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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19)화 (19/88)

19화

정민선이 쏘아 올린 공은 낮지도 높지도 않게 수인의 가슴에 뱅뱅 돌았다. 현시후, 덥석 차지해버리면 차라리 덜 아플까. 그냥 생각 없는 바보처럼 몸이 끌리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가버리면 그럼 덜 아플까. 

현시후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천지가 개벽하는 난리가 날 테지만 탐나는 대로 현시후 그냥 안아 버릴까. 몸을 맞춰봤던 일이 이다지도 후회를 남길 줄 미처 몰랐다. 후회를 남기지 말자며 그날 밤 201호 초인종을 눌렀었다. 

그런데 그와 껴안고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면서 마음이 변해 감을 수인은 취중인데도 느꼈다. 남자와 처음인데도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너무도 사랑했던 그가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싶었고, 그가 먼저 원한 건 아니었지만 안고 있는 순간이 진심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수인은 행복했다. 

당돌하게 먼저 유혹했지만, 자신을 안고 있는 시후가 행복해 보였다. 밤이 새도록 미소진 얼굴로, 행복한 얼굴로 자신을 어루만지던 시후의 모습을 잊어야 하는데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인데 그에게 이도희와 결혼을 서두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잔인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가슴이 아프다 해도 오후 진료가 시작된 시간, 수인은 응급실에 종기 환자를 봐달라는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었다. 응급실 담당 간호사가 1번 베드를 가리 켰다.

“과장님. 39세 남자환자인데요. 엉덩이에 종기가 제법 커서 자기가 만든 고약을 붙였다는데 그게 많이 덧난 것 같아요. 그 때문인지 피버도 있어요.”

“만든 고약이요?”

환자 나이가 꽤 많은 것도 아닌데 성분을 알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섞어 피부에 붙였다니 이상하기는 했다. 

수인은 환자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엎드려 있는 환자의 엉덩이 부분을 만져보았다. 겉보기에도 빨갛게 부풀어 올라있고, 금방이라도 고름이 터질 것 같았다. 또한 염증이 심해서 검게 피부가 상한 부분도 보였다.

“환자분, 초음파 검사부터 하실 게요. 피지낭종이라 해서 종기의 원인이 되는데, 제거를 하셔야 해요. 고름이 많이 들어 있네요.”

적절한 설명을 마치고 엉거주춤 일어나 앉는 환자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바지를 신경질적으로 추스른 남자환자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리고 기분이 나쁜지 무례하게 말을 내뱉었다.

“남자 의사 없어? 아씨. 왜 여의사가 남의 궁둥이를 보고 난리야?”

의사가 된 이래로 이런 경우를 한두 번 겪어 본 일은 아니었지만, 진료 시작 전 정민선으로 인해 가라앉아버린 기분 탓에 수인은 웃고 넘길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너스레를 떨며 말을 꺼냈던 환자들이 미안해할 지경으로 뛰어난 언변을 이용해 기선 제압을 하던 수인이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힘이 나질 않았다. 

이 환자와 마주 앉아 남자 의사니, 여자 의사니, 를 두고 따지며 맞받아치고 싶지 않았다. 친절로는 이 의료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수인이었지만 지금은 깨져버린 마음으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 환자분 앱세스 받겠다 하면 수술실로 올려 보내세요.”

수인은 옆에 선 간호사에게 인계를 해버리고 휙 돌아섰다. 찬바람이 불어대니 비신사적으로 나오려던 환자도 황당한지 눈치를 살폈다. 

잠시 진료실로 돌아온 수인은 밀려있던 외래 환자를 두 명 더 진료하고 준비되었다는 전화 연락에 수술실로 향했다. 이런 종기 수술이야 그냥 극소 마취 한두 곳 하고 나서 바로 피지가 들어 있는 부위를 절개하여 긁어내면 되는 외과수술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수술이었다. 

수술실로 들어선 수인의 귀에 응급상황을 알리는 신호음이 마구 밀려들었다.

“뭐예요?”

“교통사고요. 어떡해요? 구급차 도착까지 20분 남았는데.”

“몇 명?”

“아마 수술실 다 찰 것 같아요.”

이미 엉덩이 종기 환자는 환부를 들어내 놓고 엎드려 있었다. 구급차 도착까지 20분, 그 안에 재빨리 해치우면 응급환자를 받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세워졌다. 

“시작합니다.”

“아직 혈액검사 안 나왔어요.”

간호사는 말은 그리하면서도 종기 수술할 준비는 다 끝내놓고 있었다. 이제 구급차가 몰려 들어올 시간은 15분으로 뚝 떨어졌다. 

“일단 최소 절개로 시작합니다.”

마취가 되어 있는 부분을 수인이 손으로 눌렀다. 피고름이 총알처럼 튀어 수인의 수술복에 묻었다. 수인은 빠른 손동작으로 분출하는 고름을 짜내고, 피부의 일부를 절개하여 고름을 둘러싸고 있는 피지 주머니를 깨끗하게 긁어내었다. 거의 수술이 끝나가고 있는데 수술실 밖에 한 간호사가 다급한 동작으로 사인을 해댔다. 수인을 보조하던 김 간호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여서 꿰매는 도구를 내밀었다. 다시금 수술밖에 있던 간호사가 문을 두드렸다.

“나가봐요. 수쳐 다 끝나가니까.”

보조하던 김 간호사가 수술실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무언가 전해 듣고 황급히 돌아왔다. 

“저. 과장님.”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있어서 수인은 마지막 수처를 하고 바늘을 위로 쳐들었다. 

“커트!”

수인의 목소리에 얼른 가위를 집어 든 김 간호사의 손이 잘게 흔들렸다. 

