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시후야.”
정민선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지금 이 분위기를 현진권이 망쳐버릴까 노심초사했다. 항상 아들과 평행선을 긋듯 대립하기에 오늘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정민선이 총대를 먼저 메고 나선 참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버럭 화를 내는 현진권을 정민선이 말렸다.
“아우, 여보. 천천히 말해요. 시후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자기 맘대로 시골 의료원에서 썩고 있으면 됐지. 뭘 더 배려를 하란 말이야?”
현진권은 시후가 수성의료원에서 일하는 걸 마치 자기의 큰 배려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우, 여보. 내가 말할게요.”
목소리 톤이 높아 가는 현진권 때문에 정민선은 대 놓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오늘이 아니면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시후야. 이사장님 건강이 매우 안 좋아지셨어. 그래서 너와 도희 결혼을 좀 서두르자 하시는구나.”
“어머니. 제가 언제 결혼한다고 했습니까?”
더는 벙어리처럼 있을 수 없는 시후가 반박했다. 지금이라도 틀린 걸 바로잡고 싶었다. 그러나 삐딱하게 나오는 시후 앞에서 현진권도, 정민선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아들에게 더 이상 빌미를 줄 마음이 없었다.
“뭐야? 너 이 자식 지금 뭐라는 거야?”
성질이 불같은 현진권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이라도 시후의 멱살을 잡아챌 것 같았다. 정민선이 호들갑을 떨며 현진권을 막아섰다.
“왜 이래요. 여보. 제발 진정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게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야? 20년 전부터 하던 이야기 아니냔 말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목을 채웠던 셔츠의 단추를 우악스럽게 풀어내었다.
“시후야. 너도 도희하고 언젠가는 결혼할 거라 생각했잖니.”
“어머니. 왜 제 인생인데 남들이 마음대로 하는데요? 저는 이도희와 결혼할 마음이 없어요.”
“뭐야? 이 자식이 지금 실성을 했어? 뭐 제 인생? 결혼할 마음이 없어?”
시후는 아버지에게 제 뜻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정민선이 바르르 떨며 말려댔다.
“어우 어우. 여보, 이러다 쓰러져요. 왜 이래요. 그리고 시후야. 넌 그리 알고 있어. 다른 말 말고.”
“어머니. 저는.”
시후가 피력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정민선은 말을 단박에 잘라버렸다.
“시후야. 오늘은 그만하자. 이러다 아버지 쓰러지셔. 아우 아우, 시후야. 다시 이야기하자.”
현진권은 석 달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큰일을 치를 뻔하였다. 마침 병원에서 업무를 보던 중 쓰러져서 응급처치를 제대로 받았기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그길로 초상을 치렀을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정민선은 남편이 혈압을 올릴 일이 있으면 겁이 나서 바르르 떨어댔다. 시후는 그런 어머니 정민선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은 많으나 차마 할 수 없었다.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아버지 현진권을 보니 한숨만 터져 나왔다.
“여보, 진정해요. 내가 시후하고 이야기 잘 해볼 테니 당신은 진정해요. 네?”
정민선은 자꾸 대치 상황을 만드는 시후에게 얼른 나가라고 손짓을 해댔다. 이야기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쫓겨난 시후는 속이 끓어 올랐다. 이도희와 집안끼리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된 일이지만, 농담처럼 어른들끼리 결혼 이야기를 할 때도 시후는 질색을 해댔다.
딱히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시후라 집안을 발칵 뒤집으며 반란을 도모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결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 상대자는 이도희가 아니라 김수인이어야 했다.
수인과 그 밤이 있기 전에 그 누구와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무던했던 시후였지만,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이도희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이도희는 전혀 정이 가지 않는 대상이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의 집합체라고 늘 생각하던 시후였다.
***
주말 내내 의료원을 비웠던 터라 수인은 이른 시간, 수성의료원에 도착해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수술복 상하의를 입고 산지도 여러 해, 어떤 옷보다 편했다.
노란색 실로 수놓아진 김수인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만지며 수인은 오늘도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자 혼자 다짐을 하였다. 그리고 겉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입원실부터 찾아갔다.
이른 아침이어서 환자들도 이제 몇몇이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주말 내 수인에게 배정된 신환은 없었다. 수인이 수술한 환자 드레싱을 꼼꼼히 해내고 간호사 데스크로 향했다.
하루 24시간 돌아가는 간호 데스크는 평온해 보였다. 각자 분주하게 제 할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 수인은 제 환자들을 케어해 주는 남자간호사 진창욱에게 다가갔다. 웃으며 다가오는 수인을 보고 진창욱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더 일찍 오셨네요?”
물론 평소에도 지각하는 법이 없지만, 오늘은 주말 내 의료원을 비웠던 미안한 마음에 일찍 온 수인을 그가 대번에 알아보았다.
“네. 토요일에 땡땡이쳤더니 불안해서요. 별일 없었죠?”
이미 환자들을 쭉 돌아보고 온 수인이었지만 밤사이 괜찮았는지 그에서 다시 물었고, 진창욱은 차트를 죽 늘여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로 말씀드린 최미선님 말고는 없었어요.”
