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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7)화 (7/88)

7화

흠!

남자는 더 크게 기침을 하고 싶었으나 혼자 보기도 아까운 수인을 다른 놈들이 볼까 싶어 불안했다. 시후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고 하던 말을 이었다. 

“기억 날 텐데?”

“아. 그랬다고 치고. 그게 뭐요?”

이왕 잡아떼기 시작했으니 어물거리고 버벅 거리면 들통 나기 십상이었다. 거짓말이던 상상 속의 이야기 던 쭉 밀고 나가야 했다. 뻔뻔함은 필수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열을 꽤 받는 지점이었다.

“치고? 치고? 왕 부장님이 좀 촉새냐? 그 부인은 딱따구리인 거 몰라? 모르긴 몰라도 그날 너랑 나랑 아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온 동네방네 소문이 파다했을 거라고.”

시후는 아주 좋은 고지를 점령한 듯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미 동네방네 자신을 위해 소문이 나 있기를 은근 기대하는지 시후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수인은 시후의 말에 동의를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의 편안한 미소에 신경질이 치밀었다.

“와, 현시후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뻥쟁이네.”

뻔뻔함은 필수였고, 센 단어는 옵션이었다. 

“뭐 뻥쟁이? 김수인. 와, 좋아 삼자대면 하자. 어?”

기억에 없다고 순순히 시인해도 될 것을 바득바득 우겨대는 수인을 참을 수 없었다. 시후는 열을 받아 펄쩍 뛰었다. 유치하지만 말싸움하면 꼭 나오는 삼자대면, 이게 공정한 일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지금 시후와 수인에게 삼자대면은 긁어 부스럼이나 만들 일이지 명쾌하게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왜 자꾸 지나간 일을 걸고 넘어지냐고요!”

“지나간 일이라니, 너와 나 새로운 관계를 규정해야 할 중대한 일이지!”

시후가 하고 싶어 안달인 바로 그 일이었다. 돌돌 도망치기만 하는 수인을 간신히 붙잡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 새로운 관계규정. 그러나 수인은 필사적으로 거부해야 하는 일, 새로운 관계규정이었다. 

“그만 좀 해요. 그냥 지나가자고요.”

심각하게 흘러가면 안 되었다. 떠도는 부초처럼 흔들리려고 그 밤을 계획했던 게 아니었다. 그 밤을 기점으로 시후의 마음이 어쨌건 간에 수인은 시후와 질긴 선후배의 인연마저도 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후는 왜 이렇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변덕 부리는 그녀를 잡아야 했다. 지금 자극적인 말이 필요하다면 다 할 수 있었다. 

“와인 막 먹여놓고 옷 막 벗기고.”

서슴없이 나오는 시후의 말에 누가 들을까 수인은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자꾸 왜 그날은 들먹거려요?”

“우리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잖아.”

“와. 입에서 단내가 난다. 여태까지 얘기했잖아요?”

수인은 다시금 팔짱을 끼고 시후를 째려보았다. 그런데 어쩌나, 시후는 수인이 모아올린 가슴에 시선이 착 달라붙었다. 시선을 아무리 돌려 보려 해도 이미 맨눈으로 보았고, 만져보았고 맛을 봐버린 일이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김수인, 너 일부러 팔짱 끼는 거지?”

시후의 끈끈한 시선이 닿아있는 가슴을 내려다보고 수인이 화들짝 놀라서 팔을 풀었다.

“뭐라고요? 이거 성희롱이야. 지금 어딜 보는 거예요?”

이 정도로 성희롱이라면 수인이 의도했던 그 밤에 시후는 뭘 당한 걸까. 수인은 말은 그렇게 해 놓고 당당하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아, 술이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다. 술이 다 시켰다고 찌질 하게 핑계 대고 싶었다. 

“너무 노골적이었다. 미안.”

급 사과 하는 이 남자는 또 뭐야. 수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인에게 이 남자 현시후는 훼손하기 싫은 첫사랑이자 보고 싶은 모습만 골라보는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훈 내 진동하는 멋진 남자 선배였다.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종목이 없는 남자였고 그가 무슨 대회라도 출전한다 치면 우승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부면 공부, 전 과목 A는 당연한 일인 남자였고 원탑이냐 아니냐가 늘 화젯거리일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도 대단했다. 의대를 다니면서도 방송 반 동아리를 끝내주게 열심히 해서 그의 방송을 들으려고 일부러 등교하는 여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남자의 입술과 눈빛이 지금도 수인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 남자 현시후는 수인과 다른 생각으로 아주 진지했다. 

“난 자유로워졌다. 그래, 까딱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할 뻔했다.”

시후는 갑자기 진지 모드가 되어 말하기 시작했다. 

“결혼 자체에 생각이 없었는데 이젠 생각이 생겼다. 널 진작 못 알아봐서 미안했어.”

“뭐가 생각이 생겼어요? 또 뭐가 미안해요?”

이제 수인은 진지해지기 싫었다. 이미 마음의 정리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밤이 있기까지 오락가락하던 마음은 정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시후는 수인의 생각과는 아주 달랐다. 

시후에게 수인은 그랬다. 꽤 오랫동안 주변에 머문 여자 후배였기에 여자보다는 후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수인을 여자로 보지 않았던 건 시후의 가슴에 깊고 진한 멍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 사랑했던 여자는 의대 동기였다. 누구보다 말이 잘 통하고 누구보다 서로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이였다. 너무 잘 맞는 사이였기에 이 남자는 이 여자와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리도 믿었던 영원한 사랑은 시후에게 기나긴 상처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시후의 가슴을 후벼 팠다. 같은 과 동기였기에 두고두고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열 감기처럼 시후를 괴롭혔다. 

