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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12)화 (12/88)

12화

장신의 두 남자가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관에 들어섰다. 

“희윤아~”

“아. 오빠 왔어? 어? 시후 선배님도 왔네요?”

아닌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희윤의 연기는 참으로 어설펐다. 그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수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김수인. 너 여기 있을 줄 알았다.”

꼭 숨바꼭질하다가 술래를 잡아낸 뿌듯한 얼굴을 하고 시후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수인은 일단 이 집의 주인이면서 절친 희윤의 남편이자 3년 선배인 이재건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역시 직속 후배는 달라.”

분위기 홀딱 깨는 재건의 말에 시후의 표정이 보란 듯이 일그러졌다. 분명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와, 이재건은 선배고 나는 선배도 아닌가 봐?”

“흠. 안녕하십니까.”

새치름한 얼굴로 수인은 일부러 허리를 한 100도는 더 숙여서 인사를 했다. 인사가 뭐라고 시후는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수인의 어깨를 톡톡 쳐주며 안으로 들어섰다. 수인은 연신 입으로 미쳤다, 돌았다, 를 연발하였다. 저절로 얼굴 가득 불만이 표출되어서는 몸에 전기가 온 사람처럼 파닥거렸다. 희윤은 씩 웃으며 수인에게 속삭였다. 

“포기해. 현시후 선배 보통 아닌 거 알잖아.”

“너!”

역시 절친답게 상황을 빨리 정리해주는 희윤이었다. 

뜻하지 않게 어색함이 흐르는 와중에 때마침 도착한 감자탕 배달이 또 화근이 되었다. 모두가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라 배는 고팠고, 오랜만에 모여 앉은 네 사람은 꽤 친한 사람들이었다. 

수인과 시후는 줄곧 같은 전공에 같은 병원에, 희윤과 재건은 각각 일반외과와 산부인과로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더구나 이 둘은 이제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혼부부였다. 그전부터 워낙 오래된 연인이라 이들에게 끼어 있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이렇게 술자리가 벌어지기에 더 안성맞춤이 되었다.

“아 맛있네. 어차피 오늘 자고 갈 거잖아?”

“그럴까?”

대답을 하며 시후가 수인을 쓱 쳐다보았다. 수인은 기가 막힌 얼굴로 긴 머리카락을 뒤로 휙 넘겼다. 설마 저 눈빛 뭐였을까? 수인은 재건 선배가 시후와 자신의 그렇고 그런 사연을 들었을까 봐 심장이 조마조마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재건 선배한테까지 알려지는 건 부끄러워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대로 이 집에 눌러앉게 둘 수는 없었다. 

“내일 근무 안 하나?”

은근슬쩍 흘리듯 말하고 수인은 감자탕 뼈를 야무지게 뜯어댔다. 시후는 자기 걱정을 해주는 기특하고 어여쁜 수인을 흐뭇하게 쳐다보고는 냉큼 대답했다. 

“새벽에 출발해도 돼.”

“그래. 의료원이 생각보다 멀진 않더라.”

꼭 그렇게 편을 들어줘야 할까요? 이재건 선배님! 

수인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이렇게 마주 앉아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 이리로 내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희윤아. 술 이게 끝이야?”

소주 한 병은 남자 둘만으로도 벌써 거덜이 나 있었다. 희윤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 술이 없네요.”

희윤의 그 말에 시후와 재건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후가 재건을 눌러 앉히며 수인을 쳐다보았다. 국물을 떠먹던 수인이 시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설마 그 눈빛, 지금 뭐하자는 건가요. 수인은 고개를 더욱더 처박고 돼지등뼈를 해부하듯 이리저리 발골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거라며 제 사전에 포기란 없다고 했던 시후가 콕 찍어 말했다. 

“수인아. 가자.”

“저요?”

그렇게 콕 찍을 줄 알았지만, 그 목소리 누가 들어도 지금 이상했다. 달달하다 못해 이가 다 썩을 것 같았다. 

