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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8)화 (8/88)

8화

시후는 한소리 할까 하다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새털처럼 많은 날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으니 오늘 아주 결판을 낸다면 속은 시원하겠는데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짝사랑해온 만큼 수인을 짝사랑할 마음의 각오쯤은 되어 있으니까. 

대리운전을 불러 놓고 두 사람은 마치 싸움을 한 사람처럼 뚝 떨어져 서 있었다. 다가가면 수인이 한발 멀어지고, 또 다가서면 수인이 또 한발 멀어지니 아예 포기하고 시후는 떨어져서 수인을 보고만 있었다. 

곧 대리기사가 도착하고 수인이 얼른 조수석에 타려 하자 시후가 그녀를 뒷자리로 밀어내었다. 어두워서 다행이지, 백주 대낮이었다면 시후는 아무 옷가게라도 뛰어 들어가 제일 두껍고 깜깜한 옷을 사 들고 나와서 수인을 입혔을지 몰랐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수인은 제 차라고 자기가 조수석에 앉으려 했다. 그것도 앙큼하게 예쁜 모습 노출한 주제에.

“뒤에 타.”

“왜 사람을 떠밀고 그래요?”

지금 시후는 사방 천지가 적들인 것 같았다. 수인의 매력을 다른 놈 누구라도 보게 될까 술이 다 깨버렸다. 그런 시후의 속마음을 알 턱 없는 수인은 떠밀린 것만 억울해서 몸을 비틀어 댔다. 

결국 투덜거리며 수인은 뒷자리에 탔고, 시후는 화난 사람처럼 조수석에 앉았다. 거리라고 해봤자 차로 20분 거리인 사택이었고, 낯선 대리기사는 기사대로, 시후는 시후대로, 뒷자리에 수인은 수인대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섞지 않은 상태로 사택에 도착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수인은 대리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하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앞서 걸었다. 

겨우 3층짜리 빌라인데다 엘리베이터는 없었기에 앞서 계단을 오르는 수인을 시후는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제 딴엔 멀쩡한 척하고 걷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계단에서 구를 듯이 걷기에 시후는 얼른 계단을 뛰어올라 수인의 팔을 잡았다. 

“왜 이래요?”

“조용히 해라. 꼭 술도 못하는 게 조절을 못 해.”

수인이 자꾸 몸을 휘청이며 기대오는 통에 수인의 팔을 잡았던 시후의 손등 위로 수인의 봉긋한 가슴이 말랑하게 전해졌다.

“하! 그러는 그쪽은 그렇게 조절을 잘해서 그날 새벽까지 그랬나?”

술에 취한 여자는 용감했다. 극구 버티고 난리를 치던 수인이 제 입으로 이야기를 다 하니 맨 정신인 시후는 피식 웃음만 나왔다. 자신의 능력을 은근히 칭찬한다고 느껴지는 말이 또 남자의 피를 바글바글 끓게 만들었다. 

“김수인.”

“왜?”

“너. 지금 그 말 엄청 자극적인데 조심 좀 하자. 오늘 진짜 너 덮치고 싶으니까.”

시후는 진심이었는데, 수인은 그 말에 까르르 웃어댔다.

“왜 웃어?”

“선배. 그거 이별 여행 같은 거라고. 이별 여행. 비록 우리가 사귄 건 아니었지만.”

시후는 수인이 시작도 끝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어 불쑥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계속 실실 웃으며 비틀거렸다. 이미 술에 취한 수인을 상대로 더 말해 뭐할까. 시후는 한숨이 푹하고 나와 버렸다. 

비틀거리며 301호까지 올라온 시후는 자연스럽게 수인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사실 비밀번호라고 할 것도 없었다. 시후가 쓰고 있는 학번 끝자리 2954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번호였지만 수인의 집에도 그 번호가 걸려 있었다.

문이 당연한 듯 열렸고, 시후는 손등을 타고 계속 야릇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긴장을 한 채 수인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피가 끓어올라도 수인을 쉽게 대할 수는 없었다.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는데 감히 어딜! 시후는 득도한 사람의 마음으로 수인을 아껴주고 싶었다. 

“들어가!”

“들어간다. 가!”

어떤 마음으로 수인을 집안에 넣어주는지도 모르면서 수인은 까불고 있었다. 

“이게 자꾸 반말이야?”

“뭐? 어차피 선배하고는 영원히 빠이빠이 할 건데 뭐?”

수인이 부어오른 입술을 쑥 내밀고 이야기를 하는 통에 시후는 말의 내용보다 시각에 끌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득도한 사람답게 간신히 참아 넘겼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수인을 힘껏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중얼거렸다.

“김수인. 나,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시후는 이제 수인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려 마음을 먹었다. 겁쟁이 같이 미적거렸던 현시후는 오늘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불붙은 남자가 뭔지 보여주리라. 기다려 김수인.

***

다음날, 수술환자 회진을 돌다 입원실 복도에서 마주친 시후는 수인을 보고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나 수인은 못 본 체하며 은근슬쩍 남자 간호사 진창욱에게 말을 걸어댔다. 

더 붙어 서기만 해봐라. 불붙은 시후의 눈동자는 질투로 활활 타올랐다. 시후는 수인과 진창욱 사이로 자리를 잡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너른 어깨를 십분 발휘하여 데스크에 팔을 전부 올려 영역을 넓혀갔다. 

시후로 인해 점점 밀려난 수인은 데스크 끝 쪽에, 진창욱은 머리를 쓱쓱 긁어대며 데스크 안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갑자기 중간에 떡 버티고 있는 시후 때문에 이산가족이라도 되는 듯 큰소리로 수인이 말했다.