“아우 이뻐라.”
수인은 주말 내내 잘 지내준 입원환자들이 예뻐서 그리 할머니 같은 말을 해댔다.
“김 과장님, 꼭 할머니 같아요.”
“에에? 너무했다. 진쌤!”
그렇게 한 두 마디 나누며 웃고 있는데, 어디선가 차가운 냉기가 바닥부터 스르륵 다가오는 것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까지 드는 가운데 먼저 눈치를 챈 건 진창욱이었다. 꼭 짚어 나한테 왜 이러냐고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진창욱은 요새 들어 현시후가 신경 쓰였다. 이상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신경 쓰이게 하는 시후를 느낀 진창욱도 인상을 꽤 구긴 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하는 진창욱을 목인사로 가뿐하게 일축하고 시후가 송곳니를 드러내듯 말했다.
“박상기님 지금 열이 나던데 왜 보고 안 했습니까?”
다짜고짜 질책이었다. 시후는 힐끔 수인을 보았고, 수인은 여전히 고개를 처박고 차트에 오더를 써내고 있었다. 시후는 자기 목소리를 확인하고도 고개조차 들지 않는 수인 옆에 딱 붙어 서서는 자리싸움하는 사람처럼 그녀를 밀어내었다. 덩치 큰 시후에 밀리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나온 말이었다.
“어머!”
“어머? 요새 인사는 어머 인가 보네?”
수인만 보면 눈이 둥글둥글해지던 시후의 눈이 예리하게 찢어져 올라가 있었다. 수인은 그제야 긴장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박상기 환자, 수술 부위가 따갑다고 언제부터 불편을 호소한 겁니까?”
인사를 하는 수인을 싹 무시하는 듯 시후는 진창욱을 다그쳤다. 진창욱은 얼른 간호 차트를 뒤적였지만 불편을 호소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질책을 받은 진창욱이 다소 긴장을 하였고, 마침 간호 총책임자 간호 부장이 약품 실에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현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
“박상기 환자 회진 도는데 수술 부위가 따갑다고 밤에 이야기했다는데 왜 조치가 없었습니까?”
현시후는 무척이나 단호했고, 일에는 칼 같은 그였기에 간호 부장도 바짝 긴장한 채 눈에 띄는 진창욱을 다그쳤다.
“확인 안 했어?”
“제가 바이탈 체크 할 때는 그런 말 없었습니다. 지금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얼른 다시 가봐.”
간호 부장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다. 수인도 이쯤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고슴도치처럼 구는 시후가 멈추기를 바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시후와 눈이 딱 마주친 수인에게 시후는 뾰로통하게 말했고, 수인은 순간 몹시 당황하였다.
“아. 아닙니다.”
“얼굴 한번 보기 되게 힘드네.”
무심하게 툭 내뱉고 시후는 차트 위로 탕탕 소리를 내었다. 간호 부장의 시선이 또 한 번 수인에게 날아와 꽂혔다. 시후가 또다시 찬바람을 쌩하고 일으키며 제 갈 길 가버리는 통에 수인만 고스란히 적지에 남겨진 것 같았다. 이 의료원에서 자기가 모르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간호 부장이 눈을 반짝이며 수인에게 다가왔다.
“과장님. 뭐가 잘 안되세요?”
“예? 뭐가요?”
“아니, 두 분 분위기가 그래서요.”
간호 부장이 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고는 있지만, 그 말 안에 이미 시후와 수인이 그렇고 그런 관계임이 베이스로 깔려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 해명의 끝을 보지 못한지라 지금이라도 정정을 해야겠기에 수인은 최선을 다하였다.
“부장님.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게 뭘까요?”
허억, 이것 보세요. 이거 왜 이러세요.
수인이 처음 이 의료원에 왔을 때 제일 먼저 수인에게 의료원 동아리인 ‘뛰는 인생’에 가입을 권해주었던 친절한 인물이 간호 부장이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게 고마웠고, 워낙 수인도 사회성 갑인지라 없는 시간 쪼개가며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봄가을로 마라톤 대회에 함께 출전하며 값진 땀방울을 흘리던 동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말투, 의심하는 그 눈빛, 도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다.
“부장님. 저하고 현 과장님은 정말 선후배 사이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닙니다.”
수인은 자신이 왜 이런 변명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했지만, 듣고 있는 간호 부장 역시 답답한 얼굴일 뿐이었다.
하지만 수인은 이번엔 시후의 진료실에 쳐들어가서 따지지 않았다. 시후도 오늘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던지 수인을 보는 눈이 쪽 찢어진 게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홀가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은 척 오전 외래 진료를 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점심시간에도 제일 먼저 식당으로 달려가 식사를 하고 숨어 다니는 사람처럼 의료원 바깥을 뱅뱅 산책하듯 걸었다. 커피 한잔을 뽑을까 싶어서 주차장 끝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수인을 불렀다.
“수인아~”
왠지 익숙하지 않은 소리면서도 단번에 알 것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