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16)화 (16/88)

16화

시후가 꼼꼼한 솜씨로 근육파열환자의 상처를 꿰매어주고 오후 진료가 끝났다. 수인은 김정수에게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고 얼른 의원에서 빠져나갔다. 뒤늦게 수인이 없어진 걸 알게 된 시후가 섭섭한 얼굴을 하고는 원장실에 앉아 있었다. 김정수는 시후에게 시원한 녹차를 한잔 내놓았다. 

“내가 자네 볼 때마다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저는 원장님 열렬한 지지자예요. 옳은 일을 하시는 겁니다. 큰 도움 못 드려서 항상 제가 죄송합니다.”

미안해하는 김정수에게 되레 시후는 자신이 더 미안한 얼굴을 해서는 고개를 숙였다. 김정수는 시후가 참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를 처음본 건 시후가 중학생 무렵이었다. 우리나라 최고 의과대학 병원에서 비장수술 분야에 최고 능력자로 불리던 그때, 시후의 아버지 현진권 원장이 기산대학 병원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러 왔었다. 

현진권을 따라온 아들 시후를 보며, 김정수도 같은 또래 아이들이 있는 아버지로서 시후를 눈여겨보았다.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어른스러운 태도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더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기산대학 병원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한 이유가 시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따라온 시후를 보며, 아들 앞에서도 당당한 제안이라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산대학 병원에서의 진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김정수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수술 도구이든 수술에 필요한 인력이든 원 없이 쏟아졌다. 그렇게 살려낸 환자가 늘어날수록 김정수의 보람도, 사명감도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다. 

“아버지는 잘 지내시나?”

“네. 잘 지내실 겁니다.”

시후의 대답이 영 뜨뜻미지근했다. 김정수는 시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후 정도라면 기산대학 병원을 선택해 꽃길로만 걸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시후가 예상을 뒤엎고 대부분의 의사들이 꺼려하는 오지에 스스로 가서 근무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시후의 손기술도 꽤 탄탄하다고 이미 소문이 자자한 상태라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대답이 그러해?”

“하하하. 만나면 잔소리만 하셔서요. 자식들은 다 그렇잖아요.”

대답을 머쓱하게 해놓고 시후도 민망하여 녹차 잔을 훌쩍 비워 버렸다. 김정수는 시후의 아버지 현진권과 시후가 많이 다른 길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자신이 간섭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시후가 제 아버지와 척을 지게 될까 걱정되기는 했다. 어쩌다 수인과 시후가 선후배 관계였고, 그런 인연으로 자신의 의원에 의료봉사를 줄곧 해오는 것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현 원장님이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 그게 자꾸 걸리기는 한다네.”

“아닙니다. 원장님. 제 의지입니다. 사실 저는 참 많은 혜택을 누려왔어요. 원장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 세상을 반밖에 모르고 살았을 겁니다.”

참으로 대견한 말을 하는 시후였다. 시후와 마주 앉아 있는 김정수도 사실 예전엔 탄탄대로를 걸어가던 의사였다. 그런 그가 존경하던 교수님의 유지를 받들어 이리 힘든 봉사의 길로 들어서리라곤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아마 김정수도 현시후의 아버지 현진권과 다름없이 부를 축척하며 제 손기술만 믿고 어깨를 우쭐한 채 살았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현시후는 타고난 배경을 깡그리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그래도 아버지, 자주 찾아뵙도록 해. 그게 효도야. 별거 없어.”

“네. 알겠습니다.”

“내 확인할 거야.”

“네. 원장님.”

시후는 사실 어제 부모님 집에 들러 하룻밤 자고 왔지만 아버지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시후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에게 출근길이 늦었다며 매몰차게 와버렸던 일이 떠올라 김정수 원장의 당부도 있고 해서 오늘은 부모님을 좀 만나려 했다. 그리 마음을 먹고 인사를 다 하고 김정수의 자선 의원을 나서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깜찍한 김수인은 또 어디로 내뺀 건지, 왜 이리 자신의 애간장을 다 녹이려 드는지,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

집에 도착한 시후를 반갑게 맞이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김정수 원장의 말이 맞았던가. 부모에게 얼굴 자주 보여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효도인가 싶었다.

“아우. 우리 아들, 웬일로 연속으로 집엘 다 왔어?”

“서울에 일이 있어서요. 아버지는요?”

시후의 어머니 정민선은 기분이 좋아져서 아들 시후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시후의 방에 함께 올라온 정민선은 얼른 시후가 갈아 입을만한 편한 옷을 꺼내 들었다.

“샤워할 거야?”

“네.”

“그래. 샤워해. 저녁은 먹을 거야?”

“네.”

시후가 그저 저녁을 먹겠다는 그 대답에 기분이 더욱 좋아져서는 정민선이 마치 춤을 추듯 방을 빠져나갔다. 시후는 그런 정민선을 보고 쿡하고 웃었다. 귀엽기로 치자면 김수인 버금가게 귀여운 어머니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김수인 오늘은 또 어디에서 누굴 만나려고 이리 두문분출 인지 궁금해서 근질거렸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 그녀. 요새 뻑 하면 시후의 전화와 문자를 통째로 씹어 대서 아주 꼭지가 돌 것 같았다. 아쉬운 대로 수인의 절친 희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보세요.”

