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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9)화 (9/88)

9화

뒤돌아 서 있어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악을 써대는 수인이 과연 뒤돌아서서 간호사를 볼 수 있을지 시후는 걱정이 되었다.

“저기. 김 과장.”

“하! 선배 완전 웃겨! 왜요? 더 떠들어 봐요. 김수인이 현시후 덮쳤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래요! 리얼리티 좋아하잖아!”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소리 높이는 걸 봐서는 수인이 진짜 열 받은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가끔 보게 되긴 했지만 수인이 이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대는 건 남편의 폭력으로 장기가 파열되어 실려 온 환자를 본 이후 한 달 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스럽게도 이 공간에 세 사람이 있었다. 시후는 수인을 조심스레 다시 불러보았다.

“저, 김 과장?”

“아 진짜! 미쳤어! 와~”

미친 건 지금 현재로는 현시후가 아니고 김수인이 되어 버린 걸 어쩌려는지. 수인은 만화영화의 공룡처럼 입에서 불을 뿜을 듯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는 그래도 여자의 치부를 가려주고 싶은 마음에 담당 간호사에게 나가달라고 손짓을 보냈다. 들을 거 다 들어 민망해진 간호사가 조심조심 문을 열고 나가는데도 수인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 여자를 보는 따끈한 눈빛으로 턱까지 괴고 있었다. 

난리를 쳐대는 모습도 어쩜 저리 예쁠까. 뿔을 있는 대로 내고 있어도 남자의 눈에는 예뻐 죽겠다. 저 모습 저대로 시후의 품에 달려와 준다면 더없이 예뻐서 심장이 퐁하고 터질 것 같았다. 얼굴까지 시뻘게져 있는 수인 앞에서 턱을 괸 채로 시후가 말했다. 

“진정 좀 하지?”

“진정하게 생겼어요? 나 의료원에서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어요. 결국 선배 결혼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나를 얼마나 처량하게 생각하겠어요?”

“누가 닭이고 누가 갠대?”

솔직히 말해서 이 며칠 남자는 개였다. 수인의 냄새를 찾아 킁킁거리며 수인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꼬리가 다 빠지도록 흔들며 자기를 봐 달라고 애걸하는 엄청난 대형견이었다. 

또 닭이면 어떤가. 수인을 볼 수만 있다면 새벽에 목이 비틀어 질듯 울어대는 닭이라도 좋았다. 

찾아다녀야 겨우 얼굴 쪼금 보여주던 수인이 열 받아 따지러 찾아오긴 했지만 이렇게 또 얼굴을 볼 수 있어 좋기만 한 시후였다. 이 남자야 좋아 죽겠는 얼굴이지만 이미 열을 받을 대로 받아 끓어 넘치고 있는 수인은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극한 감정을 쏟아내었다. 

“와! 진짜 싫다. 진짜 싫어졌어.”

“나도 너 좋아해.”

싫어졌다는데 시후는 꿀을 줄줄 흘리며 고백을 해댔다. 그러나 그 끈적끈적한 고백이 뚜껑 열린 수인에겐 진정제가 아니고 증폭제일 뿐이다.

“좋아해? 이제 와서 뭐가 좋아요? 지금 장난해요? 난 끝이라고요!”

“장난 아니야.”

이런 말 진작 했었더라면 수인이 감동을 받아 마땅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오기까지 생겨버렸다. 이 남자에게 더는 휘둘리지 않으리라, 이제 독하게 돌아서는 멋진 모습 보여주리라. 

“말이 안 통해. 왜 내가 이런 남자를 12년이나 좋아했을까. 내가!”

열 받은 사람이 쉽게 하는 실수였다. 속을 들키는 것. 그러나 시후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휘파람을 불고 싶은 쾌거였다.

“김수인. 12년이나 날 좋아했어? 인마 진작 귀띔을 했어야지. 아우 저 예뻐 가지고.”

시후는 당장이라도 책상을 훌쩍 뛰어넘어 이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다. 허락 딱 한 번만 해주라 김수인. 다른 건 안 해. 그냥 꼭 껴안아만 보자. 시후의 둥글둥글해진 눈은 꿀로 가득 들어찼다. 

이곳이 병원이라 다행이었다. 이러다 혈압이 터져 쓰러지더라도 실력 좋은 의사 현시후가 있으니 죽게 내버려 두진 않으리라 믿었다. 이 믿음도 사실 열 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한데, 아. 진짜 열 받는다. 수인은 보글보글 끌어 오르다 지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간호사가 다시 방문을 엄청 큰소리로 노크를 했고 전화벨이 울려댔다. 아마도 응급상황이 발생한 것 같았다. 머리를 쥐어뜯던 수인도 눈빛이 달라졌다. 눈에 꿀이 가득 들어찼던 현시후도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인은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잡은 채 물었다. 

“뭐예요?”

“총상환자!”

“총상?”

시후가 겉에 걸쳤던 하얀 가운을 벗어 의자에 툭, 하고 던졌다. 수인은 벌써 진료실 문을 열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복도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응급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바깥쪽에 연결된 응급실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고, 군 응급차가 도착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원거리에 있는 군 병원까지 갈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워낙 지방에 뚝 떨어진 의료원이라 일반 상황보다 특수한 상황을 곧잘 겪곤 했지만 수인은 총상 환자는 처음이었다. 시후가 먼저 달려 나가 군 응급차에서 환자를 내렸다. 수인은 환자의 의식 상태를 확인하였다. 바이탈 사인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미약했다. 진료를 보고 있던  왕 부장도 달려왔다. 

