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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10)화 (10/88)

10화

머리가 핑하고 돌았다. 질긴 짝사랑을 끝낸다고도 했다. 그 밤은 이별 여행 같은 거라고도 했다. 그런데 현시후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채 지금 수인을 보고 있다.

“내 말 어디로 들었어요? 끝이라고요. 끝!”

“왜 네 마음대로 끝인데?”

시후가 한발 다가왔고, 수인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곤 자존심 세우듯 고개를 쳐들고는 손에 비누칠을 거칠게 해댔다. 

“선배 집안 알 만한 사람들 다 알잖아요.”

“그래서?”

물소리에 잘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수인은 진심을 말했다. 

“그래서 라니요? 그냥 기회 줄 때 가라고요.”

수인은 손 세척을 끝내고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내놓는 그녀의 이유가 참으로 간질거렸다. 겨우 자신의 집안 때문이라고?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신분의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되는 말일뿐이다. 시후는 혹시 다른 이유를 숨기는 게 아닌지 살짝 의심이 들었다.

“나 밀어내는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야?”

“단지라뇨! 선배 앞날 망치고 싶지 않아요.”

수인은 수건으로 손을 꼼꼼하게 닦은 뒤 휙 하고 돌아섰다. 시후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수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예? 뭘 어떻게 해요? 선배는 정해진 대로 선배 인생 살고, 뭐 나는 나대로 내 인생 살고.”

그때, 수술 방 간호사가 지나갔다. 수인과 시후는 말을 끊은 채 딴 짓을 하는 척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나간 게 확실해지자 시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넌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왜 안돼요? 선배. 그건요. 그냥 원 나잇 이었다고요.”

수인은 탈의실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더는 그 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의미를 부여해대는 시후로 인해 수인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너 발뺌하긴 늦었다. 그리고 나 그날 피임 안 했어.”

“헉! 현시후! 그 입 좀 닫아요. 제발!”

수인은 갈아입으려던 옷을 제대로 주워 입지도 못하고 탈의실 커튼을 열고 나왔다. 시후는 다시 돌아온 수인이 반가워 쳐다보다 화들짝 놀랐다.

“옷 제대로 입어. 그 가슴은 이제 나만 볼 거니까.”

“어머!”

수인은 급하게 주워 입느라 단추를 하나씩 밀려 끼워 넣은 탓에 앞가슴이 벌어져 있었다. 당황한 수인이 빠르게 손을 놀리며 부끄러워 변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내가 칠칠맞은 여자가 아닌데. 아우. 진짜.”

“인정. 나도 네가 그런 육감적인 여자인 거 지금까지 몰랐으니까.”

돌아서서 옷을 수습하다 수인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얼른 옷을 고쳐 입고 팽이보다 빠르게 돌아섰다.

“한 번만 더 그런 말 해봐요? 진짜 성추행으로 신고를 하나 안 하나?”

“겁 안 나는데.”

시후는 상의를 훌쩍 벗었다. 수술이 길어진 탓에 온몸엔 땀이 촉촉이 나 있었고 그의 잘 다져진 근육들이 반짝였다.

“옷을 왜 여기서 벗어요?”

“탈의실 가는 길인데.”

과 호흡을 하며 수인은 얼굴에 오른 열 때문에 연신 손 부채질을 해댔다. 수인은 어서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인 것 같아 내빼듯이 수술준비실을 빠져나왔다. 

수인은 의사 휴게실로 들어가 진정이 안 되는 가슴을 억지로 눌러 내리며 소파에 몸을 눕혔다. 아직 외래 진료가 남아 있기는 했으나 배도 고프고, 지금은 무엇보다 현시후 때문에 정신까지 이탈할 지경이었다. 

그때, 시후가 휴게실로 들어섰다. 역시 같은 직장 내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두 남녀가 서로를 피해 도망 다닐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좁았다.

“컵라면 먹을 거지? 육개장, 튀김우동?”

“튀김우동.”

대뜸 대답을 해 놓고 수인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부어올라서 땡땡해져 피곤한데, 배까지 고파서 신경질이 일었다. 먹는 거에 약한 스타일이 절대 아닌데 대답을 왜 냉큼 해버린 건지, 어쨌든 신경이 아주 예민해졌다. 

컵라면 물을 올리고, 비닐까지 다 뜯어 준비를 마친 시후가 수인에게 쓱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인의 다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왜 이래요?”

“너 다리 부어서 아프잖아.”

“뭐야! 왜 이래요!”

커다란 시후의 손아귀에 단단히 잡힌 종아리를 빼내려 해도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늘 주물러 주고 싶었는데. 못했어.”

“왜 남의 다리는 주무르고 난리냐고요? 그만 해요!”

“남의 다리 아니잖아. 이제 내 다리 내가 관리하는데 왜?”

얼굴에 철판을 덕지덕지 깐 시후가 피식 웃었다. 수인은 시원해서 좋기는 했지만 다리를 벌린 채 시후에게 몸을 맡길 수는 없었다. 시후의 팔뚝을 때려가며 밀어내었다.

“선배!”

“왜?”

“그만 해요. 진짜! 나 마음 변했다고 분명 말했어요.”

