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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20)화 (20/88)

20화

그저 두 다리로 서 있기에 서 있는 줄 알지만, 수인은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고 서 있는 중이었다. 시후는 수인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수인을 자기 차에 태웠다. 

“우선 밥부터 먹자.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응?”

그렇게 다정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정하게 어깨를 잡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다린 걸 뻔히 아는데 또 옥신각신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냥 그가 하는 대로 있을 뿐이었다. 변덕을 부릴까 걱정이 된 시후는 얼른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의료원을 급하게 빠져나오면서 시간을 확인하였다. 늦어도 꽤 늦어져 버려서 마음이 급했다. 

“고기 먹자.”

저녁 메뉴를 시후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대도 수인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게 맞는지 시후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대답 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수인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수인은 한 줌의 힘도 없는 사람 마냥 차 안에 쥐죽은 듯 앉아 있지만, 손을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손을 빼버리는 수인을 시후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은 능글맞게 나올 수 없던지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가득한 채 읍내로 차를 몰아 소고기 전문점 앞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었는데도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수인을 보며 시후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수인아.”

제발!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수인은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려버렸다. 주책없게 나오는 눈물을 얼른 훔쳐내며 오늘 하루 너무 힘들어서, 환자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데 한번 터진 눈물을 끝없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수인의 마음에 굳어 있던 감정이 다 녹아 나오는 듯 손으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시후는 수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거부하고 싶은데 너무도 따뜻하고 듬직하고 단단한 손의 힘이기에 수인은 고개조차 내릴 수 없었다.

“많이 속상했지? 나도 속상했어.”

수인도 수인이었지만, 시후는 숨이 꺼져가는 환자를 살려보겠다는 그 신념 하나로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2시간 넘도록 사투를 벌였었다. 그에게도 환자를 잃은 것은 허무하고 텅 빈 감정일 것이었다. 의사이기에 서로만 아는 허무함, 둘만 알아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텅 빈 감정이었다. 

수인의 마음을 보듬듯 속상했냐는 말에 그녀의 소리 없이 흘렀던 눈물이 이제는 통곡이 되어 버렸다. 

엉엉 울어 버리는 수인의 눈물을 시후는 가만가만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내었다. 눈을 감고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수인의 입술에 시후는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얹었다.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위로의 키스. 

그의 키스가 점점 깊어졌다. 수인은 더 눈물이 났다. 좋아죽겠다. 밀어내야 하는데 도저히 밀어낼 수 없을 만큼 시후의 키스가 좋아죽겠다. 무아지경으로 빠질 만큼 격정적인 키스가 되어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더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데, 미치겠다. 좋아서 미치겠다. 싫어서 미치겠다. 

수인은 시후의 와이셔츠 옆구리를 꽉 움켜잡았다. 더 깊이 들어오는 그를 막아야 했다. 그에게 싫다고 해야 하는데, 그만하라고 거부해야 하는데, 몸은 그의 입속에 전부 빨려 들어가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후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인지 수인의 탱글탱글한 입술만 보면 달려들어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수인이 어린아이같이 울음을 터트리기에 시후의 심장은 더 미칠 듯이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허락도 없이 입술에 키스를 해 버렸지만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싫다고 할까 봐 마음마저 조급했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이대로 키스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아 멈추어라. 제발. 김수인의 입술도, 김수인의 눈물도 너무 맛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다른 차량이 아니었다면 둘은 끝도 없이 서로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는 키스를 했을 것 같았다. 차량 불빛에 정신이 든 두 사람이 급하게 입술을 떼어 내었다. 

“드, 들어가자.”

시후가 수인의 등을 감쌌다. 수인은 자신의 눈물범벅인 얼굴과 시후와의 키스로 번진 입술을 연신 손으로 닦아 내며 걸었다. 

“화장실 좀.”

“어. 그래. 다녀와.”

가게에 들어선 수인이 화장실을 찾았고, 시후는 자리로 안내되어 얼른 메뉴판부터 찾았다. 수인이 힘을 좀 낼 수 있게 든든하게 어서 빨리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꽃 등심 4인분하고, 계란찜 주세요.”

화로불이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수인은 아직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된 시후는 가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때마침 나오는 수인을 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시후의 눈에는 울어서 통통 부어오른 얼굴마저도 예뻤다. 어느 한 곳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너 좋아하는 계란찜도 시켰어.”

마주 앉아서도 얼굴을 들지 않는 수인에게 시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고, 수인은 고기를 굽고 있는 직원에게 술을 주문했다. 

“소주 하나 주세요.”

“술 마시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시후에게 여전히 수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직원이 술잔과 소주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수인은 테이블 위에 있는 소주를 집어 들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드르륵 따 버렸다. 시후는 오늘 응급실 콜을 받는 날이라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오늘 응급실 콜이죠?”

