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14)화 (14/88)

14화

일어서는 시후를 피해 수인은 재빨리 현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잽싼 걸음으로 현관 앞에 닿았고, 인사를 하는 희윤과 재건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마구 흔들었다. 이대로 달아나면 완벽했다. 

“나오실 거 없어요. 저 갈게요. 그럼.”

신발을 꿰어 신는 발이 마음이 급해서는 자꾸 맨바닥을 더듬어댔다. 그냥 신발을 손에 들고 나가서 신을까 하는 찰나, 시후가 옆에 와서 섰다.

“어디 가? 의료원 내려가려는 건 아니지?”

“저 상관 마시고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어디 가냐니까? 같이 가.”

예? 어딜 같이 가나요. 수인은 주책없이 나오는 시후를 밀어내었다. 덩치 큰 시후 때문에 현관이 더 좁아져서는 쓸데없이 몸끼리 부닥치고 있었다. 

“왜 이래요? 좀 비켜주실래요?”

수인은 신을 꿰어 신으려는 시후의 신발을 저 멀리 차버렸다.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술도 많이 취해서 신발도 못 찾아 신으시네요. 그냥 안 나오셔도 되세요.”

“야. 왜 신발은 발로 차고 그래?”

사실 시후는 이 정도의 술로는 쉽게 취하지 않을 만큼 주량 역시 쎈 남자였다. 워낙 덩치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잘 먹고 자라서 그런지 간도 튼튼한 것 같았다. 

그사이 얼른 신발을 제대로 찾아 신은 수인이 현관문을 비틀고 탈주를 시도했다. 꼭 이럴 땐 엘리베이터도 느려 터져서 딱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어느 장난꾸러기가 탔는지 층마다 서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25층인 이곳까지 엘리베이터가 오기도 전에 호랑이한테 물려 죽게 생겼다. 

평소 체력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도망치듯 25층 계단을 내려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무릎이 시큰하게 아파 와서 간신히 무릎을 부여잡고 1층에 내려왔는데 시후는 말짱한 모습으로 떡하니 수인의 차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가는지 말이나 해. 안 그럼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잘 것 같으니까.”

“예? 선배가 언제부터 내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어요?”

“며칠 됐어. 그러니까 어디 가는지 말해. 이 밤에 너 혼자 운전해서 고속도로 타는 건 절대 안 돼.”

허헉. 하나뿐인 아버지 김정수도 이런 걱정 해본 적 없을 거였다. 응급환자 콜이라면 천둥 번개가 쳐서 벼락을 맞아도, 지진으로 땅이 쩍쩍 갈라져 낙석으로 차 사고가 나도 의사는 기어서라도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딸인 수인도 강하게 마구 굴리며 키우셨다. 

“남의 신혼집에 끼어 자게 생긴 선배 걱정이나 해요.”

꿀벌 마냥 무슨 말이든 쏘아붙일 자신이 문득 생겼다. 그렇게 독하게 쏘아붙이고 나니 수인은 슬그머니 너무했나 싶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지? 아. 내가 이리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닌데. 나 술 마셔서 운전 안 되니까. 네가 운전해.”

눈치 없는 사람 맞았다. 12년을 죽은 듯이 군다고 어떻게 수인을 그리도 오래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래놓고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니. 그나저나 지금 운전을 하라면서 은근슬쩍 같이 가겠다는 그 말인가. 수인은 자동차 문고리를 잡는 시후의 손등을 매몰차게 내리쳤다. 

“예? 왜 자꾸 내 인생에 끼어 드냐고요? 선배는 선배 집으로 가든지, 눈치 있게 남의 신혼부부 사이에 끼어 자던 지요.”

수인의 말에 시후가 화통하게 웃어 재꼈다.

“하하하하. 상상하니 웃기다.”

“아. 혼자 상상 실컷 하시고 좀 비켜요.”

“같이 자자.”

순간 수인은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떨어뜨려 버렸다. 당황해서 떨어진 열쇠꾸러미를 주워드는데 시후가 또 웃어댔다.

“엉큼해. 김수인.”

“예?”

지금 나에게 하는 말 맞습니까? 엉큼이요? 이건 또 무슨 작전인가요. 

수인은 또 침방울이 사레에 걸렸는지 기침이 마구 튀어나왔다. 콜록콜록.

“너 우리 둘이 자자는 걸로 들었지?”

“예? 아, 아니거든요!”

이 죽일 놈의 혓바닥은 채신머리없이 꼭 이럴 때 말을 더듬고 난리였다. 아니지 기침 때문이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었다. 

“얼굴 보니 딱 맞네. 수인아. 나는 있잖아. 언제든지 오케이.”

몸까지 비비 꼬며 윙크까지 하는 현시후였고 수인은 귀까지 빨개져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시후를 막 밀어내고 차에 얼른 올라타서는 문을 잠가버렸다. 시동까지 빨리 안 걸리면 진짜 울어버릴 작정이었다. 시후는 다급한 마음에 수인의 차를 굴려 버릴 듯 창문을 두드려댔다. 

“아우. 미치겠다. 완전 배고픈 북극곰이야. 북극곰. 이봐.”