“CT 찍을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현 과장 총상 환자 수술해 본 적 있나?”

“네. 군의관 복무할 때 한번 집도한 적은 있습니다.”

이미 시후는 복부에 심한 상처가 나 있는 상태를 눈으로 확인 중이었고, 왕 부장은 여러 장기가 손상된 상태를 확인하고 수인까지도 불러들였다. 

“좋아. 김 과장도 들어오지.”

왕 부장이 수술 시작 전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수인도 시후도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총상환자가 수술 방 1번 실에 옮겨지고 긴장감이 팽팽한 가운데 수술이 시작되었다. 왕 부장이 찢어진 위장들의 출혈을 잡아갔고, 시후가 터져버린 간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수인은 전문 수술 방 간호사가 있었지만 시후와 손발이 제일 잘 맞는 관계여서 보조를 잘 맞춰가고 있었다. 나이 22살의 어린 병사는 총기 사고로 지금 저승 문턱 앞에 서 있었다. 시후는 마취과 의사의 의견을 들어가며 수술 범위를 넓혀갔다. 

“지금 혈압이 떨어집니다.”

“피는 쏟아 붓고 있습니다.”

수인이 과 출혈로 인한 혈압 저하를 일축했다. 그렇다면 과다 출혈은 아닌 듯하고, 시후가 벌려 놓은 복부로부터 일제히 손을 놓으라는 신호를 하였다. 

“초음파 준비해주세요.”

시후의 말에 수술 방 간호사가 재빨리 초음파 기계를 준비하였다. 준비된 기계를 심장 쪽에 들이대었다. 마치 속 안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정확하게 혈압이 떨어지는 이유를 찾아내었다. 

“심낭에 피가 많이 고여 있는 걸로 봐서 총알 파편이나 다른 이유로 심장이 손상된 것 같습니다.”

시후의 진단에 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한태식 선생님 원내에 있나?”

“호출해 보겠습니다.”

수술 방 간호사가 인터폰 쪽으로 빠르게 이동해갔다. 환자는 복부가 열린 채로 다시 생사를 오가고 있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애가 타기 시작했다.

“심낭천자 하겠습니다. 주사 준비해주세요.”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시후가 직접 심장에 피를 뽑겠다고 하였다. 일반외과라 수술이라면 안 하는 거 빼곤 다 하는 과였지만 잘못 처치하게 되면 심장을 뚫을 수도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수인도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의협심 강한 의사였지만 만에 하나 시후에게 지워질 책임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선배. 기다려요.”

그러나 시후는 지금 겨우 22살 어린 병사의 생명 줄을 더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혈압 얼마입니까?”

시후는 말리는 수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 전보다 혈압은 더 떨어져 있었고, 마취과 의사도 바짝 긴장한 채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시후는 주사기를 받아들고 심장 부위를 만져댔다. 위치가 정해졌는지 시후는 비스듬하게 바늘을 꼽기 시작했다. 수인은 눈을 떼지 못한 채 시후의 바늘이 정확하게 심낭에 닿기를 저도 모르게 기도를 했다. 들어가던 바늘을 멈춘 채 피스톤을 잡아당겼다. 금세 붉은 피가 한가득 뽑혀 나왔다. 마취과 의사는 기계 모니터를 보며 반가운 소리를 했다.

“혈압 올라가고 있습니다.”

“한태식 선생님 오고 계시 답니다.”

수술 방 간호사의 반가운 소식도 바로 이어졌다. 

현시후가 가장 멋질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수술 방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이 남자의 매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여자라서 수인은 행복했다.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감정만은 은밀하게 남아서 또 다시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빠르게 당도한 심장외과 의사가 가슴을 열었고, 시후와 수인은 복부를 마무리해 나갔다. 

“석션!”

피가 복강 안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게 수인의 눈에 정확하게 보였다.  

“선배. 콜론.”

대장을 지칭하는 그 한 단어만 듣고도 시후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정확하게 잡아내었다. 외과 의사로서 수인은 눈썰미가 탁월한 편이었고, 외과 의사로서 시후는 손의 감각이 탁월한 편이었다. 둘은 이렇게 함께 살려낸 환자가 수도 없이 많았고, 서로가 손발이 잘 맞아서 수술 파트너로 더없이 좋은 사이였다. 

수술 시작한 지 6시간이 흘렀다. 심장의 찢어진 부위를 잡아낸 심장외과 의사가 제일 먼저 수술 방을 나섰다. 그 사이 큰 장기 봉합을 끝낸 왕 부장이 군 관계자들을 만나러 먼저 수술실을 떠났고, 이제 시후와 수인이 남아 마무리 단계로 들어갔다. 워낙 손발이 척척 맞아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마무리 내가 할게. 그만 쉬어.”

“아니에요.”

여자라서 열외 되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다. 그런 수인을 알기에 측은한 눈빛이 되어 버린 시후는 속도를 높여갔다. 그렇게 오전 외래 진료시간 시작 직전에 시작한 수술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수인은 7시간을 내리 서 있어 부어 뻐근해진 다리를 연신 털어대며 수술복을 벗어내었다. 그 옆에 피범벅인 시후가 거의 팔뚝까지 피로 물든 부위를 씻어 내고 있었다.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에 나란히 선 두 사람. 시후는 담백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사귀자.”

피곤에 찌들어 멍해진 얼굴로 수인이 시후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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