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수인은 김정수의 자선 의원에서 토요일 평소보다 더 빡세게 진료를 보았다. 김정수는 원장생활을 하며 정말 전천후 의사가 된 것 같았다. 사소한 감기 환자부터 수술을 요하는 환자까지 안 보는 환자가 없었다. 수인은 김정수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나이도 아버지 나이 정도 되면 저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전 진료가 거의 끝나 가는데 전화벨이 또 울렸다.
새벽에 출근을 잘 했는지 묻는 시후의 전화였다. 받지 말까 하다가 그래도 자신의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져서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수인아.
목소리 톤 자체가 나긋하기 그지없었다.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언제부터 이리 나긋했던가. 수인은 듣는 자신이 느끼해서 책상 위에 놓인 물 잔의 물을 벌컥 마셨다.
“진료 안 해요?”
- 어? 조금 전까지 했어. 그리고 나 오늘 새벽에 내려왔어. 어제 너 가고 나서 바로 술자리 끝났고, 나는 집에 가서 잤어.
웬 보고를 일일이 다 하는 건지, 무슨 사감 선생님한테 외박 사연을 늘어놓는 기숙사생처럼 시후의 말이 그랬다.
“근데요?”
- 어? 어. 혹시 네가 나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눈치 있는 사람이었어요? 언제요?”
수인은 피식 웃음이 나는데 억지로 참았다. 또 무슨 말로 웃음을 줄지 기대가 되기는 했다.
- 그래. 사실 내가 눈치가 좀 없기는 했더라. 예쁘고 귀여운 널 이렇게 옆에 두고도 몰랐으니까.
꺅하고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뭐 재치 있게 답변을 하려나 기대했는데 이번엔 느끼한 모드로 가고 있었다.
“아. 아, 그만 전화 끊어요.”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 현시후. 이렇게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남자였던가. 12년을 알고 지냈던 세월이 헛세월 같이 느껴졌다.
- 바빠?
“네. 바빠요. 진료 아직 안 끝났어.”
- 아, 아버님 병원 갔구나? 아. 그랬구나. 그렇지. 착한 김수인이 어디 갔겠어.
혼잣말 같기도 하고 감탄사 같기도 하고 뭔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한 시후의 말이었다. 수인은 아차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뻔한 일이겠지만 또 쳐들어온다면 하! 도망친 이유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만 끊어요. 아 참, 그리고 선배 오늘 응급실 콜 받는 날인 거 맞죠?”
- 스케줄 봐야지.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수인아?
꺅! 이름! 내 이름이 김수인인 거 맞는데, 제발 그렇게 느끼하게 부르지 좀 말아요. 제발요.
수인은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들을 억지로 꿀꺽하고 삼켰다.
“끊어요!”
휴대전화 종료 버튼을 다다다닥 눌러버렸다. 어디서 저런 못된 애교는 배웠던 걸까. 아우. 닭살이 마구 돋아나 수인은 한 마리의 닭이 될 것만 같았다.
현시후 때문에 정신이 쏙 빠져 나가버렸다. 이 남자 참, 이렇게 여러 가지 면을 두루 갖추고 있을 줄이야. 철벽남이기에 일하는 모습처럼 늘 자로 잰 듯 그럴줄 알았다. 후배나 선배들에게도 예의를 갖춰 대할 뿐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신히 쏙 나가버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점심시간이었다. 자선 의원은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진료를 하기에 오늘 점심은 여든이 넘은 할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시큼한 김치찌개에 갓 지은 밥 한 그릇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운 수인이었다.
“할머니, 밥은 제가 풀게요.”
“그래요. 아가씨 선생님.”
여든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정정하게 아들 김정수를 건사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일찍 엄마를 여윈 수인 남매에게 할머니는 엄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이 여든이었지만 할머니는 신여성이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 한번 하지 않고도 수인 남매를 대화로 키워내었다.
