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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18)화 (18/88)

18화

수인은 천천히 소리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큰 키에 우아한 옷차림, 현시후와 빼다 박은 외모의 정민선이 서 있었다. 수인은 정민선을 보는 동시에 놀랐지만 일단 냉큼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어. 수인아. 잘 지냈니?”

수인도 기선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받았고, 시후와 붙어 다니던 긴 세월 동안 시후의 모친과 꽤 익숙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정민선은 수인과 시후가 레지던트로 의국 생활을 할 때 시큰둥한 시후를 대신해서 수인을 꼭 불러내어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들려 보냈었다. 그런 인연의 관계였기에 정민선은 수인에게 꽤 친근한 척 하곤 했다.

“안 그래도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어.”

이번엔 또 뭘 들려 보내려고 그러시나. 지금은 궁핍한 수련 생활도 아니고 페이닥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부르는 정민선이 궁금하였다. 그러고 보니 정민선이 수성 의료원까지 찾아왔던 적이 2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곳에서 서로 얼굴을 보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그랬다. 수인의 팔뚝을 정답게 잡고 웃고 있는 정민선에게 수인도 꽤 친근하게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잘 지내지. 수인이는 요새 어때?”

“저도 잘 지내요.”

어느새 다정한 사람들처럼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의료원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어리둥절하긴 했으나 수인은 어찌 되었건 시후의 모친이기에 차라도 대접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뚝 떨어진 의료원 앞에 마땅한 커피전문점은 없었기에 의료원 앞 편의점이라도 모시고 싶었다. 

“여기 편의점밖에 없어서요. 아이스커피 괜찮으세요?”

수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온 정민선이 화사한 꽃처럼 웃어 보였다. 시후의 미소와 판박이같이 닮은 미소여서 수인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아니다. 내가 사줘야지. 수인이 뭐 마실래?”

정민선은 악어 한 마리를 통째로 늘씬하게 눌러 만든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꺼내었다. 

“아니에요. 제가 사드릴게요. 저 이제 돈 벌잖아요.”

“어쩜 그렇게 너는 말도 예쁘게 하니. 그럼 수인아. 나는 아이스커피.”

시후가 참 좋은 유전자만 몰빵 해서 받은 게 분명했다. 정민선은 새하얀 피부에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얼핏 보아서는 60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평생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듯 네일아트를 예쁘게 하고 있는 손마저도 주름 하나 없이 탱글탱글하였다. 

손톱 한 번 길러보지 못하고 손에 핸드크림 한번 제대로 바르지 못하고 사는 수인에 비해 정민선의 손은 아주 우아하기까지 했다. 수인은 공손하게 아이스커피 컵을 정민선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 참, 점심시간 끝나가지?”

“네.”

의사 집안에 시집온 지도 어느새 40년 가까이 되다 보니 정민선은 병원 일이라면 아주 빠삭한 여자였다. 수인은 시계를 확인하니 점심시간이 겨우 15분쯤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빨리 말할게. 사실은 나 도움이 좀 필요해서 수인이한테 부탁하려고 했어.”

처음부터 난감한 느낌이 팍 들어버렸다. 빈털터리 수인에게 부잣집 사모님이 돈을 꾸러 온 것도 아닐 테고, 아들 후배인 수인에게 친구하자고 온 것도 아닐 테니 무언가 불편한 부탁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장난을 치며 부탁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들어볼 생각이었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고.”

늘 어른들이 불편한 부탁을 할 때면 꺼내는 첫마디가 거의 비슷했다. 다른 게 아니라지만 다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보는 수인에게 정민선은 사회적이며 사교적인 억지 미소를 지어 붙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시후 말이야.”

얼른 이야기할 것 같더니 정민선은 아들 이야기에 좀 더 신중하고 싶은지 말을 끊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수인은 정민선이 꺼낸 시후 이름 뒤에 무슨 말이 올지 지금 매우 궁금했다. 

“있잖니. 올해가 가기 전에 시후 결혼을 좀 시켜야겠는데, 얘가 좀 황소고집이니? 결혼을 안 하겠다고 말도 못 꺼내게 하니 이를 어쩌면 좋으니.”

심장이 팍 깨지는 소리를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게다가 원인과 결과까지 죄다 한 줄로 엮어 버리니 수인은 완벽하게 얼어붙었다.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수인은 정민선이 방금 한 말들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자 불쑥 반감이 들었다. 이를 어쩐다니요.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 말하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안 그래도 시후를 억지로 접어야 했던 수인이었다. 억지로 억지로 그렇게 시후를 접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수인에게 와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시후를 어쩌자니. 수인의 상황을 알 턱없는 정민선이지만 너무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해야 했다.

“수인아. 네가 얘기 좀 해줄래? 어차피 정해놓은 결혼인데 좀 빨리 하면 뭐가 어때? 안 그러니?”

정말 너무했다. 수인더러 이야기를 해 달라니, 뭘 어떻게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일까. 수인은 아예 모른 척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후가 결혼을 하던, 시후가 이도희와 살던 이제 수인은 완벽하게 타인이고 싶었다. 

