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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13)화 (13/88)

13화

발동이 제대로 걸린 남자는 허락만 해준다면 수인을 껴안고 사랑 고백을 수백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아, 왜이래~”

“진짜야. 나 너한테 단단히 미쳤어. 진작 그래 주지. 그럼 이렇게 시간 허비하지 않았을 거 아냐.”

지금 하는 말, 설마 원망입니까? 왜 진작 선을 넘어 주지 않았냐고 시비 거는 겁니까? 

수인은 기가 막혀 혈압이 치솟았다.

“뭐래요? 미쳤나 봐.”

편의점 술을 다 사든 말든 몸을 확 돌려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물어야지 이러다 없던 고혈압이 생길 것 같았다. 수인이 아이스크림 통에 팔을 넣어 휘젓는데 어느새 볼륨 빵빵한 근육질의 팔이 하나 같이 들어와 휘젓는척하며 수인의 손을 잡아댔다.

“왜 이래요?”

“나도 같은 걸로.”

“말로 해요. 말로!”

수인은 새침하게 쏘아붙이고 멜론 맛 아이스 바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사실 시후는 아이스크림이라면 쫀득쫀득한 유기농 수제 아이스크림만 먹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구멍가게 아이스크림 통에서 멜론 맛 아이스 바가 맛있다며 쪽쪽 빨고 있는 수인 때문에 먹기 시작하였다. 

한 손 가득 술병을 짤랑거리며 든 시후가 다른 한 손에는 멜론 맛  아이스 바를 쪽쪽 빨아댔다. 한발 앞서 걷는 상큼하게 귀여운 수인 역시 아이스 바를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수인의 입술에도 멜론 맛이 날까 생각하다 시후는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수인이 휙 뒤돌아보았다.

“왜 웃어요?”

“좋아서. 김수인 입술이 막 떠오르잖아.”

꺄, 뭐라는 거야. 현시후는 분명 이런 느끼한 남자가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 찌를 공간도 없이 얼마나 철벽을 단단히 치던 남자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수인이었다. 

시후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그를 노리는 수많은 여자들이 장대높이뛰기를 하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장대가 부러지든 높고 높은 장벽에 부닥쳐 떨어지든 반드시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가차 없는 남자가 현시후였다. 

그런데 이 남자 정말 그 밤이 너무 충격이었던 걸까. 왜 자꾸 느끼하게 이러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 아이스 바를 문 채로 전력 질주하여 그곳을 달아나고 싶었다. 엄마들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차 조심해라. 길 다닐 땐 한 눈 팔지 마라. 그래서 엄마 말은 꼭 들어야 하는데.

수인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다가 당장 시후를 피해 빨리 뛴다고 뛰었고, 앞에서 오토바이도 꽤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데 보질 못했다. 

끼기긱!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다 수인의 옆을 쌩하고 지나쳐 갔다. 순간 몸을 웅크린 수인은 심장이 오그라들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순간 남자의 중저음이 정수리에 들려왔다. 뭐지?

“괜찮아?”

“……?”

참으로 빠른 동작이었다. 시후가 수인을 꼭 끌어안고 있어 수인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이 박혀 있었다. 눈을 떴다 감았다가 이내 수인은 손을 타고 내리는 아이스 바의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허!”

얼른 남자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낸 수인은 처참하게 다 찌그러지고 흘러내리는 아이스 바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온통 멜론 맛 아이스 바로 범벅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멜론 맛 입술이 되었네.”

수인의 귓가에 그 원수 같은 종소리가 또다시 울려댔다. 댕댕~

남자의 눈이 이글거리며 아이스 바로 번들거리는 수인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시후가 과감하게도 온통 아이스 바 범벅이 된 수인의 얼굴과 입술을 그 커다란 손으로 다정히 닦아주자 수인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뭘 해도 귀엽다. 아 진짜 미치겠네.”

수인 입가를 닦은 손을 슬쩍 자신의 입에 대어 보는 이 남자, 필시 미친 게 분명했다.

두 사람, 재건과 희윤의 집을 나갈 땐 분명 나서자마자 머리끄덩이라도 잡을 것같이 싸늘한 분위기였는데, 돌아왔을 땐 한바탕 몸싸움을 한 것같이 후끈한 분위기였다. 

“옷이 왜 그래? 어? 김수인 넌 얼굴은 또 왜 그래?”

수인은 얼른 입을 손으로 가렸다. 시후의 과잉 친절로 인해 립스틱이 온통 번져 있는 데다 아이스 바의 흔적으로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러게 수인아. 립스틱이 번져도 너무 번진 것 같아.”

같긴 뭐가 같아. 번진 거 맞아. 근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쨌든 수인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오다가 오토바이에 칠 뻔했어. 현시후 선배님이 사고 나기 직전에 잡아줬어. 이것 봐. 선배님 옷도 다 버렸잖아. 내가 아이스 바를 하나 물고 있었거든.”

진짜 사실만을 낱낱이 고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왜?”

고구마 백 개가 식도를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진 마음으로 수인이 희윤을 쳐다보았다. 절친 희윤마저도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었고. 재건 선배는 웃고 있는 시후를 보고 있었다. 시후는 콧잔등을 손으로 문지르며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연신 번졌다.

“말 좀 해보세요. 현시후 선배님.”

애타는 마음은 오로지 그녀 혼자였다. 수인은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감자탕 다 먹은 건 아니지? 안주 다른 것도 좀 시키지.”

“어? 당연히 더 시켰지.”

절친인 두 남자는 어느새 술병을 귀한 보물 끌어안듯 안고서 술자리로 돌아갔다. 희윤은 억울해하는 수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마음 정리를 입으로 하는 건 아니다. 친구야.”