어디를 가나 그녀의 흔적이었고, 그녀의 소식은 빠르게도 귀에 들어왔다. 그런 이유로 같은 과 여자 누구라도, 아니 더 나아가 어떤 여자라도 다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남자로서 대단한 겁쟁이가 되어 버린 건 과거를 털어 내지 못한 못난 자신 탓이었지만 의사로서 일만 하는 삶도 나쁘지 않은 시후였다. 

그런 시후에게 난입한 여자 김수인.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닌 욕망이 끓어 넘치는 남자로 만들어 준 김수인. 지금도 안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김수인. 김수인이라면 남은 인생 다 올 인하고 싶은 남자가 되어 버렸다. 

“또. 또 저 봐. 사람 앞에 앉혀놓고 딴생각하는 것 좀 봐!”

잠시 생각한다는 게 그랬던 모양이었다. 수인이 뾰로통해져서 피자를 마구 뜯어 먹었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나서 시후는 히죽 웃었다. 이렇게 서로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는데 수인은 지금 새로운 관계규정에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시후는 맥주를 또 한잔 들이켰다.

“제발 선배는 그 버릇 좀 고쳐요. 이다음에 선배 와이프도 아마 선배 그 모습 때문에 싸우자고 할 거니까.”

“고양이 쥐 생각하냐?”

“진짜. 이 양반이! 남같이 않으니까 이런 말도 해주는 거라고요.”

“우리가 이제 남일 수가 없지 않냐?”

유치한 말싸움 같기는 했지만 수인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람마다 자기를 둘러싼 원이 하나 있다면 수인은 무척이나 시후의 원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남몰래 혼자 애달파 하던 여자였다. 동그란 원을 터트려서라도 그 안에 무사히 들어가고 싶던 수인은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 그를 이미 예정되어있는 여자에게 보내 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옥신각신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던 그들은 주문한 맥주가 테이블 위에 세팅되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커다란 맥주잔 안에 하얀 거품이 일고 있었다. 둘은 씩씩거리며 맥주 한 잔씩 뚝딱 비웠다. 피자가 아직 반 판 이상 남았는데 벌써 맥주만 두 번째 주문이었다. 

“아. 저 화장실 좀.”

수인이 일어나 살짝 이상한 스텝을 밟으며 걷는 모습을 보고 시후는 한숨을 내쉬며 따라 일어났다. 저 옷 꼴을 하고서 다른 놈들이 볼까 싫었다. 시후는 수인을 뒤따라갔다. 누가 뒤에 따라오는지도 모른 채 수인은 피자 가게를 나가 건물 복도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남녀공용 화장실이라 시후는 괜히 보초 아닌 보초를 섰다. 안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소리에 시후의 한숨 소리는 더 커졌다.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심정처럼 불안하게 만드는 저 여자가 바로 깜찍하게도 자신에게 그런 화끈한 밤을 선사했다니 기가 막혔다. 

볼일을 시원하고 보고 나온 수인이 멀뚱히 서 있는 시후를 보고 피식 웃었다.

“선배도 쉬?”

“야!”

“맥주는 다 좋은데 배가 너무 빨리 불러. 나 먼저 들어가요.”

또 이상한 스텝을 밟으며 그래도 길은 잘도 찾아가고 있었다. 뒤따라가는 남자는 단단히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었다. 뭘 해도 예뻐 죽겠고, 뭘 해도 귀여워 죽겠고, 뭘 해도 놓을 수 없었다. 

맥주잔을 하늘 높이 치켜들던 시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하!”

“그만 갑시다. 벌써 10시네.”

“왜? 아직 할 말 다 못했잖아.”

시후는 지금 애가 타들어 가는데 수인은 굳건하게 선을 그어댔다. 

“아. 진짜. 무슨 얘기를 자꾸 하자는 거예요? 내가 놔줄 때 얼른 토끼는 게 좋을 거예요. 선배.”

이 진심 어린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좋은 거야. 우리는 미래가 없어. 

수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카운터로 향했고, 시후는 아슬아슬 걷는 수인을 얼른 잡아챘다. 휘청이며 흔들린 수인이 멀뚱멀뚱 시후를 쳐다보았다. 

“계산을 왜 해?”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는데 모르는지 쭉 내어 문 게 당장이라도 키스를 해버리고 싶었다. 간신히 참아 내며 시후는 수인을 뒤로 밀어내었다. 그러자 밀리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는 수인이 시후의 팔뚝을 잡았다. 시후의 온몸은 이제 성감대라도 되는 듯 수인의 터치에 몸에 열꽃이 피어나려 했다. 흥분하면 초록 괴물로 변하는 영화 캐릭터의 심정이 꼭 지금 자신의 심정 같았다. 

“에이. 내가 한번 낼게요. 선배가 만날 계산했잖아요.”

“됐어.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수인의 상황이라면 지구상에 시후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효녀 중에 효녀였고, 김정수 자선 의원에 월급 전액을 쏟아 부어주는 아름다운 의사 김수인. 수인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게 있지만 시후가 수인과 12년을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수인에게 선배는 후배한테 절대로 얻어먹는 그딴 짓을 할 수 없고 그딴 짓을 하는 못난 선배 만들지 말라고 훈계했다. 지금 받는 월급 따위가 시후에게 중요한 벌이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매번 계산을 하는 시후에게 늘 미안했다. 

“만날 선배라고 선배가 다 사는 거 이해는 하는데, 얻어먹는 것도 이제 그만할래요. 어차피 선배 결혼하면 더는 만나지 말아야 할 테고.”

수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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