- 네. 선배님.

희윤이 냉큼 전화를 받기에 시후는 되레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재건이 왔어?”

- 오늘 교육이 있어서 늦는다고 했어요.

“아. 그렇군.”

뜸을 들이는 게 굳이 시후가 말하지 않아도 용건을 알 것 같았다. 희윤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기다렸다. 그러자 시후가 목이 마르기는 엄청 말랐던지 우물을 스스로 막 파기 시작했다.

“김수인 지금 너희 집에 있어?”

- 수인이요? 안 왔는데요.

사실이었다. 수인은 어제 그렇게 술자리에서 헤어진 이후로 전화도 문자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희윤은 있는 대로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남자, 이제는 목이 마른 정도가 아니라 속에서 불구덩이가 치솟는 것 같았다. 

“뭐? 안 왔어? 그럼 어디로 간 거야? 너 혹시 알아?”

- 아니오. 몰라요. 아버님한테 간 것 아닐까요? 수인이가 외박을 하거나 그런 애는 아니니까요.

그야 당연히 알고 있는 시후였다. 착한 수인이 무슨 이유에선지 월차를 내고 아버지 김정수 자선 의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건 제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어디서 누굴 만나고 있는지 그걸 몰라 속이 확 뒤집혔다.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은 희윤을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하면 뭐하겠는가. 게다가 욕조에 물은 한가득 넘쳐가고 있었다. 시후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문자를 다다다 찍어 보냈다.

『수인아. 어디 갔어? 어디 있는지 그것만 알려줘. 나 오늘 계속 서울에 있을 거야. 연락 줘. 』 그리고 제발! 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얼른 지워냈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한 오조 오억 줄 가 있는 것 같았다. 

시후는 휴대전화를 휙 던져 놓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푹 담가버렸다. 이 더운 날 이열치열로 뜨거운 물속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김수인 때문에 울렁이는 이 감정이 좀 정신을 차리려나. 

그날 이후 시후는 자꾸 수인만 떠올랐다. 잠을 잘 때면 수인을 안고 자는 꿈을 꿨다. 수인이 시후의 목을 끌어안고 귀에서부터 얼굴에 입술을 문지르며 다가오던 그 느낌에 몸이 불끈불끈 달아올랐다. 

그녀를 안고 그녀와 몸을 맞추던 순간,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말을 지금은 백번도 더 해줄 수 있는데 왜 자꾸 기회조차 주지 않는지 속상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괴롭히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끓어 오른 체온을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식히고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정민선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환하게 웃었다. 

“샤워 다 했어? 아버지 오셨다. 내려와.”

“네.”

엄마가 활짝 웃어 주니 시후는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참 못하는 아들이었던 게 후회됐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뿐, 다이닝룸에서 마주한 아버지 현진권은 시후를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시작하였다.

“언제까지 그 시골 바닥에 처박혀 있을 작정이야?”

“아효. 여보.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 저녁 식사라고요.”

정민선이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며 한 옥타브쯤 올라가 말을 시작하는 남편 현진권을 내려 앉혔다. 시후는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가 굴러와 얹힌 것 같은 심정이었다. 

“시후야. 얼른 먹어. 안 그래도 우리 너한테 할 말 있어.”

미세하게 흔들리는 얼굴 근육을 보니 정민선 조차 꽤 묵직한 이야기를 꺼낼 건가 싶었다. 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식사를 했다. 거의 식사가 끝나 갈 때까지 정민선이 음식을 권하는 말 몇 마디가 오갈 뿐, 시후도 현진권도 입을 자물쇠로 채운 사람들처럼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 디저트 먹자. 저기 미영 씨, 우리 갸또 쇼콜라 한 조각씩하고 프랑스 홍차 준비해줘요.”

“네. 사모님.”

정민선이 그리 말하는 걸 그저 시후도 현진권도 듣고만 있었다. 싫다는 소리도, 다른 걸 먹고 싶다는 의견도 없었다. 

“아. 우리 서재로 자리를 옮길까요?”

집안에서 늘 주도하는 건 정민선이었다. 집안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고, 시후는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항해가 떠오른다는 프랑스 홍차의 향이 서재를 가득 메웠다. 철컥하고 닫히는 서재의 문소리를 들으며 정민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후야. 너도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고. 사실 해도 벌써 할 나이잖아. 그리고 요새 들어 이사장님이 좀 적극적이시구나.”

이사장님이라면 아버지 현진권이 조상님 다음으로 귀하게 여기는 인물이지만 시후는 그가 자신의 인생까지 좌지우지하는 게 못마땅했다. 정민선은 시후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얼른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께서 너하고 도희하고 결혼을 빨리 추진했으면 하시네.”

이미 수인에게 들었고, 절친 재건을 통해서도 들었다. 실체 없이 다가오는 공포였는데 드디어 그것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