“뭐?”

꺄악! 소리 지르며 쓰러져도 이 억울함 어디에 다 하소연을 할까. 부글부글 끓는데 저 남자는 기분이 너무도 좋아 보였다. 

다시 시작된 술자리에 수인은 아주 적극적인 자세로 덤볐다. 팔꿈치로 회오리를 만들어 보이며 드드득 술병의 뚜껑을 땄다. 콜콜 술잔에 따라 돌리며 모처럼 의국의 신입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황금 주 말까요?”

“오~ 좋지.”

재건이 긴 잔을 수인 앞에 정렬시켰다. 그러자 시후가 얼른 잔 하나를 빼내었다. 

“아 세잔만 만들자.”

“왜? 너 안 마셔?”

“아니. 김수인이 속이 안 좋다잖아. 요즘 세상에 억지로 술 마시라는 선배는 철장에 가둬야 해.”

술을 배합하던 수인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속이 안 좋은 적이 있던가? 결단코 그딴 이야기를 해본 역사가 없었다. 처음 해부학 교실에 들어가서 토하고 울고불고하던 여린 동기생들과 달리 수인은 그날 저녁메뉴로 곱창전골을 맛있게 먹던 비위의 소지자였다. 

“아닙니다. 저 괜찮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뭐 억지로 술 먹이는 그런 비이성적인 선배는 아니니까. 그냥 쉬어.”

의도가 무엇인지 수상했다. 수인은 남자를 의심 가득 품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때마침, 재건이 배달을 시켰던 안주가 도착했다.

“자기야. 내 지갑 어디 있지?”

“아이참. 휴대폰 뒤에 카드 있잖아.”

재건과 희윤이 현관 앞으로 가서 옥신각신하는 순간, 시후가 쓰윽 수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술 마시지 마. 아직 넌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으니까.”

콜록콜록. 수인은 잘못 삼킨 침 한 방울이 사레에 걸려서 기침을 마구 해댔다. 

안주거리를 잔뜩 끌어안고 오던 재건과 희윤은 다정하게 서로 붙어 앉아있는 수인과 시후를 보았다. 

“둘이 먼저 시작하는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수인이 배합해 놓은 황금 주 잔을 집어 올렸다. 그러나 동작은 시후가 더 빨랐으니 그 잔을 얼른 낚아채서는 재건과 희윤에게 하나씩 돌리고 나머지 한잔을 제 앞에 두었다. 그리곤 사이다가 든 잔을 수인 앞에 밀어두었다.

“자. 한잔 하자.”

선창을 해버리는 통에 다들 잔을 손에 들었다. 허둥거리며 술잔을 채우려던 수인은 술병들이 죄다 시후 옆으로 옮겨간 걸 보고 기가 막혔다. 

“오랜만에 이렇게 넷이 만나니 너무 반갑고.”

“그래. 너무 좋다. 우리 자주 뭉치자.”

“그래요.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제각각 흐뭇한 건배사를 나누는데 수인은 당혹스러워 어쩔 수 없이 사이다가 든 잔을 들었다.

“넌 한마디 안 해?”

희윤이 친구를 챙긴답시고 한마디 거들었는데, 수인은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있다면, 왜 갑자기 여긴 찾아와서 앉아 있냐고 시후에게 묻고 싶을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아우. 김수인. 그렇게 센스 톡톡 튀던 김수인 왜 이래?”

재건이 넋을 뺀 얼굴로 수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수인도 자주 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허나 지금은 현시후라는 남자를 자주 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갑자기 신혼집에 쳐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누가 좀 듣고 뜨끔했으면 했는데, 뜨끔 하라는 사람은 감감무소식이고 희윤이 손을 내저으며 반색을 표했다.

“아우 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우리가 어디 남이니?”

아, 진짜 그놈의 우리가 남이냐는 소리! 정말 듣기 싫었다. 현시후는 흐뭇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자신을 보고 있어 미치고 팔짝 뛰고 싶었다. 

시후의 방해 공작으로 수인은 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술자리는 끝으로 달려갔다. 

정답게 주고받던 목소리들이 점점 커졌고, 다들 얼큰하게 취해서는 분위기가 후끈 달아 올라있었다.

“현시후. 조만간 우리 국수 먹는 거냐?”

재건이 홍조 띤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러자 시후가 수인을 쓱 쳐다보며 대 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국수?”

두 남자가 얼추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데 제정신인 희윤이 끼어들었다. 

“현시후 선배님, 이사장 딸하고 결혼 임박이라고 소문 자자하던데.”

어찌나 테이블 위에 술잔을 세게 놓는지 박살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화들짝 놀란 수인이 상황을 살폈다. 

“쓸데없는 소문 만들어 내지 좀 마라. 나도 모르는 일을 왜 다들 난리인데?”

시후가 수인을 의식해서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괜스레 그러는 걸 모르나. 수인은 입을 삐죽거렸다. 

“어? 우리 박중희 교수님이 그랬는데. 박 교수님이 뻥칠 분이냐?”

“뻥칠 분 맞네. 당사자도 모르는 일을 박 교수님이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나 결혼할 사람 따로 있어.”

하! 이 남자 설마 지금 이 중차대한 일을 이딴 술자리에서 함부로 떠들려는 건 아니지? 수인은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안 되겠다. 이런 자리에 앉아 심장병 걸리느니 이제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나을 듯 했다. 제아무리 직속선배라도 할 도리는 다했고, 이 정도면 갑자기 쳐들어와서 민폐 끼친 것도 만해를 다한 것 같았다. 

“아.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수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시후도 따라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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