“할머니, 김치찌개 너무 맛있겠어요. 할머니 김치찌개는 항상 최고예요.”
“고마워요.”
주거니 받거니 정답게 식사 준비를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있던 김정수가 밖을 나갔고, 수인은 식사 준비를 거들며 누가 왔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수상쩍었다.
“할머니 안녕 하세요~”
주방으로 쑥 들어오는 거대한 형체에 수인은 깜짝 놀랐다. 밥을 푸고 있던 주걱을 든 채 그대로 멈춰 섰다.
“아, 멋쟁이 선생님 왔네~”
할머니는 반가워서 손뼉을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현시후도 월차 냈어?”
김정수가 시후를 따라 주방에 들어서며 정답게 물었다. 그러자 시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전 근무 끝나고 바로 날아왔습니다.”
말도 안 되었다. 지금은 1시 30분, 수성의료원은 토요일 진료가 12시 30분까지였다. 그렇다면 1시간 만에 충청도에서 날아서 서울로 왔다는 이야기인가? 아무리 서울 초입이기는 했으나 이 남자 진짜 미친 건가. 얼마나 속도를 내어 달려왔기에 이 시간에 여길 와 있는 걸까. 수인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점심식사 하시나 봐요.”
“김치찌개밖에 없지만 같이 좀 들어요.”
“아. 감사합니다.”
넙죽, 아직 밥숟가락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 감사하다며 자리를 꿰차고 앉는 시후를 보고 기가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수인아. 나도 밥 줘.”
그놈의 이름! 부르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맞는데, 누가 멋대로 그렇게 친한 척하고 부르랬냐고? 아마 아버지 김정수도 이상함을 눈치챘을 것 같았다. 수인은 괜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고봉밥을 한가득 떠서 시후 앞에 밀어 놓았다.
“와. 맛있겠다. 오늘 첫 끼니에요.”
“뭐하다 밥도 못 먹었어?”
김정수는 같은 의사로서 짠해서는 시후 앞으로 김치찌개 뚝배기 채로 밀어주었다. 그사이 계란 프라이까지 해서 내놓은 할머니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찬은 없지만 많이 들어요.”
“맛있습니다. 진짜 맛있네요.”
시후는 머슴 뺨을 왕복으로 칠 정도로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하기야 새벽부터 출근한다고 아침도 굶었을 테고, 끝나자마자 총알 탄 사나이같이 이곳으로 날아오느라 빈속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인이 얼른 머리를 흔들어 댔다.
“왜?”
“아니에요.”
머리를 흔들어 대니 김정수가 수인에게 물었다. 얼른 별일 아니라고 대답을 해 놓고 시후를 보니 정말 먹는 거 하나는 복스럽게 먹는 것 같았다. 밥 위에 금가루를 삼시 세끼 뿌려 먹었을 것 같은 부잣집 도령이 이럴 땐 또 귀여운 면이 있었다.
수인은 다시금 머리를 흔들어댔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드는 제 눈 세포를 콕 찔러버리고 싶은 수인이었다.
“아. 잘됐다. 다음 달 봉사 말이야. 이렇게 다 모였으니 미리 이야기 좀 하자.”
시후와 수인은 김정수의 자선 의원에 일반외과 의사로 봉사에 참여 중이었다. 한 달에 한번, 어떨 땐 두 달에 한 번씩 작은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원장님.”
“강원도에서 개원한 내 친구가 어촌마을에 의료봉사를 한번 가자고 제의를 해서 말이야.”
“언제요?”
수인도 김치찌개를 푹 떠서 입안 가득 오물거리며 물었다.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 시간 어떨 것 같아?”
“당연히 맞춰야죠.”
시후는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했다. 둘 다 토요일을 빼려면 미리 의료원에 지장을 주지 않게 조절을 잘 해야 했다. 다행스러운 일은 의료원의 왕 부장이나 진료원장님도 김정수의 자선 의원에 후원자를 자처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은 의료원 자체에서 의료봉사를 계획하는데 꼭 자선 의원과 연합을 해서 도와주곤 했다.
