스트지. 라지 브레스트.”

말을 해 놓고 시후는 괜히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급히 물 잔을 비운 시후는 그만 수인을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런데 수인은 자꾸 손을 번쩍 들어가며 술을 더 시키려고 했다.

“여기 소주 1병 부탁합니다.”

혀는 점점 꼬여가면서도 예의는 차리고 있어 마주 앉아있는 시후는 기가 막혔다. 저리 예의를 차리는 여자가 왜 요즘 시후에게는 시베리아 벌판보다 차갑게 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 왔다 하니 고마웠고, 몰라봐서 미안했고, 이렇게 잘 맞는 남자와 여자로서 앞으로 잘해보자 손가락 걸어주면 좋으련만, 수인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놀이동산의 예쁜 풍선 같았다. 

“술은 그만. 수인아. 이제 그만. 안 그럼 오늘 진짜 덮칠 거야. 술 더 시키면 덮치라는 허락으로 받아들인다. 알았지?”

길게 이야기를 했으니 알아 들었으려나? 시후는 눈이 거물거리는 수인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뭐라고? 그러라고? 알았다고? 이게 웬일이지? 시후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수인을 보았다. 다시 확인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수인이 말을 이었다.

“술은 그만. 정신 있을 때 이야기해야지.”

와, 김수인 그새 술이 늘었나. 주량을 훨씬 넘었는데 혀가 살짝 꼬이기는 했으나 말소리는 분명하고 정신도 말짱한 것 같았다.

“현시후 선배님.”

“왜 또?”

슬그머니 화를 내는 시후였다. 뭘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여자가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 된 상태라면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중의 남자가 현시후였다. 

절대 수인이 술에 취해 그 밤처럼 유혹해 오더라도 얼굴 손발 잘 씻긴 다음에 양치질시키고 이불 폭 덮어 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른 생활 사나이가 바로 현시후였다. 

“있잖아요. 선배는 외아들이잖아요.”

갑자기 호구조사 타임도 아니고, 도대체 술에 취한 것 같은데 아닌 것처럼 자꾸 떠드는 수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너 왜 그러는 건데?”

“나는요. 선배가, 현시후 선배가 아주 잘난 남자라고 생각해요.”

듣던 중 반갑고도 기쁜 말이었다. 듣는 순간 시후의 광대가 하늘로 승천하듯 치솟았고, 어깨에 힘이 쫙 들어가서 역삼각형 피지컬까지 완벽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좀 더 듣고 싶은 기분 좋은 말인데, 수인은 턱까지 괴고 시후를 은은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헉하고 숨이 막혀 왔지만 시후는 조바심을 눌러 내렸다. 

“나는요. 선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했으면 좋겠어. 훨씬 더 멋있게 살았으면 좋겠어.”

거 참 듣고 있기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래 김수인이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성공할 수 있지. 그건 언제나 자신 있는 시후였다. 지금 오지 산간 수성의료원에 내려와 근무하는 이유, 사실은 아버지에게 반항의 의미도 있었지만 수인의 아버지이신 김정수 원장님을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영원의 짝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수인까지도 이곳에 있으니 2년 전 이곳을 선택해 내려왔던 건 요샛말로 시후의 인생에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생각하는 요즘이었다. 

“내가 성공했으면 좋겠어?”

“네. 그럴 능력 충분하고, 현시후 선배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말하는 수인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수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시후라면 타고난 성품대로, 타고난 배경대로 최고의 위치에서 최고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비록 그 옆에 자신의 자리가 없을지라도, 아니 정해진 대로 시후의 옆자리는 이도희의 자리겠지만 수인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흣! 아. 김수인이 평강공주인 걸 몰랐네. 걱정 마라. 내 비록 바보 온달은 아니지만, 성공할 자신은 늘 있어.”

위트 있게 말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진 시후가 콧잔등을 엄지와 검지로 집었다. 저 모습도 멋지게 보이는데, 왜 자꾸 흐릿하게 보이는지, 수인은 얼른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닦아 내었다.

“선배, 우리 아버지 소원이 뭔 줄 알아요?”

김수인, 이제 보니 술이 세진 게 맞았다. 정신이 아주 맑고 또렷하기만 했다. 시후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수인이 아버지 김정수 원장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는 온 우주가 다 아는 일이었다. 

“뭔데? 혹시 예쁜 딸 시집가는 건가?”

김칫국 항아리 채 들이마신다 해도 기대에 찬 질문이었다. 제발 손뼉을 마주 쳐주기만 해봐라. 내 당장 김수인 유부녀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그리 생각하는 현시후였다. 

“그딴 거 아니고요.”

그딴 거라니,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하는 짝을 만나는 일, 그게 그리 중요한지 시후도 얼마 전부터 생각해보는 일이지만, 꽤나 중요한 일임을 수인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리고 김수인 벌써 서른도 넘었잖아. 한살이라도 어릴 때 같이 살아야 재미있지 않겠어?”

혼자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몸을 배배 꼬는지 시후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수인은 제 할 말만 하고 싶은 듯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 소원은요. 제가 아버지 다음으로 자선 의원 원장 되는 거래요. 우리 아버지 완전 이기적이지 않아요?”

하! 생각도 못 해본 이야기라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김정수 원장님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이해도 갔다. 

한때는 언론에 자주 등장했고, 간판급 의사로서 거느린 제자만 새까맣게 줄을 지었던 분이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비장을 떡 주무르듯 절제하고 봉합하는 술기가 유명한 외과 의사였다. 

“그래. 보람 있는 일이지. 너라면 잘할 거야.”

“맞아. 이기적인 아버지 소원이지만, 그게 나의 길일 것 같아요. 나는 그길로 가려 해요.”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들이 오간 것 같았다. 전에 수인이 시후를 밀어낼 때 분명 그랬다. 선배는 선배 인생 살고, 저는 저 인생 살겠다고. 시후는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수인이 종교에 귀의하는 그런 기분이 살짝 들기는 하였으나 의료봉사라면 시후도 적극 찬성인 의사인지라 수인이 그런 숭고한 자리를 맡겠다고 한다면 전폭적인 지지를 해줄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

분명, 시후의 허락 따위가 필요한 관계가 아직은 아니었지만, 시후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흔쾌히 답을 내었다. 

“그러니까. 선배는 선배 갈 길 가시라고요.”

아니, 이게 무슨 지붕 무너지는 소리인가. 시후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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