“그럼 누구?”

당연한 일을 되묻는 수인에게 고삐를 바짝 틀어쥐었다. 말 잘 듣던 후배이기를 거부한 수인이 버티었다. 

“재건 선배랑 둘이 다녀와요.”

수인도 콕 지명하며 짝을 맞춰주기는 했으나 시후 귀에 들어 올 리 없었다. 

“손님인 우리가 사 오는 게 맞지. 안 그래, 재건아?”

“어. 맞지. 암 그렇고말고.”

재건이라면 의대 시절부터 시후의 단짝이었다. 시후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찰떡같이 믿어주는 친구였다. 그러니 지금 수인을 이끌고 나가려는 시후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시후를 향한 끈끈한 우정이 직속 후배의 등짝을 바짝 밀어대었다. 

“아. 김수인 뭐해? 국물 식기 전에 얼른 사 와라. 물론 이건 선배로서 명령은 아니고 부탁이야.”

아주 쐐기를 제대로 박아대는 재건 때문에 수인은 입장이 난처해져서는 들었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듯 내렸다. 같은 의과대학, 같은 전공 직속 선배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며 귀가 닿도록 들어왔다. 요새야 군기가 덜해지긴 했어도 수술을 하는 외과 파트에선 아직도 선배의 파워는 여전했다. 

억지로 일어나는 수인을 보고 희윤이 웃어댔다. 

“우리 김수인 불쌍하다. 왜 하필 직속 선배 소굴에 제 발로 들어왔을까.”

“아흥! 나도 다른 과 갈 걸 그랬다고 지금 후회 중이다.”

“맘에도 없는 소리하고 있네. 여기저기서 오라는 과들 다 마다하고 제일 먼저 가놓고.”

희윤의 말이 맞았다. 요새는 의사들 중에 수술하는 과를 대 놓고 기피하고 있지만 수인은 꼭 전천후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원한 일반외과였지만 노동의 강도가 워낙 세기 때문에 여자 의사보다는 남자 의사를 더 선호하는 과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여자이기를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럴 만큼 나약한 수인도 아니었지만 수련 받는 내내 수인은 다른 남자 수련의들과 비교당하지 않으려 정말 이를 악물고 견뎠다. 

어떨 때는 하도 생리현상을 참아서 염증이 다 생길 정도였다. 진정한 외과 의사로 태어나기 위해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 속에 수인의 오아시스는 현시후였다. 

그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인에게는 샘물이었다. 그랬기에 고백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짝사랑 연식을 꽉꽉 채워 온 게 지금까지였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 샘물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한여름의 열기가 도심이라 더 심한 것 같았다. 재건과 희윤의 아파트를 나오기가 무섭게 후덥지근했다.

그 와중에 바짝 붙어 걷고 있는 시후 때문에 더더욱 더웠다. 수인이 한 팔 간격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새 간격을 좁혀온 시후는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며 말했다. 

“너 자꾸 나 피할래?”

혀만 술에 취했던가. 왜 말소리가 혀 짧은 소리로 들리지? 순간 수인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왜 쫓아 온 건데요?”

“내가 먼저 물었다.”

누가 번호표 뽑고 대화하자고 했나. 수인은 어두워진 틈을 타 스르륵 시후를 째려보았다. 시후는 수인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옆을 돌아보았다. 

“너 자꾸 나 피하면 나는 오해할 수밖에 없어.”

“뭘 오해해요?”

“막장으로 가는 거지.”

수인은 걷던 걸음을 딱 멈추었다. 걷던 속도를 멈추지 못한 시후는 한두 발 앞서가다 수인이 멈추자 따라 멈추었다. 

“막장 뭐요? 아, 내가 임신해서 튄다고? 아. 진짜 개 막장 같은 드라마 작작 쓰라고요!”

“개 막장?”