화가 난 사람처럼 대답도 없던 수인이 시후에게 물었다. 술을 혼자 마시려니 미안한 마음은 있은 듯했다. 

“응.”

“그럼 나만 한 잔 할게요.”

수인은 소주잔이 아니라 커다란 음료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고기를 구워주던 직원도 좀 놀란 표정이었고, 직원보다 백만 배는 더 놀란 시후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음. 천천히 마셔. 응?”

빈속에 소주부터 마시고 있는 수인이 걱정된 시후가 계란찜을 권했다. 그러나 까맣게 시후의 속을 다 태워버릴 작정인지 수인은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고집스럽게 또다시 술만 들이켰다. 고기가 익어 앞 접시에 놓이는데, 도무지 시후는 답답해서 안 될 것 같았다.

“저. 제가 구울게요. 감사합니다.”

직원이 들고 있는 집게를 서둘러 빼앗듯 시후가 집어 들었다. 옆에 붙어 서서 고기를 구워주는 건 고맙지만, 수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시후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직원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제야 시후는 수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었다.

“고기 먼저 먹어. 응? 왜 술만 마셔.”

수인의 앞 접시에 이미 고기로 넘쳐 나는데도 시후는 계속 더 높이 쌓아 올렸다. 

“먹고 있어요.”

“술 못 마시게 안 할 테니까 천천히 해. 응?”

애가 타는 사람이 확실했다. 다정한 선배이기는 했으나 시후는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수인은 달라진 시후가 싫지는 않지만, 너무 좋아질까 봐 억지로 인상을 써보았다. 

“할아버지같이 잔소리 좀 그만 해요.”

그 말이 뭐가 그리 우습다고 시후는 박장대소를 했다. 웃으라고 한 소리도 아닌데 소리까지 내며 웃는 시후를 수인은 째려보았다. 괜히 키스는 맘대로 하고 난리람! 웃는 그의 입술이 수인의 눈에 쏙하고 들어왔다. 수인은 종만 울리면 침을 흘려대는 파블로프의 개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시후의 입술을 보는 순간 수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그리곤 빈 입인데 입맛까지 다시고 있는 수인이었다. 

“고기 먹을 만해?”

“선배는 왜 하나도 안 먹고 나만 줘요?”

“아. 나도 먹고 있어. 너 먹는 거 보는 게 좋아서.”

세상 제일 자랑스러운 아들이 바보 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는 걸 그의 모친 정민선은 알까. 수인은 바보 같이 웃고 있는 시후가 괜히 미워서 소주를 쭉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라.”

“언제는 술 먹지 말라며?”

대놓고 반말에다 대놓고 투정을 부려도 눈이 둥글게 휘어진 시후는 수인의 반말 정도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푹 가라앉는 기분은 기분이고, 아직 수인과 시후 사이에 증명되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그래. 너 아직 나한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미쳤어.”

쫑알거리듯 들리지도 않게 말하고 수인은 시후가 정성 들여 구워낸 꽃 등심을 야무지게 한가득 입에 넣었다. 시후는 정말 어미 새처럼 한 점 한 점 정성을 다해 구워서는 죄다 수인에게 가져다 바쳤다. 

“여기요~”

“뭐 시켜? 고기 더 시켜?”

괜히 시후가 나서서 호들갑이기에 수인은 싹 무시하고 소주 1병을 더 주문했다. 벌써 수인의 평소 주량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맛있는 꽃등심이 든든해서 그런지 술이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집게 질을 하다 손이 욱신거린 시후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했다. 

“애 많이 썼어요.”

숨이 꺼져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어 내 몸이 으깨져도 터져나가도 상관없이 있는 대로 용을 써본 적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을 안타까워하며 애도에 젖어 들었지만, 한편으로 그 죽음을 막으려 죽기 살기로 애를 썼던 이들은 그들만이 서로를 알아주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손은 좀 어때요?”

마음씨 따뜻한 후배 김수인으로 돌아온 것처럼 시후를 보았다. 시후는 오랜만에 그녀에게 관심을 받아 행복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반짝반짝 작은 별 율동이라도 하듯 손을 들어 앞뒤로 흔들었다. 하얀 손등 위에 여기저기 불고 퍼렇게 멍이 든 자국들이 선명한데도 괜찮다고 하는 시후였다. 수인은 시후의 그 노력에 건배를 하고 싶은 듯 잔을 혼자 들어 보이고는 홀짝 한잔을 마저 비웠다. 

“술도 못하는 게.”

“왜? 또 취하면 덮친다고?”

“덮쳐도 돼?”

시후는 싱거운 사람처럼 말하고 또 사람 미치게 만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큰일 날 소리 작작해요.”

술기운이 따뜻하게 돌아서 이제 수인은 가슴 한편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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