이렇게 정리하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많이 아파했는지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이 결혼에 나서서 도와달라는 말은 자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지 싶었다. 

“응?”

대체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건지. 정민선이 또다시 억지 미소를 지어 붙이며 수인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제가 선배 결혼 얘기를 하면 들을까요?”

“옆에서 좀 부추겨 봐봐. 선배도 얼른 가정을 이뤄야 안정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이야.”

수인에게 섬세하게 코치를 해주는 정민선이었다. 수인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 상황이 너무 잔인한 것만 같았다. 부추겨 달라니, 그 남자를 마음에서 도려낼 때 심장이 다 떼어져 나가는 것 같은 수인이었다. 

수인의 안색이 확연하게 질려갔는데도 정민선은 제 욕심이 먼저였다. 수인을 만난 김에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겠지만, 수인은 지금 온몸이 늪에 빠져 숨조차 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수인에게 정민선은 또다시 자기 말만 해댔다. 

“남자는 가정을 이뤄야 어른이 되는 거라잖아. 어차피 정해진 결혼인데 지금도 빠른 것도 아니야. 안 그러니?”

자꾸만 대답을 강요하듯 말을 이어 가는 정민선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부담스럽다고 대 놓고 말할 수도 없고, 그만 일어나겠다고 쌩하게 대할 수도 없고, 수인은 미칠 듯이 난감했다.

“얘기해볼게요.”

최선을 다해 내놓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밀어내야 하는 이유가 너무 아프고, 밀어내는 행동도 너무 아픈 수인인데, 지금 그런 수인에게 더 큰 짐을 얹어 놓고 있으면서도 정민선을 알지 못했다. 

“그래. 아 참, 너 이도희라고 알지 않니?”

알다 뿐일까. 그 이도희라면 치가 떨리는 수인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제 아버지 백을 믿고 수인을 꽤 괴롭혀 대던 인물인데 잊을 수가 있을까. 수인은 고등학교 시절 전교 회장 선거 결과를 받아들고 교장실에 불려갔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선거운동 당시부터 선생님들도 은근히 후보자 등록을 취소하는 게 어떠냐며, 전교 회장하면 학업에 소홀할 수 있으니 공부만 전념하라고 말도 안 되는 충고를 했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원하고 수인도 꼭 졸업 전에 학교 급식문제 정도는 해결하고 싶은 욕심에 선거에 나섰고, 개교 이래 처음으로 득표율 90%라는 쾌거를 달성하며 전교 회장에 당선되었다. 

새침한 표정의 여교장이 대 놓고 수인에게 사퇴할 마음이 없냐고 대뜸 물었다. 상대 후보였던 이도희가 말썽 없이 전교 회장이 되려면 수인의 사퇴뿐이기에 교장은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교칙마저 개정해서라도 이도희를 전교 회장에 앉히고 싶어 하던 교장이었다. 그런 교장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던 수인은 고3 내내 알게 모르게 괴로운 학교생활을 했었다.

“수인아. 이도희 알지? 너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을 텐데?”

“잘 압니다. 이도희.”

“그렇지? 우리 며느리 될 아이야. 도희가.”

며느리. 정민선의 마음엔 이미 며느리가 되어있는 이도희인가 보았다. 수인은 뭐라고 더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도희라면 더더욱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시후하고 어릴 때부터 친남매같이 자란 아이지. 둘이 너무 잘 어울려.”

꿈을 꾸는 소녀 같은 얼굴을 하고 정민선이 이야기를 하는데, 수인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둘이 잘 어울린다는 말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현시후, 수인에게는 오랫동안 열망의 대상이었다. 훤칠한 키에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외모인 현시후, 그 옆에 선 이도희를 상상해 보았다. 새치름한 얼굴을 하고 현시후를 절절매게 하고 있을 그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다시금 파삭하고 깨질 것 같았다. 

멍해진 수인에게 정민선은 친절하게도 이름을 불렀다.

“얘! 수인아. 너도 벌써 서른 넘었다. 너도 설마 결혼 생각 없어? 큰일이다. 병원에만 있으니 시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세상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잖아. 의사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도 얼른 결혼해. 집에서 걱정하잖아.”

정민선은 아마 시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수인에게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인을 그저 시후의 아주 친한 후배로 보니까 어른으로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일 거였다. 정민선의 말이 딱 맞았다. 수인도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지금 정민선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수인이 시간을 확인하자 정민선은 마음이 급해진 사람처럼 다시 말을 꺼냈다.

“수인아. 시후한테 얘기 좀 잘 해줘. 알았지? 난 너만 믿고 간다 그럼.”

일어서는 정민선을 따라 수인이 일어났다. 정민선은 다시 한 번 수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할 결혼, 올해 하나 내년에 하나 마찬가지 아니니? 지금도 절대 빠른 게 아니고. 나이가 벌써 서른 넘었잖아. 안 그래? 수인아. 말 좀 잘해줘라. 부탁해.”

정민선은 수인의 손을 잡고 애교스럽게 흔들었다. 참 다정한 사람 같은데, 정민선의 이 다정함이 그저 자신이 시후의 친한 후배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그녀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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