“끝났어요. 환자분.”

수술실에 들어와 종기를 짜내며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던 수인은 다시금 밝아진 얼굴로 환자를 쳐다보았다. 환자는 긴급하게 오고 가는 간호사를 눈치로 살피며 얼른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김 간호사는 수술 도구를 한꺼번에 여러 겹 싸버리더니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일단 환자를 밖으로 내보내었다. 

환자와 간호사가 나가고 수인은 사용했던 장갑과 환자의 피고름이 잔뜩 묻어버린 수술복을 벗고 있었다. 환자를 데리러 나갔던 김 간호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그리고 걱정되는 얼굴로 수인을 보았다.

“과장님, 혹시 찔리거나 하시지 않았지요?”

“네?”

“조금 전, 앱세스 39세 환자요. HIV래요. 어떡해요.”

하! 에이즈 환자라니 기가 막혔다. 응급실에서 장갑 없이 환부를 손으로 만졌고, 수술실에서는 상처 부위를 째고 피지를 긁어내고 다시 꿰매는 치료를 하였다. 그사이 만약 수인의 손에 상처가 있었다면 고스란히 에이즈에 감염되는 상황이 벌어질 터였다. 

더러는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하기도 하여 힘든 그들이지만 이 에이즈 환자는 감쪽같이 의료진을 기만하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수인은 저 안 깊숙한 곳에서 화가 치솟았다. 자신뿐 아니라 보조했던 간호사에게도 위험을 초래해 버렸다. 

그 사실을 모르고 수술실에 다른 환자를 또 받았더라면, 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게 뻔했다. 끔찍하고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가 치밀어 목소리까지 격양된 수인이 소리를 질렀다. 

“2번 수술실 폐쇄 명령 내립니다. 전체 소독 준비해주세요.”

간호사는 자신도 위험에 처했지만 더 많이 접촉한 수인이 걱정되어 물었다. 

“과장님 괜찮으세요? 상처 나신 곳 없어요?”

“검사 키트 있지요? 김 쌤부터 얼른 검사해 봐요.”

조금 전 격양되어 소리를 질렀던 수인이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아 내렸다. 

이런 일 겪을 때마다 의사로서 한없이 우울해지곤 했다. 의사라면 환자가 아프다고 하는 그 말 하나 믿고 그것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아프다고 찾아왔기에 최선을 다해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정작 믿어야 하는 환자가 의사를 속이곤 했다. 

물론 에이즈 환자라고 다 기피하려는 건 아니었다. 조심해야 할 수칙이 있고,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환자는 의사에게 정직하게 말해야 했다. 그런데 교통사고 환자가 밀려들 상황이라 종기 환자가 2순위로 밀려나게 될 테니 그 때문에 서둘렀는데, 그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참 그러했다. 

그러나 수인에게 수술 도중 미세하게 상처가 난 곳이 있는지 들여다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근 고속도로에서 7중 추돌사고로 아슬아슬 생명이 꺼져 가는 환자만 3명이 넘는 상황이었다. 

2번 수술 방에서 옮겨온 수인은 시후가 맡은 환자도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 보여 불안했다. 도와주러 들어온 수인을 시후가 쳐다보았지만 지금은 심장이 멈춘 환자가 그들 앞에 있었다. 

“제세동기, 벤틸레이터 준비해주세요.”

시후가 심 정지 난 환자 위로 올라가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고, 수인은 환자에게 들어가는 링거를 확인하였다. 일순간 모두의 정신은 심 정지 난 환자에게 쏠렸고, 그 환자를 살려내는 일에만 초집중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다. 의료원에 도착했을 당시에 다발성 출혈이 있었지만 터진 장기 하나씩 잘 꿰매가고 있던 도중이었는데 너무도 안타까워졌다. 역시 환자의 상태는 신만이 아는 일이다. 

집도의 로서 시후는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깍지를 끼었던 손가락 마디마다 멍이 들었고,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그러나 환자에게 달려있는 기계들에서는 어떤 감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후는 깊은 한숨을 남긴 채 2시간 만에 환자에게서 손을 떼었다. 수인은 호흡과 동공반사를 확인하였고, 청진기로 심장박동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8월 23일, 오후 4시28분, 김영식 님 사망하셨습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사망선고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환자만 살아준다면 그 고단함은 보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환자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누구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축 처진 어깨, 무거운 발걸음, 함부로 떼어 낼 수 없는 입, 비통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루가 참으로 길게 이어졌다. 수인은 퇴근 시간을 세 시간이나 훌쩍 넘겨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 이미 불이 꺼진 복도를 조용히 걸었다. 오늘처럼 몸도 마음도 가라앉아 힘이 없는 건 수인답지 못한 날이었다. 어두워진 주차장을 힘없이 걷는데, 시후가 차에서 내려서 다가왔다.

“HIV 검사 음성이라며.”

걱정하는 눈빛으로 수인을 내려다보는 시후였다. 익히 오늘 수인이 겪은 일들을 다 아는 눈치인데, 자신의 모친 정민선이 왔던 것도 알고 있을까. 

수인은 시후와 눈을 맞추고 서 있기 싫었다. 저 눈빛, 오늘처럼 맥 빠지고 힘든 날 얼마나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지 시후는 모르고 있었다. 

수인은 오늘 휘몰아쳤던 힘든 일로 인해 지금보다 더 마음이 흔들린다면 시후에게 울며 안겨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진 굳건하게 잘 견디고 있었다. 

“왜 퇴근 안 했어요?”

“기다렸지. 가자. 오늘 많이 힘들었을 텐데.”

힘든 하루였지, 시작은 현시후 당신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울며 안기게 될까 수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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