수인의 말투가 정말 차가웠기 때문일까. 수인의 다리를 마음껏 주물러 대던 시후가 손동작을 딱 멈추었다. 그는 시무룩해서는 고개까지 아래로 내린 채 말을 이었다.

“왜 네 마음대로야? 난 이제 시작인데.”

“늦었어요. 버스 떠났고, 버스는 절대로 빠꾸를 하지 않는다고요. 노 빠꾸요!”

말을 하다 보니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소리를 질러버린 수인이 얼른 입을 닫았다. 그런데 시후는 그런 수인을 보며 쓱 웃어 보였다. 사랑에 미쳐가는 남자는 소리를 지르건 폭력을 행사하든 뭘 해도 예쁜 수인이라고 생각했다. 

“네 마음 이해하겠는데.”

“그럼 됐잖아요. 선배는 선배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고.”

수인은 붙어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물이 끓는 포트 쪽으로 걸어갔다. 

수인의 뒤통수에 대고 시후가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이야기는 아침 드라마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너 자꾸 나더러 선배 인생 살라며, 그리고 결혼하라 해 놓고, 혹시 너 임신해서 어디 가서 애 몰래 낳고 그러려는 거 아니지?”

뒤돌아선 수인은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서 순간 혈압의 게이지가 두개골을 땅하고 치는 기분이었다.

“뭐요? 허. 허. 기. 기가 막혀.”

“나 그날 너하고 다섯 번 넘게 하면서 피임 절대로 안 했어. 물론 피임할 정신도 없었고, 할 마음도 없었고.”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시후의 말에 수인은 정말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에 힘이 한 줌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그런 말을 막 하고 그래요? 미쳤어요? 나도 내 인생 엄청 중요해요.”

“안 미쳤고. 너 임신했을 수도 있잖아.”

시후가 다가와 수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수인은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시후의 손등을 막 때렸다.

“엄마야……. 내가 미쳤다.”

수인은 머리를 감싸고 다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시후는 또 다시 쓱 미소를 짓고는 보글거리며 끓어 오른 포트를 들어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이봐요. 현시후 씨! 당신 아침드라마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그리고 임신이 뉘 집 애 이름입니까? 그. 그게 처음인데 쉬워요? 그리고 뭐 몰래 애를 낳아요? 내가 왜요?”

수인은 혹여 누가 들을까 초긴장인 채 항변했다. 그런데 시후는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친히 컵라면을 수인의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증명해.”

“예? 뭘 증명해요?”

“네 말처럼 각자 인생 살자면서 내 금쪽같은 새끼 몰래 낳아 키울 일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무젓가락까지 쫙 쪼개서 시후는 수인의 컵라면 위에 올려주었다. 수인은 뭐가 단단히 말려 들어가는 것 같기는 한데, 정신을 차리려고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임신 테스트라도 해봐 드려요?”

“너 배란기 언제야?”

소파에 앉은 채로 점프를 해서 천장에 머리를 쿵하고 찍고 싶은 수인이었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이야. 이 남자 현시후 잘못 건드린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부끄러운 건 오로지 수인만의 몫이던가.

“나. 남의 배란기는 왜 묻고 그래요? 부끄럽게.”

“배란기 언제야? 우리 정확하게 12일 밤 11시 40분부터 13일 새벽 4시까지 했어.”

수인은 소파에 픽 쓰러졌다. 가리고 자시고 할 수도 없는 의사와 의사 사이였다. 수인은 이제 배가 고픈 줄을 모르겠고, 현기증까지 마구 밀려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의사 휴게실을 탈출했다. 미쳤다. 돌았다. 왜 가만히 있는 사자의 코털은 건드려서는 일을 이리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후회가 막심이었다. 

현시후, 적어도 수인이 미쳐 좋아했던 그라면 한번 생각한 건 어떻게든 해결하려 드는 남자였고, 뱉어낸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내는 남자였다. 

수인은 퇴근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진료실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 앞에 시후가 딱 버티고 서 있을 것 같았다. 자꾸 뭉그적거리고 있으니 수인의 담당 간호사가 답답한지 먼저 말을 꺼냈다.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예? 해야죠. 저, 같이 나가요. 네?”

수인은 잽싸게 책상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어 휙 던지고 겉옷을 걸쳤다. 가방까지 챙겨 단단히 어깨에 메고 담당 간호사의 팔에 팔짱을 꼈다. 당황한 담당 간호사가 어이없어 했지만 지금은 일단 현시후라는 사자를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수인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긴 했지만 담당 간호사 덕분에 주차장까지 무사히 당도하였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갑자기 월차를 왜 내신 거예요?”

“네? 그. 그냥 서울에 좀 가 보려 구요.”

수인은 왕 부장에게 한소리 듣고도 바로 내일 토요일에 월차를 썼다. 바로 다음 날 월차를 쓴다면 어느 직장에서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수인은 승인을 안 해주면 무단결근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1년 넘게 월차 한번 안 쓴 기특한 직원이었기에 왕 부장은 당장 하루 전에 이런 법은 없다 면서도 융통성을 발휘해 주었다. 

수인은 그길로 서울로 내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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