귀에 고스란히 들어선 단어가 어찌나 저 아래 눅눅한 곳에서나 쓸 것 같은 단어인지 시후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수인도 만만찮게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이미 발에 묻은 진흙이라면 겁낼 것 없이 걸어야 했다. 지금 수인은 아름다운 말 따위가 나오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남자가 질척대요? 어디 선배 같은 남자 만날까 봐 원 나잇 함부로 하겠어요?”

“원 나잇은 원래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도덕 선생님 같은 말투로 어찌나 단호하게 말하는지, 수인이 무안해졌다. 그렇지만 여기서 굽히면 체면이 땅에 똑 떨어질까 봐 수인은 괜히 쫑알거렸다.

“뭐. 그. 그렇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고. 뭐 다 그런 거지. 원시시대부터 다 그랬다고요. 그냥 하룻밤 눈 맞아서 그럴 수도 있지.”

툭하고 말해놓고 제 논리에 자기도 알쏭달쏭하여 수인은 다시 속력을 내어 걸기 시작했다. 금세 따라잡은 시후는 꼬투리 제대로 잡은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래. 원시시대에 하룻밤 눈 맞은 덕에 자손이 번창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졌잖아. 우리도 그런 거지.”

“그래요. 잘 알고 있네요. 그냥 그런 하룻밤인데 왜 자꾸 질척 거리냐고요?”

이미 한여름 도시의 열섬현상에다 내부에서 발생한 화로 인한 열로 수인은 땀이 났다. 

“내가 잘할게. 김수인.”

“잘할 필요 없다니까요. 부담스럽게 왜 이래요 자꾸?”

뭘 더 잘한다는 건지. 지금까지 현시후는 수인에게 참 좋은 선배였다. 하필이면 세 살 위 친오빠가 있었기에 오빠라는 존재가 여동생에게 얼마나 거칠고 뻑 하면 때리고 심부름이나 시키고 얄밉게 구는지 제일 잘 아는 수인이었기에 현시후 정도면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큰 덩치에 애처롭게 잘하겠다는 다짐은 또 뭐래. 수인은 새치름한 몸짓으로 앞서 걸었다.

“부담스러워?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는 또 뭐야. 수인은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강하게 달라붙었다가 어느새 또 시무룩했다가 도대체 현시후 언제부터 자신의 눈치를 저리 보는 남자였던가. 수인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편의점 안으로 도망치듯 뛰어들었다. 

“아우. 시원해.”

“술 뭐 살까?”

시후가 편의점 바구니를 한 손에 잡고 다정한 눈으로 물었다. 

“알아서 사요. 어차피 선배가 다 마실 거 아니에요?”

“넌 안 마셔?”

말을 하는데 쌩하고 가버리는 수인을 애가 탄 사람처럼 재빨리 따라붙었다. 그리곤 뒷목 잡고 쓰러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맞다. 너 임신했을 수도 있으니까 술은 안 되겠다.”

에어컨이 아주 빵빵하게 돌아가는 편의점 안이었지만 수인은 찬 냉기를 흘리며 시후를 째려보았다.

“선배. 그만 해요. 결혼에 관심도 없는 남자가 왜 자꾸 임신 타령은 하고 그래요?”

“글쎄.”

혼자 또 진지해져서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듯 술을 바구니에 가득 담고 있었다. 수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후가 담은 술을 차곡차곡 다시 빼내었다.

“또 또! 혼자 생각에 빠져서는. 편의점 술 다 사려고 그래요?”

“그게 아니고. 네가 너무 좋아졌어. 미치게 좋아졌어. 널 보면 막 안고 싶고. 널 보면 하.”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병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현시후는 눈이 또 둥글둥글해져서는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와, 닭살! 그런 말 할 줄 아는 남자였어요? 그런 건 언제 배웠대?”

“응? 그냥 막 나오는데. 너만 보면 미치겠어. 나도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왜 이제야 발동이 걸렸는지 억울해.”

수인은 기가 막혔다. 억울하다니. 진짜 억울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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