“아가씨 선생님, 이것도 좀 먹어봐.”
할머니가 수인이 제일 좋아하는 숙주 볶음을 수인의 밥숟가락에 한가득 올려주셨다. 수인이 방긋 웃으며 밥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숙주 볶음이 쉬 쉬기 마련이었다.
수인은 이미 쉬어 버린 숙주 냄새에 욱하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수인은 할머니가 무안할까 봐 입안에 숙주를 머금은 채 아무 일 없는 듯 연기를 했다. 그러자 또 한 번 구역질이 올라왔고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 남자의 부릅뜬 두 눈이 수인의 움직임을 열심히 쫓고 있었다.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수인은 얼굴에 미소를 억지로 지은 채 보일 듯 말듯 손을 내저었다. 남자의 커다래진 눈은 줄어들 줄 모르고 계속 수인을 따라갔다. 나름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온 수인은 또 티를 내지 않으려 무척 애를 쓰며 자리에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김정수의 일장 연설이 꽤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곤 슬그머니 할머니가 눈치채 지 못하게 숙주 볶음을 끝자리로 밀어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좋아?”
시후는 눈도 안 시린지 깜빡이지도 않고 김치찌개를 막 퍼 넣는 수인에게 물었다.
“예? 뭐가요? 아, 갑자기 쉬가 마려워서 화장실 다녀온 거예요.”
“아. 하하. 녀석. 아무리 막역한 선배라도. 하하.”
괜히 아버지 김정수가 무안한지 수인이를 커버해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수인은 점심시간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얼른 또 시후 눈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의원에 와 있는데, 시후가 금세 따라와 있었다.
“수인아.”
“아 쫌! 그렇게 느끼하게 부르지 말라고요.”
“너. 좀 전에 노지아 뭐야?”
아까의 헛구역질은 분명 쉬어 빠진 숙주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심의 눈초리가 된 이 남자에게 과연 뭐라고 설명을 해야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을까.
“아. 뭐요? 아, 혹시 누구의 금쪽같은 새끼 가졌을까 봐요? 와. 점프하겠네?”
정말 이런 질긴 생고무 같은 남자를 보았나. 수인이 이렇게 시후를 피해야 하는 이유, 그 이유가 김정수 자선 의원 때문이고,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여기까지 쳐들어와서 이럴 거냐고.
“왜 화를 내. 난 그냥 가능성을.”
시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수인이 천장을 머리로 들이박을 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 좀 해요! 나도 이러는 게 좋아서 그런 거 같아요?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서요? 그 눈치 대체 어디 있다는 거예요?”
“알았어. 화내지마 수인아.”
또 눈이 둥글둥글해져서 꼬리를 있는 대로 아래로 내려트리고 눈치 보는 현시후. 진짜 얄미웠다.
싸운 사람들처럼 입을 튀어나온 채, 끝나지 않은 오후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수인을 보러 이곳에 찾아 왔다가 시후까지 오후 진료에 투입이 되어버렸다. 하필 용접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크게 다친 사람들은 구급차에 실려 기선 대학 병원으로 후송이 되었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불법 체류자가 자선 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속 안부터 수쳐해야겠다.”
시후는 역시 재빠른 손놀림과 꼼꼼한 솜씨로 터진 근육들을 꿰매 나가기 시작했다. 수인은 옆에서 보조를 해주면서 초집중하는 시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흠잡을 데도 없고 어느 구석 하나 미운 곳이 없는 얼굴, 진지한 저 표정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수술실 아니면 볼 수 없었다. 저 매력적인 얼굴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까지 죄다 내다 버려야 하는데, 상황에 맞닥뜨리면 또 어김없이 스르륵 무너지는 이 감정, 어떡해.
수인은 마스크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