“김미순님요 욕창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네. 과장님.”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듯 진창욱의 목소리가 거대한 시후를 넘어 간신히 돌아왔다. 그마저도 시후가 수인을 돌아보기에 수인은 재빨리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는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발사!

“몸은 좀 괜찮아? 어젯밤 무리 많이 했지?”

듣는 사람들 귀를 다 의심할 소리를 해놓고 시후는 태연하게 차트를 휘리릭 휘리릭 넘겼다. 시후는 이 의료원의 스타였다. 반짝반짝 아름답게 반짝이는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 그런 남자가 수인에게 희한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하나둘이 아닌 이곳에서 시후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해 놓고 태연하기는 또 얄미울 정도로 태연했다.

시후가 흔들어 댄 간호사 데스크는 일순간 핵폭탄을 맞은 자리처럼 고요했다. 여기저기서 궁금증이 폭발하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괘. 괜찮죠. 뭘 그런 걸 물어요?”

당혹스러웠지만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는 할머니 말이 생각났다. 아니다, 전래동화에서 나왔던가. 아무튼 수인은 정신을 차려보려 안간힘을 썼다. 

“아니, 어젯밤에 너 너무 힘들어 하길래.”

파시식. 정신을 차려서 해결될 문제의 범위를 넘어섰다. 아. 이런. 이미 정신 따위는 가망 없는 건가. 수인은 링 위에서 주먹 한 방에 KO 당하기 직전이었다. 시후는 질투에 눈이 멀어 너무 했나 양심이 찔리긴 했으나 이참에 김수인에게 침 제대로 발라야겠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았다.

“내. 내가요?”

주책없게 말은 왜 더듬고 난리냐고. 위기에 강한 강심장 김수인. 이리 쉽게 죽을 거야? 어서 이 고비를 사뿐하게 뛰어넘으라고! 

수인의 자아는 요란법석을 떨며 수인 자신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은 이 상황을 어쩐다.…….

야릇하다 못해 선정적인 대화를 들으며 사람들은 마음속 오지선다에 답을 적어 내렸다. 

1번, 김수인과 현시후는 잤다. 

2번, 김수인과 현시후는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다. 

3번 김수인과 현시후는 걱정할 만치 육체적으로 엄청난 밤을 보냈다. 

4번 김수인과 현시후는 선후배인 척하더니 남자와 여자 사이였다. 

5번 김수인과 현시후는 공개 연애를 할 생각인가 보다. 

갑자기 발소리가 요란하여 수인이 고개를 돌렸더니, 얼마 전 입사한 간호사가 입을 틀어막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게 보였다. 설마 울면서 입을 틀어막은 건 아니겠지? 동료 간호사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그 간호사의 뒤를 짠하게 처다 보는 걸로 봐서 현시후를 좋아하던 여자가 분명한 것 같았다. 

아. 이렇게 또 한 여자가 현시후로 인해 김수인에게 쌀쌀맞게 돌아서겠구나. 휴, 이 인기 많은 남자를 왜 건드려 가지고.

그런데 분위기를 이상하다 못해 야시시하게 만들어 놓고 현시후는 냅다 돌아서서 복도를 걸어가 버렸다. 데스크에 덩그러니 남게 된 수인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과장님.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병원 돌아가는 일이라면 사소한 것마저 그냥 넘길 수 없는 수간호사가 수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그 눈빛, 제발 진정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인은 따가운 시선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예? 무슨 일이요? 아. 어제 현 과장님하고 피자 먹었어요. 그게 다인데.”

진짜라고 속을 까뒤집어 보여주어도 이미 늦은 분위기였다. 피자라는 대목에서는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피자~”

수간호사의 한마디에 수인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해졌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뭘 생각하시든 그건 틀린 겁니다.”

수인은 분위기를 바꿔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섰다. 괜스레 주절주절 떠들어 대봤자 입 틀어막고 달려가는 또 다른 여자를 또 보게 될 것만 같았다. 

화로 통제가 안 되는 몸은 엇박자로 걸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게 뻔 하지만 지금 당장 수인이 해야 할 일은 현시후를 잡으러 가는 일이었다. 

아주 개떡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시후는 제 진료실에서 오전 외래 진료를 준비 중이었다. 

“현 과장님 안에 있죠?”

“네.”

시후의 담당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수인이 노크도 없이 시후의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 시후를 보니 꼭지가 있는 대로 돌아서 수인은 문을 또 쾅, 하고 닫았다.

“뭐예요? 지금 나 엿 먹이는 거예요?”

수인은 아마 시후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더러는 오래 붙어 다니는 수인과 시후를 잘 엮어 주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시후는 의사치고 유난히 큰 키와 떡 벌어진 피지컬에 조각같이 생긴 외모까지, 그를 좋아하는 병원 내 여자들을 줄 세워 버스에 실으면 버스 열 대분은 꽉꽉 들어차고도 남았다. 그런 선망의 대상인 남자가 오늘 아침 5층 간호사 데스크에서 수인을 콕 찍어 공공의 적을 만들어 버리다니.

“엿?”

“아니, 5층에서 말이에요. 그 무슨 그런 말을 해요?”

“5층? 무슨 말?”

시치미를 떼는 얄미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수인은 강력하게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다그쳤다.

“뭐 나하고 잤다는 거 광고라도 하는 거예요, 뭐예요? 왜 그래요, 정말?”

마침 진료실로 들어온 시후 담당 간호사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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