차가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수인은 이를 꽉 깨물며 가속 페달을 밟아 시후에게서 달아났다. 출발과 동시에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

수인은 저만치 아버지 김정수의 자선의원 간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마 수인이 중학생 무렵이었다. 56평 사택에서 이사를 한다고 했다. 그것도 사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수인은 전학을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산대학 병원에 근무하던 김정수가 오래된 의원에 원장으로 간다고 하셨다. 잘은 몰랐지만 드디어 아버지도 자신의 병원을 운영하고 싶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김정수가 원장을 맡게 된 자선의원은 번듯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김정수는 대학에서 강의도 하시고, 수술 술기도 좋으셔서 월급도 꽤 많이 받는 의사로 알고 있었다. 그런 김정수가 일하게 된 의원은 오래된 건물에 노숙인과 행려인 들이 주로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으며 자랑하셨다. 오래된 의원이지만 역사도 깊고, 선대 원장님께서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는 그 자부심만은 하늘을 찔렀다. 그때까지 그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다. 원장으로 간다고 했는데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 갔고, 아버지는 여기저기에 후원을 받으러 다니셨다.

도착해보니 아직 의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수인은 늦게까지 환자를 보는 김정수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의원으로 뛰어 들어간 수인은 입구에서 오빠를 먼저 만났다. 수열은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 수인을 힐끔 쳐다볼 뿐 데면데면했다. 

“어? 오빠가 웬일이야?”

“의료봉사 왔지.”

치과의사인 오빠가 불려왔다니, 치과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마무리하셔.”

“뭔데?”

“하악골골절”

턱의 골절을 처치 중이라는 말인데, 현실 남매의 대화는 이리도 단답형이었다. 서로가 익숙한 대화법이라 수인은 가뿐하게 오빠를 지나쳐 수술 중인 수술 방을 밖에서 기웃거렸다. 나이 많은 간호사가 수인을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10시가 넘었는데 아직 근무하세요? 노동청에 신고하세요.”

수인이 괜히 웃으라며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간호사는 별말도 아닌데 까르르 넘어가며 박수를 쳤다.

“신고해야겠다. 원장님 때문에 나 이혼 위기라고.”

“저. 박 선생님. 그건 또 무슨.”

“종합병원 3교대보다 더 빡센 데가 여기잖아.”

같이 웃고는 있는데 수인은 괜스레 미안했다. 의리를 지켜 자선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유일한 간호사였기에 수인은 볼 때마다 짠했다. 

그사이 김정수는 처지를 끝내고 수술 방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수인을 보고 반가워서 활짝 웃었다.

“저 왔어요.”

“어. 웬일로 평일인데? 응급실 당직 없어?”

“네. 내일까지 쉬려고요. 정당하게 월차 내고 왔으니 내일 진료 도와드릴게요.”

씩씩한 딸 수인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와 똑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 수열도 아버지만큼이나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왔다.

“자꾸 이렇게 오밤중에 수술 스케줄 잡으시면 곤란해요. 원장님.”

“아. 예. 죄송합니다. 저 친구가 이 시간 말고는 안 된다잖아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때마침 수술 방에서 회복실로 옮겨가는 외국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침대를 밀고 있는 나이 많은 방사선사 양 선생이 수인을 보고 반가워했다.

“와. 전전후야. 방사선사더러 지금 환자 옮기라고 한 거예요?”

“안 돼? 그럼 누가 해? 나 허리 아파서 못해.”

김정수는 너스레를 떨며 웃어 보였다. 

“야. 진짜 아버지 신고당하시면 한동안 햇빛 못 보시겠습니다.”

수인의 실없는 소리에 다들 해맑게 웃어댔다. 신나게 웃어대던 김정수는 슬쩍 수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척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박 선생하고 양 선생이 부부라서 다행이지.”

자선 의원에 유일한 간호사 박순임과 자선 의원에 유일한 방사선사이자 원무과 직원이자 운전기사인 양상구가 있어 그나마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네 식구가 집에 모여 앉았다. 호호 할머니는 오랜만에 집에 들른 손자들을 끌어안고 어찌나 행복하게 웃는지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다 떨려왔다.

“할머니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우리 치과 선생님은 강원도에, 우리 아가씨 선생님은 충청도에 있는데 당연한 거 아이가?”

수인 남매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름대로 김정수의 뜻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을 했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덕에 오빠는 치과의사가 될 수 있었고, 수인은 김정수처럼 일반외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어여쁜 남매는 월급을 고스란히 김정수의 자선 의원에 후원금으로 내놓고 있었다. 

“수열이는 어서 출발해라. 미연이가 걱정을 해서 난리가 났다.”

아들을 기다리는 며느리에게 미안해서 김정수가 안절부절못했다. 

“네. 전 그럼 출발할게요. 김정수, 아니 원장님,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오늘 하악 수술한 환자 케어 잘 부탁드려요.”

수열은 아버지를 똑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그래. 밤길 운전 조심하고.”

김정수는 늦은 밤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는 아들에게 당부를 하였다. 수인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어? 아버지도 그런 말씀 하실 줄 아세요?”

“당연한 거 아니냐? 밤이 늦었으니 걱정이 되지.”

출발하는 오빠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수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뒷짐을 지고 걷는 김정수를 바짝 따라붙으며 수인이 물었다.

“아버지 그런 말 하시는 거 처음 봐요.”

“내가 표현력이 좀 딸리잖아. 사랑하는 내 아들, 사랑하는 내 딸, 자주 표현하라고 신부님께서 그러셨는데 내가 좀 무심했지.”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걱정이 되는 사람. 수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밤길 운전이 걱정이라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